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야기(Conte De Printemps)〉는 이맘때에 잘 어울리는 영화다. 나타샤(플로렌스 다렐)의 시골집에 방문한 잔느(안느 테이세드르)가 멍하니 창 밖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 문이 열리고 어두웠던 방에 햇빛이 쏟아지는 순간. 에릭 로메르는 계절의 마법 같은 찰나를 포착해내는 감독이었다.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자 10주기. 출판사 고트가 그의 작품 중 계절 시리즈를 꼽아 〈사계절 이야기: 에릭 로메르 각본집〉을 발행한다. 몇 년 전 이미 그랬듯, 시네마테크에서 그의 회고전이라도 열린다면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되고 관객석은 빽빽하게 들어차겠지만, 극장으로 향하기도 부담스러운 지금으로선 독서가 그의 작품을 새롭게 음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
게다가 이 책이 각본집의 형태라서 더욱 반가울 따름. 그는 평범한 대화 속에 번뜩이는 삶의 진실을 숨겨놓는 예술가였다.
내 집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난 거기가 싫어. 가끔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지. 거길 부숴서 날려버리고 싶어.
1 〈사계절 이야기: 에릭 로메르 각본집〉. 2 에릭 로메르. 3 일러스트레이터 이규태가 재해석한 〈여름 이야기의 한 장면〉.
영화 속 잔느의 불평이 이토록 와닿은 적이 또 있을까. 그녀의 심정으로 계절 시리즈를 곱씹어본다. 사건은 소생하고 오해는 싱겁게 풀리겠지만 그래도 좋다. 지금 우리가 꿈꾸는 봄도 겨우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