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일간 양혜규, 월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양혜규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1백년 된 가옥에서 낮과 밤이 되어 만났다. 위험의 미학을 체화한 집은 지구의 진동과 호흡, 충돌과 사랑의 움직임으로 활성화되고, 우리 시선은 인간 세계 너머로 뻗어간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5.01.10
나오시마의 1백 년 된 전통가옥을 재해석한 전시공간 마타베의 전경. 양혜규의 <소리 나는 분출 뒤집기 - 두툼>과 <소리 나는 분출 뒤집기 - 갸름>이 나란히 보인다.

나오시마의 1백 년 된 전통가옥을 재해석한 전시공간 마타베의 전경. 양혜규의 <소리 나는 분출 뒤집기 - 두툼>과 <소리 나는 분출 뒤집기 - 갸름>이 나란히 보인다.


대부분의 기억할 만한 사건은 이질적인 대상들이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것이 이를테면 미술가 양혜규와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하 위라세타쿤)의 2인전 같은 예술적 사건이라면 양상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지난 6월의 어느 밤, 세토 내해를 접한 섬 나오시마 혼무라 지구의 전시공간 마타베 앞에 전세계 미술 관계자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두 작가 모두 분명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와 삶의 요소를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다는 건 알고 있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의 작품이 따로 또 같이 그려낼 미지의 시공간을 향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어둑한 주택가 골목을 밝혔다. 일군의 사람들이 커다란 나무 대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상기된 채 나오는 이들에 이어 다음 무리가 입장했다. 각각에게 주어진 30여 분, 그 접히고 겹쳐지고 펼쳐지며 마침내 증폭한 시공간의 제목은 《불의 고리 - 일간日間 양혜규, 월간月間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하 《불의 고리》).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이 날의 기억이 신체적 감각으로 자리한다. 시속 107,000km로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가 내내 꿈틀거리고 있으며 우리 역시 비록 실감하진 못하지만 끊임없이 진동을 공유하고 있음이 체득된 순간, 땅과 사람들 사이로 어떤 공기가 흘렀다. 공감 내지는 연대감이라 해도 좋을 바람이었다.

“이번 작업은 ‘협업(collaboration)’보다는 ‘공동생활(cohabitation)’의 개념에 가까웠어요. 우리 모두가 지구에서 공생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공식 행사에 나란히 앉은 양혜규와 위라세타쿤이 입을 모았다. 마타베는 히로시마 출신의 생태 건축가 삼부이치 히로시가 백년가옥을 재해석한 공간이다. 이번 공생 혹은 동거의 기본 전제는 이 오래된 집이 순도 높은 제 시간을 온전히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이방인들은 그저 집의 시간을 사이좋게 나눠 빌림으로써 각자의 방식으로 이 집에 산다. 양혜규는 낮을, 위라세타쿤은 밤을 점유했다. 더 정확하게는, 낮이고 밤이고 늘 집을 지키고 있는 건 양혜규의 조각 작품이다. 그리고 밤이 오면 위라세타쿤의 빛과 그림자가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나 머물다 간다. 양혜규의 수행적인 조각과 위라세타쿤의 자유로운 영상-설치 작업은 파열의 에너지를 일으키며 켜켜이 중첩된 시간과 기억을 깨우고, 이 고요한 집을 활성화한다. 우리는 2박 3일 동안 양혜규를 ‘쏠라 양’이라고 불렀다.

