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아티스트 백현진의 그림엔 제목이 없다

요즘 텔레비전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이 아저씨는 원래 그림을 그린다. 오후만 있던 수요일, 백현진과 함께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에서 한 블록 떨어진 다른 갤러리 카페테리아에서 맥주를 마셨다. 여러 말이 오갔지만 끝은 다소 허무했고 미량의 조소를 띄운 채였다. “다 헛거죠. 부질없어요”.

BYBAZAAR2021.07.06
 
 
“사람 사는 게 왠지 모르게 쓸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때론 코미디 같기도 하잖아요. 제 작업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음악 때문인지 쓸쓸하다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까는 배꼽 잡고 웃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기분 좋네요”. 그런가. 솔직히 웃기진 않던데. 내 경우엔 오히려 작품 앞에서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따가 인터뷰도 해야 하는데 어떤 말을 준비해야 할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저 아득해지는 느낌. 만사가 귀찮았다. 이대로 퇴근하고 집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었다. 이런 감상을 전하자 백현진은 “너무 땡큐네요.”라고 말했다. 표정은 그다지 ‘땡큐’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쾌해 보인 것도 아니다. 별다른 기색이 없었단 얘기지. 사실 내가 뭐라고 평가하든 그건 평소 그의 표현대로 “내 알 바가 아니다”. 백현진은 이번 전시 «말보다는 Beyond Words»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일체의 텍스트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개인전 때,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을 뵀어요. 할아버지께서 신문을 보셨는데 거기에 제가 ‘보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느끼시라’고 말한 것을 보고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오셨다는 거예요. 그분께 ‘이건 맞고 틀리고가 있는 퀴즈쇼가 아닙니다, 만약에 이 작품이 별로다 싶으면 어르신한테 이 작품은 그런 겁니다.’ 말씀드렸죠. 마음대로 보라고 하면 일반 관객들은 기꺼이 재미있는 거리를 찾아내요. 오히려 이 필드에 있는 사람들이 ‘흐음…’ 하면서 팔짱을 끼죠. 그 사람들은 보기 전에 먼저 읽거든요. 그런 다음 작가한테 설명을 달라고 하죠.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림을 그린 건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을….”
 
아니, 영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진짜로 영원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보고 듣는 거, 굉장히 중요하지.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보고 듣는 걸 좋아하니. (피식대며) 먹는 것도 물론 좋아하지. 근데 어쨌든, 보이고 들리는 게 성에 안 차니까, 내가 직접 만들어서 보고 듣고 하는 거지. 아니지 아니지, 내가 왜 언어를 부정하겠니? 언어를 다루는 사람인데. 그거랑 별개로… 영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카메라 쪽을 바라보며) 너는 알아듣지?  (다시 이제껏 말하던 방향을 향해서) 응…. 너는 잘 이해가 안 가? 음… 내가 언어로 설명을 해줄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이게 말로 하기엔 진짜 너무….
- «말보다는»전을 위한 가상의 대본 〈사람이 많이 다녀 막다른 골목이라 미처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췌한 대사.
 
Bek Hyunjin, 〈생분해 가능한 것 21-04 Biodegradable Thing 21-04〉, 2021, Natural paint on biodegradable papers, 119x89cm (framed),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Bek Hyunjin, 〈생분해 가능한 것 21-04 Biodegradable Thing 21-04〉, 2021, Natural paint on biodegradable papers, 119x89cm (framed),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백현진이 그린 건 동그라미, 세모, 네모 같은 것들. 일그러진 도형이 담긴 추상화가 대부분이다. 백현진은 ‘걔네’ 그러니까 그 도형들이 아무것도 내포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작품에 ‘제목’이 아닌 ‘별명’을 붙였다. “술 많이 마시는 친구를 ‘술돼지’라고 부른다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 ‘술돼지’로 규정되는 건 아니잖아요. 제목은 그냥 가벼운 태깅인 거죠. 현대미술에서 ‘Untitled’라는 제목이 많지만 저는 그게 또 하나의 발언처럼 느껴져요. 타성에 젖은 습관 같기도 하고요. 그걸 피해가려는 거예요. 지난 전시에서 어떤 작업의 제목이 ‘여기에 있는 제목은 모두 없어도 좋다’였는데, 사실 제목에 관련해서는 그게 딱 저의 마음이에요”. 말라 비틀어진 화초를 전시장 한가운데에 두고 ‘씨발’이라 이름 붙였고 전시와 무관한 듯 한구석에 놓인 페페 화분엔 ‘품위’라는 별명을 지었다. 대체 품위가 어디에 있는 거냐고 따져 묻자 그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품위를 잃지 말아야죠.’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품위 있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든요. 꼴값들 떤다 싶죠. 제가 생각하는 품위가 저 정도인 것 같아요. 진심이에요.”
 
