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오한기, 윤고은이 쓴 초단편소설 '호텔에서'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소설가 오한기, 윤고은이 쓴 초단편소설 '호텔에서'

두 명의 소설가가 각자의 뇌리에 깊이 박힌 호텔을 배경으로 낯선 텍스트를 보내왔다.

BAZAAR BY BAZAAR 2021.08.06

AT

THE

HOTEL 

 
 
비브호텔에서의 하룻밤  
 
진진이 단편소설 〈비브호텔에서의 하룻밤〉을 읽었다고 전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그런 소설을 썼었나 가물가물했지만 진진은 꽤 구체적으로 소설 내용을 말했다. 강원도 양양 해안가 절벽에 선 고급 호텔. 순진한 소년 벨보이. 무표정한 외팔이 지배인. 악몽 속의 미로처럼 얽혀 있는 복도와 비상구. 어리숙한 장기 투숙자 비브. 그러던 어느 날, 모종의 이유로 벨보이들은 귀신 흉내를 내며 비브를 골려주기 시작하고 비브는 점점 미쳐간다. 진진이 소설의 주요 포인트를 짚고 있을 때 5년 전 〈하퍼스 바자〉인가 하는 패션지에서 미니 픽션을 청탁했고 〈비브호텔에서의 하룻밤〉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 머릿속에는 근본적인 의문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다. 진진이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말하는 걸 들어보니 동국대 문창과 동기인 것 같은데 말이지. 왜 친하지도 않은데 전화를 해서 기억도 나지 않는 소설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머지않아 진진은 의문을 조금 해소해주었다. 양양에 선친이 물려준 땅이 있는데, 공포 테마파크를 기획하고 있는 참에 우연히 내 소설을 읽었고 소설의 콘셉트를 따와 비브호텔을 짓기 위해 허락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하필 왜 비브호텔을 짓는다는 건지 의심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영화 〈곡성〉의 대성공으로 공포도시로 자리 잡은 곡성의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둥, 속초와 강릉에 밀린 양양의 관광산업을 부흥시킬 예정이라는 둥, 벨보이와 투숙객으로 분한 관광객들이 공포 서바이벌을 체험하며 하룻밤을 묵는 게 비브호텔의 콘텐츠가 될 것이라는 둥, 비브호텔의 캐치프레이즈는 ‘진짜 죽을지도 모릅니다’로 정했다는 둥 허황된 이야기를 해대는 통에 의심은 증폭됐지만, 얼마간의 로열티를 지불한다는 이야기에 허락을 해버렸다. 그 뒤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진진이 말을 이었다. 문창과에서 합평할 때 네 소설 특유의 꿉꿉한 분위기가 싫어서 그렇게 씹었는데, 네 소설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 줄이야. 진진이 소름 돋을 만큼 괴기스럽게 웃었다. 그 뒤 진진이 물었다. 네가 내 소설을 읽은 뒤 당장 문학과 인연을 끊으라며 호통쳤던 것도 기억나지?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네 충고가 도움이 됐어. 소설가가 아니라 사업가가 됐으니. 전화기 너머에서 진진이 중얼거렸다.
글/ 오한기(끈질기고 집요하게 ‘쓰는 일’에 대해 쓴다. 주요 저서로는 〈의인법〉 〈홍학이 된 사나이〉 〈나는 자급자족한다〉 〈인간만세〉 등이 있다.) 
 
반대쪽으로
 
베네치아에 두 번 갔다.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어느 계절에나 산마르코 광장은 분홍빛 케이크처럼 거기 놓여 있다. 종루는 그 위에 단 하나의 촛불처럼 꽂혀 있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순식간에 그 안으로 흡수된다. 기대하지 않았던 속도로 올라온 사람들은 곧 그 도시의 지붕들이 초가을의 낙엽처럼 수북하게 저 아래 깔린 장면을 내려다보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종이 울릴 때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몸짓을 한다. 반사적으로 손을 귓가로 가져가는 것이다. 다소 놀라기는 했어도 모두 즐거운 귀마개를 한 것처럼 보인다. 종루에는 가로등처럼 빛을 내뿜고 서 있는 공중전화 한 대도 있다. 국제전화코드가 깨알같이 적혀 있는 그 전화가 거기 있다.
 
겨울에도 나는 같은 종루에 오른다. 공중전화는 여전히 거기 있다. 없는 것은 당신뿐이다. 밤이 완전히 내려앉기 전에 나는 바포레토를 타고 주데카섬으로 돌아온다. 길 끝에 익숙한 호텔이 서 있다. 여름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 산책이었다면, 겨울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도주에 가깝다. 나는 이제 저 종루에 올라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빠르게 걷는다. 당신이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결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기를 기대했다는 것을 버리고 싶어 건너편의 광장으로부터 달아난다.
 
여름에는 덜 중요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1950년대까지 제분소가 있던 자리에 이 호텔이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겨울이 되면 아주 중요한 복선처럼 떠오른다. 저 웅장한 호텔 안에서 시작된 말들이 가벼운 밀가루처럼 소리 없이 퍼지는 장면이 자꾸 그려지는 걸 그만둘 수 없다. 내 행적도 퍼져나갈까? 나는 이른 아침 아직 호텔의 조식 서비스가 시작되기도 전에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정사각형 호텔의 두 면을 따라 찬찬히 걸으며 취소하고픈 궤적들에 대해 생각한다. 건너편에 여전히 있을 그 종루에 대해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데도 나는 종루 반대편으로 걷는다. 
글/ 윤고은(재기발랄한 상상력과 감미로운 문장력으로 고유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이달 초, 재난 시대의 여행을 소재로 한 〈밤의 여행자들〉로 아시아 작가 최초로 영국의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했다)  


※호텔 사보이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영 악화로 객실 영업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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