작가들도, 심지어 큐레이터조차도 이 작업이 성사된 결정적 계기를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는 듯싶다. 하지만 합의점을 도출한 과정은 이견의 여지없이 명쾌했다. 나오시마를 위시한 베네세 아트 사이트는 천혜의 예술 관광지 혹은 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의 성공적 사례로 손꼽힌다.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지추 미술관의 모네, 이우환 미술관의 영성, 안도 타다오의 헌신 등 대체불가한 요소들이 30여 년 동안 예술 섬의 명성을 구축했다. 이번 작업의 출발점도 바로 ‘베네세라는 현상’이었다. “특유의 정제되고 안전하며 깨끗한 이미지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는 데 우린 적극 동의했어요. 금기에 대해 서로 고민하던 차 에로티시즘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죠. 예컨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뒤라스가 보수화된 시민사회에 대항하기 위해 에로티시즘을 어떤 도구로 썼는지 같은. 그렇게 ‘분출(Eruption)’, ‘발기(erection)’ 등의 개념을 도출했어요.” 다른 말로는 황폐, 충돌, 전복, 욕망, 사랑이기도 한 숱한 움직임들. 제목 ‘불의 고리(Ring of Fire)’는 화산활동과 지진이 잦은 환태평양 조산대를 의미하는데, 양혜규의 말대로 이 땅에 실재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에너지, 그 객관적 진실에 대한 증거인 셈이다. 위라세타쿤은 “지진은 우리의 ‘집’인 지구가 움직이고자 하는 매우 기본적인 욕구의 발현”이라 말했다.

일대를 답사하던 위라세타쿤은 스스로도 의아한 경험을 했다. “사람들의 심장박동을 수집한 볼탕스키의 작품 <심장소리 아카이브>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사람의 심장박동처럼, 화산활동과 지진이 이 땅의 심장박동이 아닐까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양혜규의 마음을 얻은 것도 볼탕스키였다. 데시마 섬에 있는 볼탕스키의 <속삭임의 숲>은 방문객들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적은 종이가 풍경에 매달려 있는 형상인데, 양혜규는 청아한 풍경 소리에서 지질구조적인(tectonic) 움직임을 포착했다. 땅의 심장박동에 귀 기울이고 생명력의 본질을 추상화하기 위해 이들은 오히려 실제의 지진 데이터를 도입했다. 낮 동안 양혜규 작업은 실시간 데이터로 종일 작동하는 한편, 밤을 위한 위라세타쿤의 작업은 1900년부터 2024년까지 124년 동안 축적된 방대한 역사적 데이터를 작품화한다. 상반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지구의 신호를 통해 밤낮은 팽팽하게 교차되고, 과거와 현재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중요해진다.

언제 만나는가에 따라 《불의 고리》는 무성영화가 되기도, 설치작품이 되기도, 전시가 되기도 혹은 몰입형 공연처럼 보이기도 하기에, 밤의 마타베를 먼저 찾는 것도 권할 만하다. 대문과 정원을 지나 신을 벗고 목조 건물에 들어섰다. 다다미의 청량한 감촉이 어둠의 불안을 잠재웠다. 여기에서는 양혜규의 작업 <황홀봉헌탑등 恍惚奉獻塔燈 - 설화산 이계화 二界花>(2024)만이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빛을 낸다. 건축적이며 기하학적인 형태, 무속신앙에서 파생한 지화의 존재감, 표면의 장식적인 구멍 사이로 발산하는 붉은 빛 등이 밀도와 심도를 만들어내는 조각. 이 등은 전세계의 실시간 지진 데이터와 동기화되어 반응한다. 불빛은 잠시 깜빡거리다가 강도를 최대로 높여 환해지고, 곧 분당 0.3바퀴의 속도로 천천히 회전한다. 실시간 지진 데이터는 지구의 호흡을 기록한다. 데이터가 감지되지 않을 때, 즉 지구가 숨을 고를 때의 불빛은 한없이 온화하고 부드럽다.

명백한 생명의 징후로 작동하는 <황홀봉헌탑등>이 역설적으로 장례 문화를 상징하는 일본의 백색 사누키 제등을 참조했다는 사실은 양혜규의 다층적 면모를 증거한다. “등의 형태에 영어로는 ‘랜턴’이라 불리지만, 고인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수레 혹은 천국이나 바다로 보내는 이동수단이라는 개념이 특히 중요해요.” 이어 초창기 영화시대의 그림자 상자, 더 나아가 빛과 그림자의 시각적 효과를 통해 최면 효과와 ‘인터존’이라는 특정한 영적상태를 야기한 비트세대의 드림머신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 여기에 있거나 없는 모든 이들, 우리가 겪었거나 겪을지도 모르는 시간들, 어쩌면 가혹한 자연에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는 제의적 오브제라 믿고 싶었다. 등 주위로 사람들이 말없이 모여 섰다. 《불의 고리》를 경험하기 전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이 작품은 지금 순간을 ‘다른 세계(異界)’로 진입하기 위한 제의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도맡았다.
《불의 고리 - 일간日間 양혜규, 월간月間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밤 풍경. 위라세타쿤의 강렬한 빛이 양혜규의 방울 조각을 비추어 다감각적으로 활성화시킨다.