〈생분해 가능한 것〉 시리즈는 그가 이번에 새롭게 시도한 작업이다. 유화가 ‘영속성’에 대한 과거 유럽 귀족들의 욕망과 맞물려 유행했다면 이번 작업은 그 대척점에 있다. 사라지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물감부터 스트럭처, 하물며 프레임을 접착하는 본드까지 세계 각지에서 생분해되는 재료들을 공수해 작업했다. “대역병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아무리 내가 재미있다고 해서 이런 물체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도 괜찮은 건가 싶더라고요. 이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뱃속이 편해졌어요. 다만 재료값이 좀 비싸죠. 자연으로 완전히 돌아가게 하는 물체를 만들려고 하다 보니 비용이 올라가더라고요.” 어느 쿨한 컬렉터가 이 시리즈를 구매하면 어떨까. 거실에 걸어두고 좀 보다가 그대로 버려서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내버려둔다면.
 
〈생분해 가능한 것〉 연작이 전시된 PKM 갤러리 별관 1층 전경.

〈생분해 가능한 것〉 연작이 전시된 PKM 갤러리 별관 1층 전경.

 
Bek Hyunjin, 〈생분해 가능한 것 21-03 Biodegradable Thing 21-03〉, 2021, Natural paint on biodegradable canvas, 141x251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Bek Hyunjin, 〈생분해 가능한 것 21-03 Biodegradable Thing 21-03〉, 2021, Natural paint on biodegradable canvas, 141x251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수명을 다한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지하실 같은 별관 지층에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테이블〉을 백현진식으로 재해석한 듯 보이는 〈디자인〉 그리고 〈당신 곁의 원〉이 전시되어 있다. 수많은 블랙으로 점철된 〈당신 곁의 원〉을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이없게도 하트 모양의 질감이 눈에 들어온다. “2016년에 한 번 그렸어요. 그때 누구랑 연애할 땐데, 하트도 그리고 제 식의 이모티콘을 만든 거죠. 이번 전시를 앞두고 그 안을 검게 칠했어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작품을 설치하고 보니 빛과 레이어 때문에 그 하트가 보이더라고요. 평면 작업이라는 게 사실 말이 ‘플랫’이지, 붓질이나 두께 때문에 굴곡이 생기잖아요. 재미있어요. 사람들한테 ‘계속 보면 헛게 보일 거야.’라고 말하고 다녔죠”.
 
