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쌀쌀한 날에도 ‘박효주’를 생각하면 괜스레 여름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서핑 때문에?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다. 겨울에는 차분해진다. 봄, 여름에 신나게 놀았으니까 겨울잠 자듯 쉼표를 두고 정리하는 느낌. 예전에는 예쁜 겨울 니트나 코트가 좋아서 겨울을 기다렸는데 점점 너무 추워져서 요즘에는 가벼운 패딩이 어디 있나 찾아다닌다.(웃음)
운영하는 유튜브 콘텐츠의 대부분이 서핑 브이로그더라.
살면서 이렇게 뭔가에 몰두한 적은 처음이다.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하다 보니 굳이 취미랄 게 없었다. 서핑은 일부러 시간을 할애하고 열정적으로 하게 된 첫 취미다. 서핑 가면 영상을 많이 찍는데 혼자 보고 그냥 끝내기 싫었다. 음악도 깔아주고 싶고, 편집도 해주고 싶고, 잘 기록하고 싶더라. 작년에 서핑을 시작할 즈음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이 들면서 점점 익숙한 걸 찾는 게 싫었다. 일부러 안 해본 거, 피하던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에 젖는 게 귀찮아서 수영장에 가도 선베드에만 누워 있었는데 막상 해보니 에너지가 막 쏟아지는 거다. 내가 내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환하게 웃을 일이야? 이렇게 신날 일이야?’그랬다. 조회 수랑 상관없이 영상 속의 내 모습이 참 반갑다.
샤 드레스, 반지는 Dior. 귀고리는 Roaju.
유튜브도 운영하고 생각보다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결혼생활이나 일상도 보여줬다. 에세이도 냈고. 인싸다.(웃음)
닫혀 있거나 정적인 사람은 아닌데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역할이 아닌 내 모습으로 어딘가에 서는 게 불편했다. 물론 배역도 ‘나’지만 늘 배역이라는 애가 방패막으로 있으니까 어떤 평가를 받아도 겁나지 않았다. 근데 온전한 ‘나’로 평가받는 건 겁났던 것 같다. 에세이를 냈을 때 작은 서점에서 북토크를 했는데 되게 좋았다. 배역이 아닌 박효주로 섰는데 나를 그대로 봐주는 교감을 느꼈던 거다. 그 이후로 편안해지고 나를 보여줄 수 있게 됐다. 어릴 때는 불안해서 나를 덜 사랑했다. 이제야 자기애가 생긴 것 같다. ‘얘 좀 괜찮은 것 같은데?’(웃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얻게 되었다고 했다. 언제부터 연기를 할 거라 직감했나?
어렸을 때 발레리나가 꿈이었는데 다치면서 접었다. 우연히 〈쎄시(Ceci)〉라는 잡지에 모델을 하게 됐고 연기도 하게 됐다. 좋아서 하기에는 경험이 너무 없었다. 이게 좋은 건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나를 건드리는 게 있었다. “뭐지? 왜 나를 쿡쿡 찌르고 그러지?” 오디션 봤는데 떨어지면 “왜 이렇게 화가 나지?”(웃음) 이런 식으로 오기가 생긴다고 해야 하나? 약간 화나서 시작했다.
자꾸 눈에 밟혔다. 되돌아보면 발레도 연기도 같은 길이지 않았을까? 표현하는 사람으로 살려고 잠시 발레도 했었던 것 같고, 배우도 하는 것 같고. 책을 쓸 때는 펜을 잡고 표현하는 거고.
미니멀한 원피스는 Johnny Hates Jazz. 귀고리는 Engbrox. 체인 목걸이는 & Other Stories. 롱 부츠는 Rekken.
지금까지 나눈 짧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20년 연기 활동의 답이 흘끗 보이는 것도 같다.
지구력? 인내심? 암기력? 기술? 노하우?(웃음) 연기는 정말 매력적이다. 노는 것도 질리고 싫증나는데 이 직업에만 특별히 부여되는 어떤 지구력이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한 원동력은 ‘재미’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보다도 재미있으니까.
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가 한창 방영 중이다. ‘인생캐’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듣지 않나?
촬영 시작하고 지인이 지금까지 인생 캐릭터는 뭐냐고 물어봐서 이게 될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은 있다. 미숙을 처음 만났을 때 심장이 뛰었다. 내가 자신감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묘한 자신감이 생기더라.(웃음) 딱 보는 순간, ‘어? 나 알 것 같고, 내가 얘를 제일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여자들의 삶과 우정이 큰 비중을 차지하더라.
주인공이 30대 중후반의 여자 셋이니 당연히 이들의 삶이 드러난다. 10대나 20대 때는 ‘뭐 있어?’로 살다가 30대 때는 관계가 소중하고 눈에 확 들어오게 된다. 가는 데 순서는 없지만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부모님이 나보다 먼저 돌아가실 테고 남편도 헤어지면 남이 된다. 점점 친구가 같은 반, 한 학년 친구로 지나는 게 아닌 거다. 10년, 20년 지기 친구들은 가족과 친구 그 중간 지점의 관계다. 우리 드라마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터틀넥 톱은 Zara. 쇼츠는 8 by Yoox. 사이하이 부츠는 Prada.
