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줄리언 오피가 그린 사당동 사람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줄리언 오피를 스타로 만든 ‘걷는 사람들’ 작품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위한 희망의 청사진으로 기억될 것이다.

BYBAZAAR2021.02.04
 

걷는 사람들 

줄리언 오피(b, 1958), 〈Walking in Sadang-dong in the Rain.〉, 2014, Vinyl on Wooden Stretcher, 230x344.3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줄리언 오피(b, 1958), 〈Walking in Sadang-dong in the Rain.〉, 2014, Vinyl on Wooden Stretcher, 230x344.3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걷고 싶다. 인파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걸어본 게 언제였는지 영 기억나지 않는다. 2020년 초였을 거라 짐작해보지만, 혼잡한 장소에서 어떤 무리에 휩쓸려야 하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했을 나의 성향상, 그조차도 정확하진 않다. 하지만 ‘거리두기’가 생존을 담보한 ‘제1의 규율’로 자리 잡은 시대의 한가운데서, 부대끼며 길을 걷는다는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태평한 시절의 기본 조건이자 증거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평범하기 짝이 없던 이 행위가 현대인으로서의 내 존재를 증명했음을 통렬히 자각하며, 순수하게 활개 치던 순간을 그리워하는 중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수필 〈런던 거리 헤매기〉에서 걷기를 두고 “자신의 짐스러운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라 했지만, 만약 작금의 시대를 목격했다면 주옥 같은 문장을 이렇게 고쳐 썼을 것이다.
 
자신의 짐스러운 정체성을 기꺼이 한껏 즐길 수 있는 희귀한 경험.
 
걷기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자유로우며, 혁명적이고, 예술적인 데다 철학적이기까지 한 행위인지를 피력하는 이른바 ‘걷기 예찬론’은 하루 이틀 된 얘기가 아니다. 다만 시대에 따라 걷기에 대한 인식의 정도나 해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게 흥미롭다. 아무리 문화비평가 레베카 솔닛이 “인간은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고 설파했다 한들, 호시절에는 듣기 좋고 인용하기 유용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음을 고백해야겠다. 혹은 괴테나 루소처럼 창작 혹은 사유에 대한 영감을 욕망하는 방식 중 하나였거나, 삶과 걸음이 엇박임을 실감하며 오늘의 속도전을 반성하는 장치 정도였을 것이다. 심지어 “온몸으로 세상을 흡수하며 전진하는 걷기가 곧 문화이자 정치였고, 이를 통해 인류가 진화했다는 건 진리”라 버젓이 쓰면서도, 진짜 의미를 온전히 알지는 못했다.
 
예술가들이 다룬 ‘걷기’를 보다 대승적으로 체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꽤 색다른 경험이다. 이를테면 김수자 작가는 몸을 바늘로, 길을 실로, 땅을 이불보로 상정하고는, 두 발로 걸음으로써 대지에 스민 역사와 기억을 꿰매고, 연결하여, 치유한다는 의미의 작업 〈소잉 인투 워킹〉(1994/1997)을 선보인 적 있다. 프란시스 알리스와 리처드 롱은 광활한 자연에 흔적을 남기며 걷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해미시 풀턴은 관객들로 하여금 테이트모던의 터바인 홀을 그저 천천히 걷게만 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Slowalk〉를 선보인 바 있다. 대대로 예술가들에게 인간의 걷기는 예술의 훌륭한 소재 혹은 주제였고, 예술의 탈물질화와 인간 본성의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문득 지난 2009년 서울스퀘어에 선보인 거대한 LED 작품 〈군중(Crowd)〉을 다시 본다면 과연 어떨까 상상하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다. 텅 빈 도시를 걷는 스크린 속 군중들이 한없이 쓸쓸해 보일까? 아니면 숨죽인 채 몸을 낮춘 이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을까? 당시 영국 현대미술가 줄리언 오피(Julian Opie)의 존재감을 예술에 관심조차 없는 이들에게까지 각인한 이 작품은 일대를 지배해온 대우빌딩의 전근대적 존재감을 말끔히 걷어냈고, 서울 전체에 동시대적인 기운을 선사했다. 이목구비를 생략한 간단명료한 픽토그램으로 표현하여 익명성을 긍정했고, 제목을 ‘군중’으로 정함으로써 서울에 발 붙이고 사는 무명씨들의 존재를 포용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본래 걷는 사람의 존재로 인해 공적 공간으로 변모했는데, 그런 면에서 오피의 이 작업이야말로 ‘우리’의 도시를 ‘우리’ 모두의 것으로 변화시킨 수많은 ‘우리’를 위한 찬사나 다름없었다.
 
걷기에 대한 판타지를 자극함에도 불구하고, 오피는 스스로를 ‘사실주의자’로 칭한다. 이는 얼마나 정교하게 리얼리티를 구현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본질을 존중하는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의 작품을 구동하는 전제는 인간이 (예술작품을 비롯한) 무언가를 눈으로 보고, 세상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메커니즘이다. 어떤 이미지를 특정 의미로 연결하는 인식의 과정, 본다는 건 결국 눈이 아니라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 인간은 관찰하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구조화해 시스템으로 변환한다는 점. 자신이 보는 것과 만드는 것 사이에 위치하는 이 작가는 머릿속 세계로 관객을 초청하고, 세상의 모든 대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술가로 사는 것 같다. 고대 이집트 벽화처럼, 걷는 사람의 이미지는 무엇을 표현하고 생략하느냐의 선택으로 생성한 언어나 상형문자 같은 일종의 기호다. 덕분에 그의 작업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개성 있고, 보편적 관습처럼 자연스럽다. 그에게 ‘본다’는 건 곧 ‘생각하다’ ‘믿다’의 의미이며, 그래서 오피는 난해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은, 직관적인 작업을 추구한다.
 
