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혜규는 이번 개인전의 일환으로 의류 브랜드인 커스텀멜로우, 주얼리 브랜드인 포트레이트 리포트와 함께 작업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양혜규가 입은 코트는 양혜규x커스텀멜로우 ‘소리 나는 가물’ 발마칸 코트.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 O₂ & H₂o≫의 전경 중 〈오행비행〉. 그래픽 콜라주로 풍자한 한국의 풍경 아래 매달린 종이 술은 무구(巫具)의 일종으로, 요즘 작가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티프다.
선집 〈공기와 물〉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의 주인공인 양혜규의 개인전 «O2 & H2O»에 맞춰 출간되었다. 그때나 지금에나 전 세계 미술계 곳곳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수행 중인 큐레이터, 비평가, 학자, 미술가, 전문기자 등의 비평과 대담, 무려 36개에 이르는 길고 짧은 글이 그 골자다. 이들은 대담, 에세이, 작가론, 기사 등 고유한 형식과 논조로 양혜규라는 작가를 해석 및 재해석하여 현대미술사에 첨예한 흔적을 남겼고, 양혜규는 이 형형한 존재들을 이번 기회를 빌어 일일이 호명한다. 요헨 폴츠, 아냐 카서, 이자벨 포데슈바, 다니엘 비른바움, 찰스 에셔, 에밀리 페식, 김현진, 김장언, 라르스 방 라르센, 주은지, 맥스 앤드류스, 바르트 판데어하이데, 나브 하크, 지미 더햄, 마르크 벨첼, 마리나 비슈미트, 정도련, 야스밀 레이먼드, 앤 M. 와그너, 파트리샤 팔기에르, 캐시 노블, 우테 메타 바우어, T.J. 데모스, 레이레 베르가라, H.G. 매스터스, 김성원, 니콜라 부리오, 레이얀 타벳, 수잰 코터, 케이티 폴런, 톰 맥도너, 추스 마르티네스, 일마즈 지비오르, 린 쿡…. 미술계 중심에 있지 않은 이상 난수표로 읽힐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름은 양혜규 작업인생의 ‘결정적 순간의 제공자’ 혹은 ‘가장 충실한 지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래 만나오며 파악한 바, 양혜규는 인터뷰의 상당 부분을 동료들과의 인연을 설명하는 데 할애한다. 모든 전시는 양혜규의 ‘관계의 미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습성을 파악하고 보니, 그녀의 삶이야말로 작품과 전시를 관통하는 리듬, 그 리듬에 박력을 더하는 관계, 이 관계들을 지속시키는 숱한 예술적 사건으로 이뤄져 있음을 자연스레 납득하게 되었다. 양혜규의 첫 번째 도록인 〈별색〉(2001)에 (무보수로) 수록한 요헨 폴츠의 글로 시작해 오랜 동료인 M+의 부관장 정도련이 7년 만에 한 번씩 업데이트한 ‘양혜규 소사전’으로 끝나는, 2001년부터 2020년까지 생산된 글의 연대기적 구성은 각 시기 양혜규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기술한다. 게다가 각 글의 도입부에 이들의 현재 일과 위치는 물론 어떤 연유로 만나 무엇을 함께 했고 마침내 글을 의뢰하게 되었는지 일련의 상황을 명쾌하게 작가가 직접 서술해두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인연풀이’가 꽤 흥미진진하다. 그러므로 〈공기와 물〉은 비평집일 뿐 아니라 ‘관계 미학서’이며, 이 필자들이 주인공인 전기인 동시에 그/그녀와 공적/사적 역사를 일군 양혜규의 전기다.
“글도, 당시 상황도 생각보다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인물들의 습성, 성정, 해왔던 일, 관심사, 일화 같은 것들을 잘 알다 보니 영화처럼 펼쳐지더군요. 제가 이런 표현에 좀 서툰 편인데, 너무 고마웠어요. 어쩜 다들 이렇게나 생각을 기울이고 글을 공들여 써주었을까 싶어요. 미술계란 이런 자비로운 행위들이 만드는 거구나 하며 새삼 북받치더라고요. 모두에게 메일을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웃음) 게다가 글을 쓴다는 건,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논리에 맞지 않는 비전형적인 노동이잖아요. 출판이 그 노력을 다 상쇄할 수도 없고요. 이 책을 통해서 미술계에서 이뤄지는 글쓰기를 더욱 값지게 다루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의 존재와 행위에 영광을 표하고 싶었어요.”
