그것
왔다,고 생각했다
왔다 다음에 쉼표를 찍지 않으면
숨넘어갈 것 같았다
부끄러운 페이지처럼
퍽 들썩 화들짝 헐레벌떡
거꾸러지다 떠들리고 놀라다 날뛸 것 같았다
오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라는 말이 먼저 당도해 있었다
아르키메데스의 법칙이나
피타고라스의 정리,
근의 공식처럼
외울 수도 없었다
법칙은 불시에 위반되었고
정리는 내용 증명을 요구했으며
공식은 케케묵어 상황에 대입할 수 없었다
사랑은 안간힘을 다한 헛발질이었다
모닥불이 꺼진 뒤에야
모닥모닥 쌓인 말들이 들렸다
그 말들에 짓눌려
힘없이 사그라진 불씨가 보였다
잿더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끝내’라는 말이 사방에 고여 있었다
갔다,고 말했다
갔다 다음에 쉼표를 찍지 않으면
숨 막힐 것 같았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글/ 오은
모닥불이었다. 영원할 것처럼 잔잔하게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재가 된다. 한때는 붉은색이었으나 이제는 잿빛만 남았다. 거기에는 미처 타지 않은 나무 조각도 있다. 나는 그게 일종의 감정 찌꺼기 같다. 사랑할 때 미처 건드리지 못했던 감정의 층위일 수도 있고. 그런 잔해를 보고 나서야 깨닫는 것 같다. 내가 사랑했구나. 내가 타오르던 시간이 있었구나.
당신의 시에 남아 있는 사랑의 흔적은 무엇인가?
내 시는 실패한 이야기, 넘어진 이야기, 돌부리에 걸려서 휘청이는 이야기다. ‘애인’이라는 시도 그렇다. “애인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했다”라는 구절. 작년에 가수 윤덕원이 ‘여름이 다 갔네’라는 노래로 만든 ‘갔다 온 사람’이라는 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길눈이 어두운 사람인데 어느 날 낯선 거리를 걷는데 어쩐지 와본 느낌이 드는 거다.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로 시작해서 전에 만났던 사람이 생각나고 그 친구와 주고받았던 반소매 티셔츠, 함께 보낸 여름과 겨울이 생각나고.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개인의 경험을 문학작품으로 끌고 들어갈 때, 그 작품은 어쩔 수 없이 후일담의 성격을 지닌다. 한창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당신의 모든 시는 사랑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시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크게 보면 이성애뿐만 아니라 친구에 대한 사랑, 어린아이들을 볼 때의 사랑까지 모두. 시라는 것은 “조금 이상한데?”에서 시작한다. 평소와 다른 약간의 불편한 마음이 시를 태동시킨다면 마침내 시에 진입하고 허우적거리면서 한 행 한 행을 쓰게 만드는 마음은 결국 사랑이다.
이를테면 ‘이력서’라는 시의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이라는 구절은 짝사랑 그 자체다.
회사에 지원할 때의 마음도 짝사랑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집에 들어 있는 ‘면접’이라는 시도 그렇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하지 않나. 사회생활에도 사랑의 방식처럼 먼저 마음을 품은 쪽이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게 마련이니까.
시를 잘 쓰기 위해선 일상의 특별하고 낯선 순간을 발견하는 재능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 있다. 그것이 시를 잘 쓰는 능력이라면 사랑을 잘하는 능력은 무엇일까?
사랑을 잘하는 능력은 포기하는 능력 아닐까. 사랑하면 나의 일부를 상대에게 할애해야 하지 않나. 그건 기존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일이다.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고. 지금까지 누려왔던 것들을 기꺼이 버릴 줄 아는 용기가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늘 후회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어떤 감정 앞에서 한 발 늦는 사람. 관계가 끝나도 그 사람이 준 물건들을 못 버리고 집 안 어딘가에 봉인해놓는 사람. 다육식물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식물에 볕을 잠깐 쐬어주려고 밖에 두었는데 그 사이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일분 남짓한 시간이었는데 비를 맞고서 식물이 과습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헤어졌구나. 식물은 결국 집 앞 마당에 묻어주었다. 차마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겠더라고. 그후로 한동안 자괴감이 들었다. ‘다육식물 하나도 못 키우는 주제에 내가 누구랑 관계를 맺고 만날 수 있을까.’
사랑이 우스워진 시대다. 우리에게 여전히 사랑이 필요할까?
요즘 미디어에서는 사랑이 소비되는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보는 사람, 출연하는 사람, 만드는 사람 모두 알고 있을 거다. 진짜로 자신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구식이야” “구닥다리야”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아직 잿더미 속에 남아 있는 불씨 같은 순정이 있다고 믿는다.
계절이 바뀌면 입을 옷을 꺼내고 세탁을 한다. 그럴 때 주머니에서 영수증이 나올 때가 있다. 혹은 그 사람이랑 보러 갔던 공연 입장권 같은 것들. 거기에 속마음이 담겨 있다. 김선오 시인에게는 껌 종이가 그런 존재였던 것 같다. 껌을 씹다가 단물이 빠지면 버리고 싶다. 길거리에 함부로 버릴 순 없으니까 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때 껌 종이를 건넨 사람이 떠오른다. 껌 종이는 껌을 감싼다. 감싸주는 것. 하지만 곧 버려질 것. 은색 껌 종이에 한 번쯤은 껌을 뱉어서 버려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다 씹으면 여기에 뱉어
너는 내 손에 껌 종이를 쥐여 주었다
종이를 열자
반짝이는 은색이었다
무수한 햇빛이 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너무 환하게 웃는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벌써 몇십 년째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 김선오 外, ‘껌 종이’(〈사랑에 대답하는 시〉, 아침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