《불의 고리 - 일간日間 양혜규, 월간月間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밤 풍경. 위라세타쿤의 강렬한 빛이 양혜규의 방울 조각을 비추어 다감각적으로 활성화시킨다.


두 작가가 함께 구성한 환경은 우주의 움직임과 강렬한 열망, 더 나아가 사랑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인간계의 이분법에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해온 이들이 펼쳐놓는 '위험의 미학'은 그래서, 불온하지만 매혹적이다.

태국 시골에서 자란 위라세타쿤은 어렸을 때부터 어둠과 빛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기하학, 빛, 지각, 움직임에 대한 지대한 애정은 그의 모든 작업에 콜라주 되어 있다. 《불의 고리》 역시 웜홀에서 뻗어 나온 듯 힘찬 빛이 공간을 활보하며 시작된다. 빛과 그림자가 합심해 어둠을 섬세하게 조각한다. 날카로운 빛이 공간을 입체감 있게 베어내는 와중에 산의 능선 내지는 지형을 닮은 곡선의 빛이 공간 전체에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간혹 ‘삐-삐-‘ 하는 소리가 오묘한 진동을 동반하기도 한다. 작가에 따르면 이는 환태평양 조산대의 그간의 지진기록을 30분으로 축약한 소리이며, 중간중간 들리는 4번의 굉음은 인도양, 멕시코, 칠레, 그리고 일본에서 났던 거대한 지진의 기록이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라덴 살레가 2백여 년 전인 1856년에 그린 화산 그림이 돌연 등장해 자연과 인류의 뿌리 깊은 애증 관계를 시사한다. 어디선가 뿜어 나오는 희뿌연 수증기는 빛과 어둠을 선명히 할 뿐만 아니라 촉각성까지 부여한다. 어찌나 생생했던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금방 잡힐 듯한 빛이 내 손을 타고 넘어가 맞은편 이들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지구의 지각판처럼 집 곳곳에 켜켜이 쌓인 추상 및 구상 이미지들이 폭발적 에너지를 예고하는데, 마지막 부분에 등장해 ‘자유’를 읊조리는 양혜규의 나른한 목소리가 이를 달랜다.

이미지이든 소리이든 움직임이 선사하는 본질적인 순수함 같은 게 있다. 문득 홍콩 M+에서 본 위라세타쿤의 전시 《Primitive》가 떠올랐다. 천장이 높은 동굴 같은 공간, 어느 시골마을에서 청년들과 카메라가 격렬히 날뛰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작업 <I’m Still Breathing> 앞에 섰더니, 날 것의 움직임이 내 몸에 새겨졌던 기억 말이다. 당시 그는 홍보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상이 내 몸 위에 재생될 때, 나도 살아있음(I’m Still Breathing)을 느낍니다.” 위라세타쿤은 빛과 그림자를 이런 방식으로 활용한 설치-영상은 이전에도 선보인 적 있다. 그중 대만 국립 타이중 극장에서 상영된 <열병의 방>은 그가 탐색해온 혁신적 영화 경험의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과 어둠을 물성화해 연극적 요소로 활용하고, 파편적 이미지와 소리로 실험적 내러티브를 구축하며, 혹은 그의 오랜 주제이기도 한 ‘잠을 자는 여인’이 등장한다. 언뜻 《불의 고리》도 비슷한 문법을 구사한다. 결정적 차이라면 <열병의 방>에는 양혜규의 조각이 없다는 것이다.

