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바이벨, 〈Video Lumina〉, 1977, 모니터 7대 영상설치.
5년 만에 다시 찾은 광주는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5년 전 유니버시아드대회의 통역요원으로서 이 도시를 방문했을 당시 세계적인 축제로 들떠 있던 광주의 모습을 봤다면, 이번 테마는 로컬 예술 기행으로 예향 광주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출발한 여정은 안타깝게도 비와 함께 시작되었다. 태풍 바비의 영향권에 든 광주엔 바람마저 세차게 불었지만 우뚝 선 광주시립미술관은 끄떡없는 듯했다. 5·18민주화운동의 도시답게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특별전 «별이 된 사람들»이 개최되고 있다. 으스스한 소리가 나는 피터 바이벨의 〈신음하는 돌〉, 두 개의 의자가 대치한 채 놓여 있는 쑨위엔 & 펑위의 〈No Way〉 등 긴장감 넘치는 작품에서 시작된 전시는 조정태의 〈별이 된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조정태는 작가 노트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오월은 이름 없이 별이 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만들어낸 과정일 것이다. 아직도 많은 곳에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별이 된 자들은 남겨진 이들이 가야 할 지향점을 환히 비추는 듯했다.
쑨위엔 & 펑위, 〈No Way〉, 2015, 철제 책상, 의자, 발열장치, 온도조절기, 물통 가변설치.
발걸음은 자연스레 광주시립미술관 분관인 하정웅미술관으로 향했다. 5~6공화국 당시 도지사 공관으로 쓰이며 지방 청와대로 불리기도 했던 이 공간은 세월이 흐르며 숲속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이윽고 광주시립미술관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가 잠시 멎었을 때 과거 녹지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하정웅미술관의 외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건물은 푸른 자연과 어우러져 청량한 빛을 띠고 있었다. 올해로 20회를 맞이한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은 청년 작가의 발굴과 육성을 강조해온 하정웅 선생의 뜻과 일맥상통하여 진행되고 있다. 전시명 «빛2020»은 말 그대로 희망, 소중함,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화합의 정신을 내포한다.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고 사소한 일상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리워진 요즘, 희망과 소중함의 메시지가 주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몽환적인 빛과 안개로 가득 찬 부지현 작가의 작품 〈궁극공간-잠시멈춤〉은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넋 놓고 작품을 관람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 시간을 넘겼다. 광주 음식점은 아무 곳이나 들어가도 평균 이상은 되는 맛집이라고 하지만 머무르는 시간이 짧은 만큼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여러 곳을 수소문했다. 그렇게 찾아 들어간 곳은 육전으로 유명한 대광식당. 오래된 노포가 새롭게 단장하여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육전이야 자주 접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바로 앞에서 구워주는 전과 기본 찬은 맛의 도시로서의 광주의 존재를 입증했다.
광주, 예술. 두 단어를 엮으면 절로 연상되는 운림동 미술관거리에서 광주의 동쪽, 무등산 방향으로 조금 더 들어가본다. 그곳엔 무등현대미술관과 드영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올해로 제8회를 맞이한 무등현대미술관의 환경미술제는 ‘초록’과 ‘구름’을 주제로 한 «Green Cloud»전을 개최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긴 장마와 잦은 태풍을 겪으며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를 체감한 지난 여름, 〈바자〉 또한 지속가능성에 관한 칼럼을 연재해오며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진 만큼 전시가 가져다 준 경각심은 남달랐다. 하지만 전시만큼이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2층에 자리한 정송규 관장의 개인 작업물과 아카이브였다. 하나의 작업물을 만들기 위해 했을 수많은 노력이 작업실 한편에 보관되어 있었다. 10년 단위로 작업방식이 바뀐다는 그의 아카이브와 작품들을 보자 그에 비해 반도 안 되는 노력을 하며 현실에 안주해온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미술관의 뒷문에는 아프리카에서 8백 년 이상 살았다는 나무가 심어져 있다. 삐뚤빼뚤 자란 굵은 나무에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인생은 고속도로가 아니에요.” 나무를 보여주며 했던 그의 말이 직전에 봤던 그의 아카이브와 겹치며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여정의 마지막인 드영미술관은 만학도였던 김도영 관장이 고군분투하는 주변의 젊은 학도들을 보며 그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고자 만든 미술관이다. ‘증명할 수 없음에도 참인 명제’가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이 명제처럼, 인생은 불완전하지만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음을 시사하는 듯했다. 김도영 관장 또한 “전시 제목인 ‘불완전의 에너지’는 매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하는 청년 작가들에게 더욱 해당이 되는 말일지도 모른다”며 청년 시절 자체가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가려는 과도기임을 일깨워주었다. 어쩌면 그저 전시에 대해 한 말일지 모르는 그 말 한마디가 가슴에 깊게 박힌 것은 현재 그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탓일까. 세차게 내리던 비 탓에 취재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을지라도, 무등산의 운치가 더해진 미술관의 외관은 한층 웅장해 보였다.
프리랜스 에디터 문혜준은 작년 5월 처음 〈바자 아트〉 제작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아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예술이 있는 공간에 머물며 시간을 향유하는 것을 즐긴다.
INFO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시 북구 하서로 52
전시: «별이 된 사람들», 2021년 1월 31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분관 하정웅미술관 | 광주시 서구 상무대로 1165
전시: «빛2020», 11월 29일까지.
대광식당 | 광주시 동구 서석로7번길 5
무등현대미술관 | 광주시 동구 증심사길 9
전시: «Green Cloud», 8월 25일까지.
드영미술관 | 광주시 동구 성촌길 6
전시: «불완전의 에너지», 10월 1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