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팬츠는 Isabel Marant. 슈즈는 8 by Yoox. 화보에 계속 등장하는 시계는 Jaeger LeCoultre.
올해에만 네 편의 주연작을 공개한다죠? 드라마 〈종이의 집〉 한국판, 〈수리남〉이 넷플릭스에 서비스될 예정이고 영화 〈유령〉과 〈야차〉도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안 그래도 주변에서 근래에 너무 다작하는 거 아니냐고 하시더라고요. 실은 지난 2~3년간 꾸준히 준비했던 작품들이에요. 누구나 그렇듯 그저 일을 해왔던 것뿐이고요.(웃음) 배우에겐 과정도 중요하지만 대중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도 크잖아요. 피드백이 없으면 ‘내가 잘 하고 있나?’라는 질문이 많아지거든요. 한동안 공개되는 작품이 없으니 힘든 점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선 기대감이 커요.
요즘은 아주 오랜만에 갖는 휴식이겠네요. 육아에 푹 빠져 계시다고요.
아이가 생긴다는 건 뭐랄까 다른 표현이 따로 없어요. 그야말로 우주가 뒤집히는 일이에요. 세계관도 바뀌고 가치관도 바뀌어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책임감도 커지고요. 새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이라도 아이 얼굴을 자주 봐두려고요. 자주 눈을 마주치고 교감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뭔가가 느껴지더라고요. 아이는 부모의 시간을 가져가면서 자라는 거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좋은 시간, 좋은 기억을 아이에게 전달하면서 균형을 맞춰가야 하겠죠. 그래서 지금이 참 소중한 시간이에요.
데님 셔츠는 Bally. 반지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넷플릭스의 남자’라는 별명도 있던데요. 〈오징어 게임〉 과 〈종이의 집〉 때문일 테고요. 〈종이의 집〉의 경우엔 원작 드라마가 워낙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잖아요. 특히 본인이 맡은 베를린 역은 스핀오프까지 제작될 정도로 인기가 있는 캐릭터이고요. 부담은 없었나요?
저도 그 작품을 워낙 좋아했어요. 부담감이 없을 수는 없는데, 우선 따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럴 수도 없고요. 원작의 베를린과 저는 전사 자체가 달라요. 국적도 실제 이름도 다르고요. 그러다 보니 비슷한 상황이라도 베를린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태도에 집중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작품이 공개되면 분명히 원작과 비교가 되겠죠. 좋다, 나쁘다 얘기는 나올 수 있겠지만 한국의 〈종이의 집〉을 만들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껴요.
블라인드 시사회 반응이 좋았는데. 감사하게도요.
문자 그대로 일본 순사 역할이죠. 극중 일본어는 통째로 외운 건가요?
급하게 캐스팅이 되어서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재일 한국인 선생님과 거의 같이 살았죠. 대본이나 억양은 통째로 외웠고 히라가나, 가타카나까지 공부했어요.
재킷, 니트, 슈즈는 모두 Prada. 팬츠는 Acne Studios. 안경은 Ray Ban.
일단 배역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불가능할 정도의 일본어 대사였는데 배역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고요.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말씀드렸더니 이해영 감독님이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시더라고요. 목숨 걸고 한번 해보자 했더니 신기하게도, 정말 되더라고요. 완벽하지는 않지만요.
악역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시놉시스만 봤을 때는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크리스토프 왈츠가 연기한 한스 란다 대령이 떠오르더라고요. 맞게 추측했나요?
그 역할이 악역임에도 멋있는 건 자기 나름의 규칙이 명확하다는 점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아주 신사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더 무섭고요. 아주 잔혹하게, 그 사람은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그 부분에서는 비슷한 면이 있을 거예요.
〈유령〉뿐만 아니라 〈야차〉도 배우 설경구와 함께 출연했어요.
전 경구 선배님을 존경해요. 배우로서도 성공적인 마인드를 갖고 계시지만 인간으로서도 배울 점이 많아서 제가 늘 쫓아다녀요. 연기라는 게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현장에서 몸소 보여주세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나도 저런 어른이 되어야겠다’ ‘저런 그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요.