전시 «O2 & H2O»의 초입에 걸린 거대한 블라인드 작품 〈침묵의 수장고‐클릭된 속심〉을 2017년 베를린 킨들 현대미술관에서 본 적 있다. 양조장을 개조한 이곳에서 산업사회와 포스트 산업사회의 공존과 반목을 은유하던 예의 작품은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 이제 조선의 궁을 배경으로 품고 있다. 자기 작업이 새로운 환경에 놓이도록 독려하는 게 예술가의 몫이라던 양혜규의 말처럼, 필자들의 글은 양혜규라는 존재가 미술사의 새로운 맥락에서 회자될 수 있도록 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는 프로페셔널조차 감회에 젖어들게끔 한 예술적 우정의 발현. 그녀에게 물었다. “양혜규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일을 함께 해야 하나요?” 아주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답했다. “그런 것 같아요. 일을 함께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심정적으로, 실질적으로 돕거나.(웃음)”

〈중간유형〉 시리즈와 〈소리 나는 조각〉군이 모인 전시실은 작가는 물론 보는 이의 감각과 직관, 상상력의 기운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방금 양혜규가 말한, 과거에 박제되지 않은 글의 ‘생생함’은 다름 아닌 작가의 작업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어떤 작품은 반짝 등장했지만 결국 다른 작업의 토양으로 발전했기에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또 어떤 작업은 여전히 변주를 거듭하며 오늘에까지 살아 있다. 나는 어떤 미술가가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것보다, 일리 있는 논리로 다음의 작품들을 만드는 것이 수백 배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임을 실감하곤 한다. 양혜규야말로 자기 작업의 존재 이유를 치밀하게 이론화하고, 구작과 신작 사이의 밀도를 조율하고, 이로써 과감히 이전 작업으로 돌아오거나 자기 논리를 과감히 전복하여 스스로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데 열심인 데다 이런 재창조에 능하기까지 한 작가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공기와 물〉이 언급하는 양혜규의 모든 작품은, 누군가의 기억에 있든 없든, 곧 ‘양혜규식 생명력’의 방증이다.
가깝고도 강력한 예가 바로 이번 전시 자체인데, ‘O2 & H2O’라는 제목은 양혜규의 과거에서 기인한다. 2000년대 초반 그녀는 주유소에서 타이어에 공기를 주입하고 워셔액을 채워 넣는다는 의미의 안내판 ‘공기와 물’을 발견한다. 요소 (공기와 물)는 그대로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 놓여 맥락과 의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에 착안한 작가는 지난 2002년 일견 형태는 비슷하나 궁극적으로는 다른 선반 두 개로 〈공기와 물〉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동명의 제목으로 전시를 꾸린 바 있다. 이번 선집에서도 아냐 카서와 이자벨 포데슈바의 글을 통해 해당 작업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짧은 글이 20년 후 ‘공기와 물’을 화학식 ‘O2 & H2O’로 바꿈으로써 같은 물질을 지칭하는 다양한 방식과 체계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은유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에 명분과 신뢰를 더한다.
양혜규만의 자기 확장성을 고스란히 기록한 이 선집은, 그러므로 ‘양혜규 세계’의 지형 및 변화의 증언서이기도 하다. 2001년부터 초창기 몇 년간 쓰인 글은 당시 작가가 골몰한 일상, 레디메이드적 오브제, 언어의 틈, 그리고 문화 번역가로서의 면모에 주목한다. “스스로를 가둔다 싶을 정도로” 명징했던 ‘세계화 세대’의 프레임은 이후 서서히 옅어진다. 양혜규가 요즘도 2006년이 변곡점이었다고 공공연히 되짚는 까닭은 한국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 때문만이 아니라 작가의 관심은 물론 그녀를 논하는 시선 모두가 감각, 공동체 등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후 대략 2008년부터는 블라인드 작업을 필두로 양혜규의 작업이 작품 자체로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다. 작가가 인정한 바대로 “이들의 글은 항상 작업보다 한 발 먼저 나아갔”는데, 특히 니콜라 부리오 같은 불세출의 필자는 해당 시대의 특성 안에서 양혜규의 작업을 정확하게 지표화해 자유자재로 줌인, 줌아웃 하며 작업 안팎의 논의를 입체적으로 엮어낸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제목은 ‘공기와 물’로 확정되기 전까지 ‘가름과 묶음’이었다. 이 글들의 현재성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끊임없이 가르고 묶는 습성에서 비롯된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생성하는 멜랑콜리〉(2009) 〈셋을 위한 목소리〉(2010) 등 양혜규의 이전 책들을 출간했던 출판사 현실문화연구(대표 김수기)가 이번 선집 〈공기와 물〉도 펴냈다.