줄리언 오피의 사실주의자적 면모는 절대 상상력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확고한 명분을 얻는다. “나는 초상화부터 풍경화까지, 조각과 회화 그리고 영상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한 작업을 한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없는 걸 만들어내는 데는 별로 능하지 못하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는 직접적이거나 사적이지 않은 이상한 느낌이 있다. 주관적 판단 없이 객관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하는데, 실제 사람을 그린 그림은 그림자처럼, 정말 거기 있는 듯한 흥미로운 존재감을 가진다. (중략) 언젠가 학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릴 때, 지루해하며 행인들을 보고 있었다. 그 평범한 동작들이 갑자기 무작위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발레처럼 보였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길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의뢰받은 초상화의 제목을 모델이 된 사람의 이름으로 짓고, 풍경화조차 반드시 실재하는 곳으로 그리는 오피는 걷는 사람들 작업조차 실재했던 풍경에 기반한다.
 
지난 2014년 서울 전시에 맞춰, 오피는 사진가를 고용한 후 행인들을 촬영하게끔 했다. 이렇게 비 오는 날 사당동에서 포착했다는 군중의 풍경을 두고는 “이제까지 내가 만든 작품 중 가장 복잡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우산을 펼치면 사람들의 포즈도 변하고, 우산 부피에 작품 크기가 영향받으며, 비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색감과 반사의 정도를 면밀히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피는 이런 식의 도시 관찰 프로젝트를 호주, 인도, 영국, 미국 등 다양한 도시에서 진행해왔는데, 서울 멋쟁이들이 예컨대 사리와 플립플롭으로 대변되는 뭄바이 사람들, 스포츠 반바지와 줄무늬 크롭트 톱을 걸친 멜버른 사람들, 수수하고 뻣뻣한 코트와 큰 숄더백을 든 뉴요커들과는 확연히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디서든 차별화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들을 담은 오피의 작품은 그렇게 ‘현대의 초상화’라 불린다.
 
서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다시 마주하니, 수년 전에 본 그 작품이 맞나 싶다. 걷는 사람의 옆모습이 이런 에너지를 갖고 있구나, 함께 걷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새삼스럽다. 작품 속 이들은 관객을 의식하지도 않고, 부러 포즈를 취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나를 외면하는 듯 도도해 보이고, 위엄이 느껴지기도 한다. 평면적인 앞모습보다 대상의 개성을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옆모습은 걷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며 수단임을 강조하고, 역동적이며 심지어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작품 앞의 나와 작품 속 인물, 그리고 이들을 중재하는 작가의 존재까지, 오묘한 삼각관계가 걷기의 에너지를 배가한다. 유명 예술가의 작업 일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번민과 불안과 실의에 빠져 걷든, 쇼핑과 데이트를 목적으로 걷든, 어쨌든 그 순간, 그곳을 걸으며 오늘을 누린 이들이 부러울 지경이라, 그 심플한 선과 색에 표정을 감춘 얼굴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작품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타인들을 만나면서, 스스로도 이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을 느꼈으면 한다.
 
줄리언 오피가 직접 건넨 바람은, 솔직히 2년 전만 해도 물정 모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특별하려고 안달 난 세상에서, 나의 익명성을 왜 예술로 확인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했다. 나도 그들 같은, 그들도 나 같은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진리이야말로 ‘타인은 곧 지옥(바이러스)’인 시대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태도가 됐다. 언젠가 마음도 몸도 진화한 인간들이 딱 그만큼 진화했을 포스트 코로나의 세상에서 (작품 속 그들처럼) 함께 거리를 걷게 되는 날이 도래할 것이다. 과연 예전처럼 우리가 타인과의 절대적 거리를 재단하거나 강요받지 않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특별한 이슈 없이도, 대단한 걸 도모하지 않더라도, 서로 바라는 것 없이, 같은 순간, 같은 길을 함께 걷게 될 그 풍경을 감히 ‘무위의 연대’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2021년 1월 1일 새벽 1시, 보신각의 종소리도 삼켜버린 이 깊은 밤의 지독한 갈증을 잊지 않아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예술가들의 예지적인 통찰력은 인류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인간다움을 발휘해야 할 때 가장 빛났고, 유감스럽게도 지금이 바로 그때다. 현대미술은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이제서야 나는 줄리언 오피의 ‘걷는 사람들’ 풍경을 2021년 새해 SNS를 도배한 슬로건, ‘일상으로의 복귀’를 향한 희망의 청사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하긴, 빼빼 마른 걷는 인간 조각상을 만든 자코메티의 한마디가 우리의 실존을 독려한다는 사실을 온 마음으로 깨닫는 데도 반세기 넘는 시간이 걸렸지 아마.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걸어야만 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걷는다. 걸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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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안나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 웹디자이너/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