위라세타쿤의 파편화된 빛은 대들보에 달린 양혜규의 또 다른 대형 조각 <소리 나는 분출 뒤집기>(2024) 두 점과 ‘조우의 산맥’을 형성한다. ‘소리 나는 조각’들은 거꾸로 뒤집힌 원뿔 형상으로 화산을 직관적으로 연상시킨다. 각각 직경 1미터, 1.5미터 크기의 밑면에서 붉은색과 은색의 방울이 아래로 쏟아져 흘러내리는 형국은 안정감과 위태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교도적 문화를 통해 현 세계를 탐구해온 양혜규에게 방울은 블라인드만큼 대표적인 재료다. 오래되었고, 왕성히 생산되었으며, 자주 보여왔다. 방울은 언제나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어왔지만, 그 자체로 이토록 생동감 넘치는 양혜규의 방울 작업을 본 적이 없다. 조각과 빛은 서로를 어루만진다. 빛에 감화받아 반짝이는 수천 개 방울은 어떤 향기, 소리, 촉감 등을 전방위적으로 일깨우며 그림을 그려낸다. 움직이지 않는 게 분명한 방울 조각이 동시에 빛을 통해 유연히 움직인다. 어쩌면 진짜 움직일 수도 있다는 상상과 긴장감이 더 은밀하며 관능적으로 다가온다. 양혜규는 “밤에는 내 작품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그에게 넘긴다”고 했고, 위라세타쿤은 “매일 밤 내 작품은 혜규의 작업을 비밀스레 만나기 위해 집에 숨어든다”고 표현했다.

양혜규가 스스로 빛나기 위해 늘 분투하는 작가이듯, 그의 작품 역시 외력에 의존할 때면 특히 신중했다. 예컨대<광원조각> 연작은 자가동력을 갖추고 있어 스스로 빛을 발했다. 국제갤러리 《동면한옥》에서 본 바, 제도화된 조명을 거부하고 어둠으로 들어앉아 작은 인조 촛불에 의지하거나, 관람객의 손전등 빛, 이들의 자기주도성에 잠시 의탁하기도 했다.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양혜규 작업들은 취약한 빛 아래에서 의외의 면모를 수줍게 드러냈다.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오히려 모호한 어둠 속에서는 보였고, 심지어 전혀 다른 작품처럼 여겨지기도 한 특별한 경험. 무엇보다 통제할 수 없는 빛은 가장 불완전한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양혜규의 작업은 타자의 빛에 선선히 몸을 맡기며 극강의 불완전함을 기꺼이 감수한다.
《불의 고리 - 일간日間 양혜규, 월간月間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낮 풍경. 위라세타쿤의 빛과 그림자의 향연이 잠시 모습을 감추고 대신 바람이 자리한다.

《불의 고리 - 일간日間 양혜규, 월간月間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낮 풍경. 위라세타쿤의 빛과 그림자의 향연이 잠시 모습을 감추고 대신 바람이 자리한다.


지진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받는<황홀봉헌탑등>이나 <소리 나는 분출>은 말하자면 땅이 움직일 때마다 살아나는 작업이다. 운이 좋으면 (혹은 나쁘면) 낮에 나뭇잎처럼 살랑거리던 <소리 나는 분출>이 갑자기 ‘차르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방울이 요동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지금 어디선가 지진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사실 쉽게 정의되길 거부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예술가 양혜규는, 그래서 작품의 움직임에도 유난히 엄격하다. 움직임에 현혹되어 그 이상을 바라보지 않을 거라 우려했고, 물리적 움직임보다 사회적, 감정적 움직임에 더한 호기심을 느다. 빨래건조대를 천으로 꽁꽁 감싸 움직임을 ‘냉각’시켜버린 <비-접힐 수 없는 것들> 연작은 이런 고민으로 탄생한 작업 중 하나다. 움직임을 본격화한 후에도 외부 요인이 아니라 개념, 서사 같은 내부의 관념적 요소에서 동력을 가져왔다. 바퀴와 손잡이가 달린 작업조차 관계자를 비롯한 제3자만 움직일 수 있었고, 그나마 계획된 동선을 따랐다. 이는 나와 너 외에 누군가의 존재감을 상기시키는 행위이자 작품의 수행성을 강조하는 장치였다. 즉 땅의 균열을 즉각적인 움직임으로 반영하고, 권한을 통제불가한 자연에 위임한 것이 처음이라는 뜻이다.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기술적 구현까지 가능함을 발견한 양혜규는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곧 열리는 개인전 《윤년》에 이렇게 개발한 신작을 선보인다.