아까 모니터링하다가 느낀 건데요. 왼쪽이 빌런의 얼굴이라면 오른쪽은 멜로의 얼굴을 갖고 있네요.
왼쪽 얼굴이 주름도 많고 인상이 더 세요. 저도 몰랐는데 감독님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촬영할 때도 어느 신에선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돌고, 어느 신에선 카메라가 왼쪽으로 돌고 그래요.
오른쪽 얼굴 같은 작품도 자주 해주세요. 이를테면 본인의 출세작 〈슬기로운 감빵생활〉 같은.
오른쪽도 왼쪽도 다 제 얼굴이긴 하지만 조금 다른 면을 보여드릴 수 있는 작품, 개인적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실제의 저는 어리바리하기도 하고 어디 가면 조금 쭈뼛거리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저를 아는 분들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셔요. “해수는 코미디를 해야 하는데.”
맞아요. 어느 하나에 집중하고 나머지 부분에선 편하게 살아요. 에너지 쏟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요. 쓸데없는 고민 같은 것도 되도록 만들지 않는 편이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주변에서는 멍 때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요.(웃음) 물론 작품에 들어가면 집중력을 발휘하죠. 별로 집중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이런 피로사회에서는 드물고 부러운 성격이네요.
자연에서라면 좋을 텐데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더 스트레스더라고요. 뭘 잘 모르거든요. 컴퓨터는 자꾸 업데이트되고 휴대폰 비밀번호는 계속 바꿔야 하고. 메타버스가 들어온다고 하질 않나.(웃음)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가는 것 같아요.
셔츠, 팬츠, 부츠는 Valentino.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징어 게임〉의 조상우 역은 황동혁 감독이 직접 대본을 건네면서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고 들었어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렴풋이 알겠네요. 황 감독은 확신이 있었을 거예요. 배우의 선한 면과 캐릭터의 악한 면이 잘 섞일 거라는.
이중적인 면을 끌어내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미팅하고 인터뷰할 때도 저의 그런 점을 유심히 보시더라고요.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그 사이를 애매하게 줄타기하면서 선과 악을 모호하게 만드는 인물을 그리고 싶으셨을 거예요. 나중에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해수 씨가 연기하면 조상우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생길 것 같았다. 조상우라는 인물에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요.
역설적이게도 코로나가 극심했던 최근 2~3년을 가장 바쁘게 보냈어요.
힘든 시기지만 사람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잖아요. 영화를 찍어도 극장에 올릴 수 없고 위험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거든요. 조심스럽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던 시간이었어요. 이런 시기에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죠.
시켜줄 때까지 계속 하고 싶어요. 내가 연기에 열정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걸 인지한 순간 바로 그만둘 것이라고 마음먹었던 때도 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저를 봐주는 관객이 있고 함께 하는 회사 동료와 스태프도 있고 가족도 있잖아요. 내 멋대로 연기를 그만두고 자시고 할 게 아니더라고요. 분명히 제 직업이지만 저만의 직업이 아닌 것 같아요. 책임감 가지고 살아야죠.
데님 셔츠, 팬츠는 Bally. 스웨터는 Ralph Lauren. 슈즈는 Converse. 반지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어요.
그러고 나서 상상만 하던 일들이 현실이 되었고요. 〈오징어 게임〉으로 해외 유수 시상식과 행사에 초청을 받아서 출국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에요.
심지어 이 정도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에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죠.
오영수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이 참 와닿더라고요. 〈오징어 게임〉으로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시면서 그러셨죠. “이제는 세상 속에 우리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세상이 있다”라고요. 저는 또 좋은 작품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게 〈종이의 집〉이거나 〈수리남〉이거나 〈유령〉이거나 〈야차〉라면 좋겠네요.
“물 들어오는데 왜 노를 안 저어요?”라는 말, 〈오징어 게임〉 이후에 자주 들으셨죠?
물론 이렇게 다작을 준비하고 계신지는 몰랐지만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면 그 배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요?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는 건 감사하지만 우리는 원래의 방향대로 나아가고 있어요. 언제나처럼 같은 방향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