주 전시장인 5전시실 옆 통로에는 신작 〈오행비행〉이 현수막 형태로 걸려 있다. 혹자는 지나치게 한국적이라 새로울 게 없다 평하기도 했지만, 한 발 비켜보면 조각가가 시도한 이 평면의 그래픽 콜라주 작업에서는 세상의 중력, 크기, 거리 등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진다. 이런 일종의 해방감은 아래 스피커 다발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목소리 덕에 더 구체화되는데, 양혜규의 목소리를 딥러닝한 인공지능이 속삭이는 〈진정성 있는 복제〉 작업이다. 어려운 ‘추상언어’가 아니라 낯설 정도로 ‘현실적인 말’, 양혜규인 동시에 양혜규 아닌 양혜규 닮은 이 목소리는 작가 말대로 성대도, 몸통도 없다. 몸 없이 복제된 목소리가 부유하며 발화하는 문장들이 양혜규라는 역사에 굳게 뿌리 내린 선집의 글들과 짝을 이루며 대비를 만들어낸다. 스스로를 가장 극단적으로 타자화해 인간세계를 통찰하는 AI의 말과 말 사이에 우리의 현실이 있듯, 작가를 철저히 대상화한 선집 〈공기와 물〉의 추상적인 글과 글 사이에는 양혜규의 리얼리티가 있다.
2020년 한 해 동안 고루 예정되어 있던 양혜규의 모든 개인전은 시국 탓에 9월과 10월로 미뤄졌다. 국현 서울관 전시 앞뒤로 캐나다 온타리오 미술관(AGO, 10월 1일부터), 마닐라의 현대미술디자인 박물관(MCAD, 10월 15일부터), 영국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10월 24일부터) 등이 있고, 뉴욕 모마 전시도 11월 말까지 계속된다. 양혜규의 영감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는 사실인만큼 흥미로운 건 그 김에 4개국, 4개 미술기관, 4명의 큐레이터들이 온라인상에 모여 저마다 준비한 양혜규의 전시 내용을 공유하고, 팬데믹 시대 전시의 의미, 그리고 전시를 준비하는 경험 및 노하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두를 담론의 자리로 불러모으고 네트워킹을 펼쳐내는 것, 이것이 양혜규의 ‘중견작가’다운 역할인 동시에 “아무도 시키지도, 기다리지도 않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했던 숙제 같은 책” 〈공기와 물〉이 희망하는 바다.
〈공기와 물〉의 희망은 맨 뒤에 실린 출전, 더 읽을거리, 도판 목록, 찾아보기 등 색인 부분을 통해 순수성을 획득한다. 각 글의 원문, 양혜규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권장도서, 도판 목록, 작품 및 개인전 그리고 모노그래프, 인명과 기관명까지 아주 상세하다. ‘친절한 혜규 씨’가 양질의 글 및 자료를 찾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직접 선별해 소상히 알려준 셈이다. 없어도 무방했을 이 부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양혜규와 친구들’의 우정과 성장을 기록한 기념비적 결과물로만 남았을 공산이 크다. 사소해 보이지만 절대 사소하지 않은 이 부분 덕에 〈공기와 물〉은 진정한 ‘양혜규 본격 연구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전시 하나 만드는 것보다 더한 야심이 없었다면 할 필요성도, 해낼 수도 없었을 정도로 지난했던 책 작업의 마무리로도 부족함이 없다.

양혜규식 혼종 조각들의 서식지인 벽지 작업 〈디엠지 비행〉에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압축되어 있다. 앞에 놓인 〈소리 나는 접이식 건조대 ? 마장 마술〉이 혼재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번 전시 «O2 & H2O»는 20여 년 전 ‘공기와 물’이 ‘O2 & H2O’로 변화하기까지 양혜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사유의 물꼬를 트며 결국 움직임, 이동, 만남, 겹쳐짐, 변화, 전환의 문제에 다다른다. 언젠가부터 작업의 실체보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미술가’라는 이미지가 더 거대해지고, 모두가 경험하지 못했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미술가가 된 양혜규에게 이번 전시만큼이나 이 책의 탄생은 그래서 시의적절하다. 선집 〈공기와 물〉은 ‘작업이 전개된다’ 혹은 ‘작품이 진화한다’는, 당최 손에 잡히지 않던 전형적인 문장을 증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양혜규에게 또 다른 차원의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쯤 되면 양혜규의 농담은 더 이상 농담일 수 없다. “이번 선집을 꼼꼼하게 읽으신다면, 더 이상 저에게 성공의 비결을 묻는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적어도 그 질문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게 되지 않을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