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편집자 강인선은 종이책의 힘을 믿는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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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편집자 강인선은 종이책의 힘을 믿는다

이 만화들을 보고 자랐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세대다. “나는 나의 삶을 나의 욕망대로 이끌어갈 것이다”. 그 시절 여성 서사를 꿰뚫는 한 줄의 로그라인이 지금도 당신을 북돋우고 있지는 않은지.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BAZAAR BY BAZAAR 2021.03.03
 

순정만화처럼

 
만화 편집자 강인선
〈보물섬〉 기자로 시작해서 〈댕기〉 〈아이큐 점프〉 〈윙크〉 〈밍크〉 〈나인〉의 편집장을 거쳐서 현재는 만화전문출판사 거북이북스를 운영하고 계신데요. 30년이 넘도록 만화 편집자로 일해오신 거네요.
제가 작가들 중에 특히 신일숙 작가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아르미안의 네 딸들〉로 대본소 시대를 열었고, 〈리니지〉로 잡지 시대를 관통하고, 이제는 〈카야〉로 웹툰 시대까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작가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은 아니지만 편집자로서 잡지 시대, 웹툰 시대, 그리고 만화 살롱이라는 오프라인 공간까지 나름대로 모든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선 자부심을 느껴요.
1997년 11월 1일호 순정 만화잡지 〈윙크〉. 표지 모델은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의 주인공인 송명자.

1997년 11월 1일호 순정 만화잡지 〈윙크〉. 표지 모델은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의 주인공인 송명자.