낮과 밤, 태양과 달의 무게를 나눈다는 개념의 《불의 고리》는 의지보다는 순리에 따른다. 이들 작품의 온전한 만남은 일몰 이후에나 가능한데, 해가 지는 시점은 사시사철 달라진다, 이 같은 유동성 혹은 유연성은 두 작가가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도 필수 덕목이었다. “주제와 방향을 공유하되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암묵적인 룰은 상대를 향한 막연하되 확고한 신뢰에 바탕하고 있으며, 설득력 있는 결과물 앞에서 더 빛을 발한다. 나는 주저 없이 《불의 고리》를 최근에 본 중 가장 환상적인 작품으로 꼽지만, 좋은 작품의 기준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양혜규의 물리적 조각과 위라세타쿤의 환영적 빛이 실제 만나는 방식, 즉 모든 요소들이 겹쳐지고 포개어지는 형상과 본능적 움직임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이들의 느슨한 작업을 ‘궁극의 협업’으로 기억되게끔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다른 지 깨달을 수 있었어요. 일방적인 동시에 매우 유기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스스로 인정한 바, 두 작가의 간극은 꽤 크다. <엉클분미>나 <메모리아> 같은 위라세타쿤의 영화와 현재 베네세 하우스 미술관에서 선보이는 양혜규의 <솔 르윗 뒤집기 - 10 배로 축소된, 강철 구조물>(2021) 정도 된다. 위의 예에서 위라세타쿤은 잠과 꿈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혼합하여 혁신적인 영화 경험을 탐구해왔고, 미술근본주의자에 가까운 양혜규는 현대미술 거장인 솔 르윗의 작업을 전복함으로써 일방적인 미술사를 비판, 재해석한다. “그는 꿈에 관심이 많았어요. 보통은 꿈이 수면 상태라고들 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삶에 관한 것이기도 하죠. 저는 실제 꿈을 꾸지 않는 터라 더 흥미로웠어요.” 꿈을 안 꾼다는 양혜규와 현생보다 이생이 더 중요하다는 위라세타쿤. 지적 농담 같은 꿈 얘기를 듣고 있자니, 다른 대상을 함께 다룸으로써 경계를 허무는 데 이력이 난 양혜규가 기꺼이 스스로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는 생각도 든다. 양혜규는 ‘몰이해 속 이해’의 절박함을 잘 아는 작가이고, 그의 행보는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은 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불투명하게 남겨둔 상태에서 공존하는 법에 대한 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리적 조각의 매혹적인 활성화를 보여주는 양혜규의 표현법,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유희를 통한 위라세타쿤의 영화적 조명과 영상 연출은 하나의 공간에서 물질적인 요소와 찰나적인 요소 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만들어낸다.” 상호작용은 예측불가일 때 더 역동적인데, 어마한 차이점을 봉합하는 필연적인 공통점이 이를 견인했다. 두 작가는 자기 자신보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골몰하고, 인간과 비인간의 비가시적 관계에 몰두한다. 위라세타쿤은 인간 이외의 종 혹은 사물에 카메라를 비춤으로써 모든 생명체가 주인공임을 피력해온 한편 양혜규는 인간이자 동물, 무생물인 <중간유형> 연작 같은 카프카적 돌연변이, 혼성적인 존재들을 힘껏 키워왔다. “양혜규는 예술이 인간과 비인간의 이행 지점을 표현한다고 보는 작가 세대에 속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주체다.” 니콜라 부리오가 책 <펼침의 경험 - 양혜규와 당대의 조각>에 썼듯이 말이다.

