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런던 스튜디오에서 만난 줄리언 오피

현대미술가 줄리언 오피의 작업이 ‘동시대적 풍경화’라 불리는 건 세상의 가장 ‘보편’적인 대상을 ‘보편’의 방식으로 보여주며 예술의 ‘보편’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독자적인 미술언어의 힘 때문이다.

BY손안나2021.10.10
 

보편의 예술가로 유일하기 

런던 쇼디치에 위치한 줄리언 오피 스튜디오 내부.

런던 쇼디치에 위치한 줄리언 오피 스튜디오 내부.

영국의 현대미술가 줄리언 오피(Julian Opie)처럼 “나는 스튜디오를 ‘공장’처럼 운영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예술가는 흔치 않다. 1980년대 초 골드스미스를 갓 졸업한 ‘젊은 작가’ 오피는 버려진 버스정류장, 정원, 헛간, 친구 집 지하실 등을 전전하며 작업했다. 이내 놀라운 속도로 존재를 알리며 작업공간이 절실해진 그는 스승이자 친구인 미술가 마이클 크레이그-마틴과 함께 도시를 샅샅이 훑다가 런던 끝자락의 쇼디치까지 왔다. 요즘 런던의 트렌디한 문화 중심지로 각광받는 이 지역은 당시만 해도 가구 제작업체들을 제외하고는 먼지만 풀풀 날리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공장 건물을 매입한 오피는 무려 35여 년 동안 이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형 작업을 도맡는 또 하나의 공간까지, 웬만한 그의 작품은 모두 스튜디오에서 원스톱으로 만들어진다. “스튜디오는 예술가로서의 내 사고 체계를 나타내는, 두뇌와 손의 연장선과도 같은 곳입니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1987년부터 내 작업물의 탄탄한 기반이 되는 장소예요.”
 
작가 줄리언 오피.

작가 줄리언 오피.

가파른 나무계단을 오르면 맨 꼭대기 작가만의 공간이 펼쳐진다. 컬렉터이기도 한 오피가 자신만의 컬렉션을 보며 개인 작업을 하고, 휴식을 취하고, 영감을 얻는 장소다. 다채로운 현대미술품, 17세기 거장의 초상화, 고대 이집트의 석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 토라자 족의 나무 조각작품, 콘월산(産) 조개껍데기, 19세기 일본 유키요에 목판화…. 그는 ‘컬렉션한다’는 행위를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곁에 두는 것, 예술적 대상을 늘 감지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해석했다. “작품을 판매해 얻은 수익의 대부분을 다른 작품을 구입하는 데 쓸 정도”로 열정적인 컬렉터는 아예 책상 위에 예술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돌을 늘어놓고 산다. “내게는 굉장히 동시대적 예술로 다가와요. 호모 일렉투스가 흔한 돌로 유용한 도구를 만들었던 때를 상상하죠. 인간이 시각적 수단을 활용해서 느끼고, 의사소통해왔다는 사실에도 큰 자극을 받아요. 예술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에서 파생한 매우 인간적인 결과물입니다.” 오늘도 오피는 가장 멀리 떨어진 시대를 상상하고,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타당한 본능에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스튜디오의 맨 위층은 작가 작업실 겸 고대 조각부터 현대미술품까지 자신만의 컬렉션을 모아둔 공간이다.

스튜디오의 맨 위층은 작가 작업실 겸 고대 조각부터 현대미술품까지 자신만의 컬렉션을 모아둔 공간이다.