 
〈대환영〉은 포장조차 제대로 뜯지 않은 액자로, 일종의 설치작품이다. 그 안에는 사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 오태영 상무의 느끼한 포트레이트가 들어 있다. “극 중 인물이 대단한 나르시시스트이다 보니 자기 사진을 그렇게 걸어놓았던 거죠. 제 친구들이 그 사진을 보고 깔깔댔어요. 재수없다고요. 특히 김오키가 너무 웃기다며 저한테 그사진을 달라더군요. 이종필 감독에게 농담 삼아 그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 여름날, 정말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걸 들고 제 작업실로 온 거예요. 갤러리에 이 작품은 팔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오키와 얘기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번 전시가 끝나면 저 작품을 당근마켓에 내놓을 거예요”. 백현진은 당근마켓에서 이 작품의 시세를 약 2만3천원으로 예상했다. 그러면 두 사람이 1만1천5백원씩 나눠 갖는 건가. 왜냐하면 그가 말하길, 현대미술은 무조건 5:5란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가 특별히 제작한 음악들도 있다. 라이브 공연은 7월 2일 선보인다. 그보다 앞서 6월 19일에는 퍼포먼스도 예정되어 있다. 날짜는 다가오는데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누워 있다가 엊그제 아침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작품명은 〈요구〉. 백현진이 (아마도 누워서) 휴대폰에 적어놓은 ‘메뉴판’을 보여주었다. 대사와 지문이 빼곡하다. 이를테면 8. 고생했네(상대에게 천원을 건넨다) 10. 미친년/놈 (상대의 뺨을 톡톡 친다). 일종의 P2P 퍼포먼스다. “저는 갤러리 잔디 한가운데에 서 있어요. 조금 혼란스러운 분위기였으면 좋겠네요. 사람들이 다가와서 메뉴를 고르죠. 영화 작업할 때도 제가 테이크마다 연기를 다르게 해서 감독들이 미치려고 하거든요. ‘고생했다’라는 대사도 상대방에 따라 달라질 테죠. ‘고생했다’일 수도 있고, ‘고생했다!’ 일 수도 있고, ‘고생했다…’일 수도 있고. 특이한 사람들은 미친년/놈을 고르겠죠. 이 대사의 지문이 ‘상대의 뺨을 톡톡 친다’ 이거든요. 사람에 따라 등짝을 ‘퍽퍽’ 때릴 수도 있는 거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모마에서 했던 퍼포먼스(〈The Artist is Present〉) 알죠? 거기서 옛 남자친구를 만난 게 짜고 치는 고스톱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 생각이 나더군요. 그에 대한 강북식 화답이랄까요?”.
 
Bek Hyunjin, 〈디자인 Design〉, 2016/2021, Oil, enamel spray on linen, 160x160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Bek Hyunjin, 〈디자인 Design〉, 2016/2021, Oil, enamel spray on linen, 160x160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Bek Hyunjin, 〈아직 삶 20-01 Stilllife 20-01〉, 2020, Oil on linen, 216x215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Bek Hyunjin, 〈아직 삶 20-01 Stilllife 20-01〉, 2020, Oil on linen, 216x215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Bek Hyunjin, 〈멋진 뒷골목 Back-Alley Beauty〉, 2020-2021, Oil, enamel spray paint on canvas, 160x160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Bek Hyunjin, 〈멋진 뒷골목 Back-Alley Beauty〉, 2020-2021, Oil, enamel spray paint on canvas, 160x160cm,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요구 Demand
 
- 사랑해 (그리고, 상대를 덥석 안는다)
- 웃기시네 (그리고, 피식 웃으며 상대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 괜찮을 거야 (그리고, 상대의 어깨를 토닥인다)
- 모르겠다 (그리고, 상대와 손을 잡고 함께 바닥에 누워 하늘/천장을 본다)
- 미안해 (그리고, 상대에게 절을 한다)
- 고생했네 (그리고, 상대에게 천원을 건넨다)
- 글쎄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상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 미친놈/년 (그리고, 상대의 뺨을 톡톡 친다)
- 고마워 (그리고, 상대의 두 손을 꼭 잡는다)
- 쉿! (그리고, 상대에게 귓속말 한다)
- 랜덤
- «말보다는»전을 위한 가상의 대본 〈사람이 많이 다녀 막다른 골목이라 미처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췌한 지문이 포함된 10개의 대사. 



※ 백현진 개인전 «말보다는»은 PKM 갤러리에서 7월 3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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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안나
  • 사진/ 윤송이(인물),PKM 갤러리
  • 웹디자이너/ 한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