지난 2019년 마이애미 바스 미술관에서 열린 양혜규 개인전 《불확실성의 원뿔》은 모든 걸 통제하에 두고 싶어하지만 여전히 불확실성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 아니 진실을 화두로 삼았다. 기후의 문제는 사회적 재난으로 치부되지만 우리는 종종 스스로가 그 일부임을 잊고 ‘제왕적 존재’이기만을 욕망한다. 화산, 지진 같은 자연현상의 치명적 아름다움을 향한 경외심은 일종의 반성이기도 하다. 자연현상은 인간에게 재난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을 만나기 전에는 재난이 아니었다. 전자가 객관적 리얼리티라면 후자는 주관적 리얼리티다. 두 작가가 함께 구성한 환경은 파열과 틈새를 야기하는 우주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강렬한 열망, 더 나아가 사랑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인간계의 이분법에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해온 이들이 펼쳐놓는 ‘위험의 미학’은 그래서, 불온하지만 매혹적이다.

간밤의 마타베가 아무리 인상적이었다고 해도, 낮에 오지 않았더라면 많은 걸 놓칠 뻔했다. 건축가 삼부이치가 바람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사실도, ‘소리 나는 조각’ 두 점이 세 칸 남짓한 집에 협곡을 만들어내며 공간을 무한 확장하는 풍경도, 어밤 나를 매료시킨 빛과 그림자가 구석구석 보이지 않게 각인되어 있다는 점도(즉 그는 떠난 적이 없다는 것도). 특히 양혜규의 <소소한 분출 - 소리 나는 황금화환>(2024)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종이죽을 빚어 만든 여섯 점의 화산 형태 조각은 황금색 방울을 목에 걸고 있다. 정원에서, 나무 아래에서, 반쯤 열린 벽장 안에서 이들을 하나씩 찾아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신비로운 평면 작업 <황홀망>에서 아홀로틀(멕시코 점박이 도룡뇽과의 일종) 얼굴을 한 캐릭터를 발견했을 때처럼 괜히 웃음이 났다. 원래 이 집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지키고 있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속삭이는 오브제들은 비밀스럽고 신성하기까지 하다. ‘위험한 아름다움’에 대한 예술가의 경외심과 모두의 안녕을 비는 동시대인의 마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움직이지도, 빛을 발하지도 않는 이 소박한 작품은 ‘장소 특정적 현대미술’의 진보한 가치에 방점을 찍는다.
집과 정원 곳곳에 조용히 자리한 <소소한 분출 - 소리 나는 황금화환>.

집과 정원 곳곳에 조용히 자리한 <소소한 분출 - 소리 나는 황금화환>.

《불의 고리》는 오는 2027년까지 예정되어 있다. 이 집이 무수한 낮과 밤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얘기다. 어쩌면 몇 번의 크고 작은 지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올해만큼 ‘몰인정한 무더위’가 또 엄습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폭우와 강풍에 흔들릴 수도 있다. 장지문을 열어 둔 채 쓸쓸하고 고독하게 며칠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관광객이라 불리는 숱한 이방인들이 거쳐가며 예기치 않은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이 시간을 평가하고 의미부여 하는 건 인간이지만, 온전히 겪어내는 건 다름 아닌 이 집이다. 잠과 각성,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선 집은 전혀 다른 논리의 시간을 차곡차곡 접어내고 또 펼쳐낸다. 인간 중심의 가치관과 경험만으로 세상을 해석해온 우리가 인간 외의 모든 대상을 동등한 주체로 바라보게 한다. 이 집 영역 너머와 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탈인간주의적 움직임, 주관적인 리얼리티를 진실로 느끼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우리는 가장 편안하고도 위험한 이 집에 머물러야만 한다. 그러므로 《불의 고리》를 경험한다는 건 현대미술이 거대 진실이나 교훈적 성찰이 아니라 혼성성과 유동성의 총체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타자를 인정하고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무한히 확장된 ‘우리’와 소통할 수 있음을 은유하며 오래 기억될 집. 양혜규의 낮은 영영 잠들지 않을 것이고, 위라세타쿤의 밤은 끝내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선가 또 바람이 불어왔다.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부디 안녕’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불의 고리 - 일간日間 양혜규, 월간月間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일본 나오시마 베네스 하우스 미술관 마타베에서 2027년까지 열린다.

윤혜정은 국제갤러리 이사로 활동 중이며, 예술에 관한 다양한 결의 글과 인터뷰를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Credit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이자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저자)
  • 사진/ 국제갤러리 및 베네세 아트 하우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