서면 인터뷰의 첫 질문은 “현대인류가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던 팬데믹 시대는 당신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 같은가?”였다. 매일 과거를 바라보고 미래로 나아가는 예술가의 답은 이랬다.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던 시대’라는 표현이 너무 남용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류 역사는 숱한 전염병 및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 변화들을 거듭해왔어요. 전례없는 시기를 관통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역으로 지난 50여 년간 대부분의 삶이 얼마나 평안했는지를 떠올려봐야 합니다. 예컨대 내 어머니는 10대 때 비행기가 런던에 폭탄을 투하하는 걸 동네 공원에서 목격했어요. 외할아버지는 러시아의 반유대인 학살을 피해 도망쳤고, 할아버지는 극심한 가난을 피해 호주로 떠났던 배 위에서 태어났죠. 팬데믹이 알려준 분명한 사실은 예술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삶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절감한 시기였다는 것뿐입니다. 물론 예술은 늘 중요했어요. 적어도 내게는 그랬죠.”
 
오피의 인물 작업은 재료와 형식 면에서 나날이 진화 중이다.

오피의 인물 작업은 재료와 형식 면에서 나날이 진화 중이다.

줄리언 오피가 획기적인 예술가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대와 대중의 고른 지지를 받는 예술가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미지의 어떤 부분을 최소로 남기는 식으로 모듈화한 간결한 선과 평면적인 색은 가장 추상화된 미술 요소임에도, 단박에 각인될 정도로 직관적이며 현실적이다. 오피는 자신의 시그너처 기법, 그리고 페인팅, LED 설치, 조각,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세상의 풍경을 그려낸다. 그것은 록밴드 블러의 앨범 표지에서 보듯 이목구비를 단순화한 인물로 탄생하기도, 걷는 사람들의 모습 등으로 구현되기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의 풍경으로 재현되기도 하는데, 이만큼 쉽고, 산뜻하며, 명쾌한 현대미술은 드물다. 단순히 그래서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특정 의미의 기호로 연결하는 인간 공통의 본능 혹은 기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오피의 컬렉션.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오피의 컬렉션.

오피의 작업이 ‘21세기적 초상화’ 혹은 ‘동시대의 풍경화’로 불리는 건 보편의 방식으로 ‘다르게 보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피는 각국의 거리에 카메라를 세팅한 채로 사람들을 촬영했고, 그때마다 각각 아름답고 매력 있는 “인류의 바다”를 경험했다. 2009년 서울스퀘어에 내걸린 대형 LED 작품  〈군중(Crowd)〉이 서울 시민들의 표정을 찾아주는 작업으로 회자된 건 익명성이 곧 정체성을 부여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을뿐더러 모두가 주인공이고자 하는 현대의 미덕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개별성과 보편성이 절묘하게 혼재된 작품은, 주제의식에 앞서 작업의 시작과 끝에 내재한 특유의 논리에서 기인한다. 그의 예술은 ‘누구나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림으로 된 언어체계’인 픽토그램을 적극 차용하며, 더욱 이해가능한 예술로 거듭난다. “내 그림은 나의 뇌가 세상을 입체적으로 보는 방식이며, 두뇌와 눈과 기억에 얽힌 프로세스는 예술가가 개입할 수 있는 최고의 분야”라고 하지만, 이런 메커니즘은 사실 예술가의 특권이 아니다. 그를 앤디 워홀과 비교하는 것보다 차라리 ‘당대의 민주적인 미술가’로 인정하는 편이 더 타당한 이유다.

 
〈City 1.〉, 2021, Powder coated aluminium, 428x163x178cm.

〈City 1.〉, 2021, Powder coated aluminium, 428x163x178cm.

오피의 독자적인 시스템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무한증식되거나 변주될 수 있는데, 이런 특징은 특히 재료 및 기술의 활용법을 통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같은 인물이라도, 중세 조각을 재해석한 듯 두상을 모자이크 타일로 표현한 초상화, 페인팅 초상화, 라이트 박스에 그린 초상화, 대리석으로 만든 초상화, 플라스틱 조각으로 만든 초상화, 눈만 깜빡이는 식의 영상이 결합한 초상화, 부조 형식의 초상화, 이목구비가 아예 생략된 픽토그램 초상화, (언젠가 작업하고 싶다던) 공항 전광판 스타일의 초상화 등 실로 다양하게 표현한다. 재료와 기술, 소재와 주제를 결합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얼마든지 도출할 수 있고, 따라서 오피의 작업세계는 한계가 없다. “재료를 결합, 가공하는 방식이 재료나 주제 자체만큼 중요하다는 점에서 나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요리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그는 평범한 언어(소재, 기술)를 사용하면서도, 이런 대중의 언어를 개인적으로, 시적인 의미로 바꾸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Deer 1.〉, 2020, Aluminium, nylon and lights, 128x140x9cm.