송혜교, 최희서 배우 역시 비슷한 나이 대를 걷고 있다. 드라마 안팎으로 거침 없고 신나 보인다.
여자끼리 하는 신, 여자끼리의 우정, 그리고 우리가 하는 대사들이 너무 좋다. 영은이가 하는 “보톡스 말고 연골 주사로 갈아탐” 이런 거.(웃음) 여기서 어느 한 명이 공감 못하면 현실감이 떨어졌을 텐데 각각 살아온 삶은 다르지만 셋 다 격하게 공감했다. 그리고 “20대에는 꿈이 없고, 30대에는 집이 없고, 사십 되니 미래가 없네.” 이런 허전함, 허무함이 드러나는 대사를 내뱉는 미숙이 갖고 있는 불안과 외로움이 뭘까? 나 완전 공감하는데. 그럼 앞으로 얘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얘한테 무슨 이야기들이 일어날까 궁금했고 와 닿았다. 두 배우는 극중에서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였고 현실에서도 그랬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 배우로서 좋은 동료를 만났다는 것에 감사하고 선물 같은 작품이었다.
금과옥조 같은 미숙의 대사가 많다. “네가 좋아하면 그만이지 알 게 뭐야. 남이 네 인생 살아주나?”라고 시원하게 뻥뻥 날릴 때도 너무 좋았고.
정말 당연한 얘기다. 지금까지 주도적으로 살았다. 부모님이 많이 바빠서 적극적으로 돌봐주지 못하셨지만 그래서 더 신중하게 선택하며 잘 살아온 것 같다. 다만 누가 어려움을 털어놓으면 들어주고 공감하려고 맘을 열어놓지만 먼저 상담해주려고 나서지는 않는다.(웃음)
오버사이즈 코트는 Labeless. 터틀넥 톱은 Zara. 쇼츠는 8 by Yoox. 사이하이 부츠는 Prada.
미숙은 꿈을 접고 가정에 온 힘을 쏟았지만 몸이 아프고 나서야 내 위주로 살 거라고 결단을 내린다. 그 모습을 보며 꿈이나 좌절, 욕망을 다시금 뒤돌아보게 된다고 하더라.
이 직업을 하다 저 직업을 갖는다고 욕망이 바뀌는 건 아닌 것 같다. 사람은 자기 욕망을 끝까지 숨기고 살 수는 없지 않을까? 누르고 살면 언젠가는 터져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원하는 게 뭔지를 찾아 첫 번째에 두려고 했다. 이 작품을 하고 나니 생각이 더 많아졌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는 게 되게 무서웠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야지.
‘저 집은 꼭 살고 말 거야.’ ‘저 차는 꼭 타고 죽어야지.’ (웃음) 물질적인 것들도 너무 중요하지 않나. 가족과 소중한 사람은 항상 잘 챙기고 잘 지내왔으니까. 지금 당장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살고 싶다.
곧 종영을 앞두고 있다. 쉽게 보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많이 허무할 것 같다. ‘THE 허무다’. 나쁜 평가 때문이 아니라 그냥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가깝다. 드라마가 끝나면 이제 미숙에 대해 생각하고 몰입하는 일들이 완전히 끝나니까. 추억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그래도 보내줘야지. 그래서 허무의 끝을 한 번 맛보려고 한다.(웃음)
패턴 드레스, 앵클부츠는 Emporio Armani. 귀고리는 Jealousy. 반지는 Katenkelly.
새 작품이 있지 않나? 〈세 번째 아이〉로 호러퀸에 도전하는 거다.(웃음)
무서운 걸 아예 못 보는데 그쪽에서 나를 선호하는 것 같다.(웃음) 이번 영화는 귀신이 나오진 않고 인간이 인간을 통해 느끼는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런 감정을 느낄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졌다. 10대, 20대 때와는 또 다른 기대감과 새로움으로.
어렸을 때는 그때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지금은 주름도 생기고 탄력도 없어지고 눈도 푹 들어갔는데 눈빛은 좋아졌다. 당연히 지금도 좋다. 다 시간의 기록이지 않나. 어렸을 때는 기록이 별로 없으니 잘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이 기록을 늘어놓고 보니 ‘배우가 생각보다 오래 할수록 괜찮은 직업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4자를 앞에 두고 알게 됐다.(웃음)
이런 흡족한 모습으로 하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역할보다 내가 공감하고 느낀 것들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아이도 낳고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있던 나를 돌이켜보니 이제는 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재미있다. 내가 확장되는 느낌? 한 사람이 좋아서 결혼했더니 내 관계가 넓어졌다. 혼자 지낸 시간이 많아서 지겨웠나 싶다가도 혼자 있는 시간을 그리워하기도 하고.(웃음) 내 삶 안에 여러 인물이 들어와 있는 걸 보면 그 안에서 내가 보이기도 한다. 그건 또 재미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