무엇보다 1990년대 만화계는 잡지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당시 〈윙크〉나 〈밍크〉 같은 순정만화 잡지를 봤던 세대라면 ‘편집장 강인선’을 모를 수가 없죠.
〈윙크〉는 하이틴 만화, 〈밍크〉는 어린이 만화, 〈나인〉은 성인 여성들을 위한 만화지였어요. 잡지마다 콘셉트를 다르게 창간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죠. 창간호를 계속 찍어 내기도 했고. 〈나인〉의 경우 패션 잡지 같은 판형과 패셔너블한 레이아웃으로 만화왕국 일본에서도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만화 잡지가 나올 수 있느냐”고 놀라움을 사기도 했죠.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본 것 같아요. 만화 잡지 시대는 제 인생에서도 화양연화 같은 시절이었어요. 지금은 웹하드로 데이터가 오고 가지만, 그때는 종이로 원고가 들어오고 나갈 때라서 문하생이 원고를 가지고 오다가 잃어버리는 사고부터 시작해서 별난 에피소드도 많았죠. 하지만 책이라는 물성 때문에 편집장의 색깔이 더 진하게 묻어났고 매호 잡지가 나오면 느끼는 보람도 컸어요.
작가들의 마감 후기 코너에 전신 타이츠를 입은 편집장이 원고를 닦달하는 그림이 아직도 기억나요.
박무직 작가가 ‘안드로이드 강’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죠. 김진태 작가가 만들어준 ‘전신 타이츠 강’이라는 캐릭터도 있었고. 작가들이 자기 만화에 종종 제 캐릭터를 끼워놓곤 했어요. 작가들 나름의 복수 같은 거였죠.(웃음)
잡지마다 독자들의 충성도도 대단했고요.
편집자는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사람이잖아요. 만화가-독자-편집자의 삼각편대였죠. 만화 잡지를 안본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우리만의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죠. 편집자들도 각자 팬덤이 있었어요. 〈윙크〉의 작가들을 데리고 사인회를 개최하면 편집자에게 사인받겠다고 길게 줄을 서기도 했어요.(웃음) 폐간 소식이라도 있으면 ‘이 잡지 살려야 한다’며 자발적인 운동이 벌어지고. 이제 만화 잡지 시대는 거의 지나갔고 온라인 플랫폼이 잡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잖아요. 인터넷만 열면 웹툰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독자들도 그때처럼 특정 플랫폼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지는 않죠.
〈윙크〉는 당시에 신인 발굴의 등용문이었죠.
박희정 작가나 천계영 작가도 〈윙크〉로 데뷔했어요. 동인지에서 괜찮은 인물이 보이면 과감하게 페이지를 줬죠. 남다른 작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촉이 오더라고요. 마치 요즘 네이버웹툰에서 신인 공모전을 여는 것처럼 잡지가 그 역할을 했던 거죠.
〈윙크〉 창간을 기점으로 본다면 그동안 순정만화의 트렌드는 어떻게 바뀌었다고 보세요?
잡지는 잡스러워야 하니까. 늘 장르별 최고를 모으려고 노력했죠. 학원물은 이은혜, SF는 강경옥, 판타지는 신일숙, 그리고 신인 작가들로 그룹을 만들었어요. 트렌드를 따르기보다 당시 작가들은 모두 자기 개성대로 작업했던 것 같아요. 학원물이 유행한다고 해서 신일숙 작가가 학원물 그리지는 않잖아요?(웃음) 다만 박희정 작가가 큰 영향을 끼치긴 했죠. 지금은 유명한 다른 작가들도 박희정 작가의 만화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때의 순정만화가들은 지금보다 작가주의 성향이 짙었던 것 같아요. 원화 작업 방식도 그렇고 만화가 ‘제9의 예술’로 여겨졌던 시대니까요.
유시진 작가가 대표적이었죠. 요즘의 작업 방식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때는 손으로, 펜으로 하나하나 다 그려내는 맛이 있었죠. 그런 걸 책으로라도 계속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핸드메이드의 향수와 미학을요.
지금도 웹툰이 인기를 끌면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게 수순이잖아요. 만화책의 물성은 다른 어떤 걸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이 아무리 디지털화된다고 해도 책은 여전히 존재할 것 같아요. 내 손 안에서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것과 디지털로 스크롤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감각이잖아요. 종이가 주는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에 걸맞은 변화를 같이 해나가는 게 중요하겠죠. 예를 들어 우리 회사에서 나온 〈꼬마 흡혈귀〉라는 독일 동화책이 있어요. 30년 전에 꽤 인기가 있었는데, 그때의 독자들이 지금은 부모가 됐겠죠. 모 출판사에서 이 동화를 독일 오리지널 원화를 삽입해 재출판했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옛날 독자 입장에선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그림체와 원화가 너무 다르니까 추억을 망치는 느낌을 받았던 거예요. 30권짜리가 5권만 출판하고 결국 중단되었죠. 그래서 우리 출판사가 다시 가져왔어요. 배낭자 작가가 만화처럼 귀여운 그림체로 다시 작업했는데 출판사로 문의전화가 쇄도할 정도로 반응이 좋아요. 자기가 어릴 때 재미있게 읽었던 동화책을 대를 이어서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추억과 경험은 결국 종이책에 녹아드는 거죠.
이 시대에 만화를 출판하는 일에는 분명 사명감도 필요할 거라고 봐요.
전 여전히 이야기와 이미지가 함께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죠. 비주얼 시대이기도 하고요. 최호철 작가의 〈을지로 순환선〉을 보면 그런 말이 나와요. “한 장의 그림에는 거대한 서사가 담겨 있다.” 저는 이 한마디가 모든 걸 설명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한 장의 순정만화에는 거대한 여성 서사가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 당시 순정만화가 여성들에게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삭막한 현실에서의 해방구 역할이었죠. 인터넷도 없었을 시절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었나 싶어요. 만화를 읽는 순간만큼은 세상의 힘든 일은 다 잊어버리고 이야기에 빠져서 환상 여행을 떠날 수 있었죠.
대표님이 만든 만화 잡지를 보고 자란 지금의 30~40 여성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저는 여전히 순정만화를 즐긴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감수성이 있다고 믿어요. 그건 신이 준 선물 같은 거죠. 사는 게 팍팍할지라도 그때의 감수성을 잃지 않고 유영하듯 살았으면 좋겠어요. 예쁜 것을 예쁘다고 느끼고, 재미있는 것을 재미있다고 느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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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손안나
    글/ 홍난지(만화연구가,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웹디자이너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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