〈Deer 1.〉, 2020, Aluminium, nylon and lights, 128x140x9cm.

“이미지를 수집하는 과정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과 재료를 수집합니다. 재료로 쓸 만한 것이 눈에 띌 때가 있어요. 특정 재료가 가진 잠재력이 우연히 발견되는 거죠. 요긴하게, 멋지게 쓰일 것 같은 재료들 말이에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고속도로 중앙분리대, 공항의 라이트 박스 표지판, 런던 주택가에서 볼 수 있는 주철 난간, 거리에 널린 LED 광고…. 재료들을 작품을 완성하는 실용적인 해결책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이런 재료와 기술이 작품의 다른 요소와 접목될 때의 대조를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워요. 고대 그리스 신전 지붕 아래 역동적인 포즈를 취한 인물 장식이 넥스트 백화점 혹은 샤넬의 화려한 현대식 라이트 박스와 만들어내는 대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세상의 가장 보편적인 대상을 고유한 미술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을 찾는 미술가의 활약은 ‘오피이즘’이라는 단어를 양산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 기발한 신조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는데, 오는 10월 7일부터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오피이즘’의 정체를 만나는 좋은 기회다. 작가의 말을 빌려 단서를 찾는다면, “온전히 나의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움직임, 모두가 접근가능한 무엇” 정도일 것이다. 특히 이번이 이전 전시들과 다르리라 기대하는 건, 잘 알려진 걷는 사람들이나 초상 같은 인물 작업은 물론 동물과 건축물을 형상화한 작업도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시란 영화나 책보다는 각각의 고유한 트랙이 모여 그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는 콘셉트 앨범에 더 가깝다고 했다.
 
예를 들어 소에 대한 나의 물리적 반응은 고양이에 대한 그것과 다르고, 이런 반응의 차이는 내가 이미지로서 구현한 작품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한편 인물 표현은 더 특이해요. 인간은 훨씬 ‘해석’하기 쉽고, 그만큼 더 ‘위험한’ 존재이니까. 나는 작업할 때 구체적 결과물을 상상하기보다는 시행착오를 거쳐 내 몸의 반응을 살피며 본능에 따르는 편입니다.
 
 〈Nighttime 1.〉, 2021, Continuous computer animation on LED screen, 175x200cm.

〈Nighttime 1.〉, 2021, Continuous computer animation on LED screen, 175x200cm.

“사실 동물과 건축물 작업은 초창기부터 꾸준히 해왔어요. 하지만 무엇인가가 내게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고 느껴질 때가 있죠. 몇 년에 걸쳐 속삭여왔던 것일 수도 있고요. 나는 이런 부름에 반응하기 위해, 그간 공부해온 소재와 기술을 사용해서 대상의 형태, 이미지, 색상, 크기 등 다양한 요소를 재해석합니다. 이번에 초심으로 돌아가 동물을 작업한 것도 그 일환이에요. 동물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상이지만, 색은 본래의 것 대신 도로 표지판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친근한 대상인 동물이 상징적 언어와 부호로 나타난다는 걸 연관 짓고자 했죠. 그래서 동물 작품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표지판, 광고, 로고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들이 내게 이구동성으로 부자연스러운 색을 원한다고 말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요.”

 
전 세계 곳곳에서 전시를 선보여온 오피는 매번 해당 지역의 특정 요소를 포함해왔다. 유명한 신사동과 사당동을 걷는 사람들도 그렇게 탄생했다. 이번에는 인천의 모 건물을 모티프로 한 강철 소재의 작업을 포함해 런던 스튜디오 주변의 건물까지, 건축 조각 여러 점을 선보인다. 팬데믹은 작가의 작업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현지 사전조사로 소재를 미리 탐색하는 건 중요한 과정이지만, 이번에는 궁여지책으로 구글맵의 3D 뷰 기능을 통해 한국 거리를 무작정 배회해야 했다. 흥미로운 건, 이런 방식으로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심지어 편리하게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느 방문객처럼 한국의 풍경에 감탄하던 기억도 큰 몫을 했다. “시내부터 교외까지 늘어선 서로 닮은 고층의 아파트 건물, 빌딩 측면에 적힌 큰 숫자들…. 감사하게도 지난 몇 년간 서울, 수원, 인천 등에서 전시할 기회가 있었고, 이 멋지고 역사적인 일대를 더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건물들이 경계가 분명한 섬세한 디테일로 구성되어 있어 선으로 추상적인 형태를 구현할 수 있었어요.” 특히 오피는 이것이 솔 르윗, 요제프 알베르스 등 평소 좋아하는 미술가로부터 얻은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Two Bags fur Hood.〉, 2021, Auto paint on aluminium, 202.1x80.7x3cm.

〈Two Bags fur Hood.〉, 2021, Auto paint on aluminium, 202.1x80.7x3cm.

“유서 깊은 마을 혹은 어드벤처 게임 속 공간을 탐색하듯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광경을 상상했다”는 작가의 말에 방점을 찍는다면, 이번 전시는 꽤 대담한 시도가 될 것이다. “벌집 안 꿀벌처럼 빽빽한 도시에 사는 내게 건물로 작업하는 건 자연스럽다”는 오피는 매 전시 기획의 출발점 역시 공간으로 삼는다. “주어진 공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관객이 흥미롭게 작품을 경험하도록 조율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관객들이 작품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도록, 호기심과 놀라움을 선사하고 싶어요.” 특히 이번에는 3D 가상공간에 작품을 배치하고, VR 고글을 쓴 채 가상의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동선을 더 섬세하게 기획, 구성했다. 세상을 관찰하고, 탐색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움직임’에 대한 그의 열정은 종종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을 능가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미지의 움직임은 물론 작품 사이를 오가는 관객들의 움직임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현재 오피 자신도 변화의 움직임 한가운데 있다. “이번 서울 전시를 준비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각기 다른 재료, 각기 다른 구성의 걷는 사람들 시리즈.

각기 다른 재료, 각기 다른 구성의 걷는 사람들 시리즈.

그럼에도 줄리언 오피가 끝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게 있다면 규칙과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세속적이고 약삭빠른 사람이 못 되어서, 사회적 룰에 따르기보다는 각각의 작품들이 나를 알아서 이끌도록 내버려둡니다. 시행착오 혹은 시간 낭비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해야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이 열릴 거라 믿어요.” 오피는 관찰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작품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수단과 능력을 가진 예술가다. 그가 여전히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어 마냥 자랑스럽고, 계속 보고싶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 있는” 성공한 예술가로 살게 된다면, 먼 훗날 미술사에 이렇게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대상에 편견을 갖지 않고, 엄격하고 정직한 태도로 자신과 주변 세계를 바라보던 예술가. 예술의 가장 보편적인 속성을 연구하면서도 스스로를 지루하지 않게 해줄, 가장 흥미진진한 길을 선택하려 노력한 예술가.” 이는 끊임없이 ‘오늘’을 발견하며 사는 오피가 고백한 예술적 야심이기도 하다.  
 
※ 〈줄리언 오피〉 전은 10월 7일부터 11월 28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Keyword

Credit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 에디터/ 손안나
  • 사진/ Rama Lee(작업실 촬영)/국제갤러리/줄리언 오피(작품 이미지 제공)
  • 웹디자이너/ 민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