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클라쓰〉 마지막 회차분 촬영을 남겨둔 상태인데 기분이 어때요?
제작 기간을 다 합치면 이 작품으로만 거의 일 년을 보낸 것 같아요. 일단 시원섭섭해요. 시원이 좀 더 큰 것 같긴 한데….(웃음) 첫 방송 즈음 코로나19가 절정이어서 걱정했는데 무사히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고요.
훗날 돌이켜보면 이 작품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요?
이를테면 좀 더 대중적인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요. 그게 제 올해 목표였거든요. 작년 한 해는 독립영화들을 하면서 나름의 의미를 찾았다면 올해는 조금 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었어요.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것 같아 기뻐요.
톱은 Alexander Wang. 데님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필모그래피를 보면 어떤 흐름이 읽혀요. 영화는 용감하게, 드라마는 유연하게. 투 트랙 전략인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요즘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렇게 따로 가진 않는 것 같아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도 점점 무너지고 있고요. 장르적인 시도를 하거나 독립영화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드라마도 많아요. 이제는 작품의 형식보다 내용이 얼마나 새롭고 신선한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시류에 맞게 매체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하게 연기하고 싶고요.
하지만 독립영화와 주말드라마의 소비층은 꽤 다르죠.
안 그래도 어제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평상시에 정말 ‘후리하게’ 입고 다니거든요. 롱 패딩에 모자 쓰고 장을 보러 갔는데 정육 코너에 계신 아버님이 저를 알아보시더라고요. 무엇보다 저희 엄마 아빠가 좋아하세요. 드디어 “저,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거죠.(웃음) 그거 되게 굴욕적이거든요. 저는 2016년도부터 지금껏 한 번도 쉰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엄마 아빠는 늘 걱정을 하셨죠.
사실 〈이태원 클라쓰〉의 성공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잖아요. 업계에서도 오래전부터 대박 드라마라고 소문이 자자했고요. 다만 트랜스젠더 역할을 맡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누가 봐도 잘될 드라마이기 때문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걱정이 동반됐던 건 사실이에요. 감독님도 캐스팅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마현이 역할로 남자배우를 캐스팅할 것이냐, 여자배우를 캐스팅할 것이냐부터 쉽지 않았던 걸로 알아요. 감독님의 제안에 저도 일단은 지르는 마음으로 같이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저와 감독님과 제작진의 입장은 모두 같았어요. 어려운 캐릭터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신을 갖고 밀고 나가면 시청자들도 받아들일 거다.
설정값이 쉽진 않죠. 그런데 그 설정이란 것이 이 인물을 특이하다고 설명할 근거가 되는지 의문이 있었어요. 〈꿈의 제인〉에서 트랜스젠더 역할을 했던 구교환 배우도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고요. 성별이 어떻고 정체성이 어떻고 하는 것보다 일단 제인이 자기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본인도 평범한 여자로 연기했다고요. 저도 마현이를 연기하면서 인물에 보편성을 입히려고 노력했어요. 설정값보다도 그저 매회 대본 안에 그가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려고 했고요.
스트라이프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Alexander Wang.
그런데 마현이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선 여러 말이 나온 것도 사실이에요. 이를테면 클럽 신에서 굳이 긴 머리 가발에 힐을 신고 나와야 했던 건지.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지 모든 ‘m to f’가 그런 건 아니잖아요. 연출진의 의견도 있었겠지만 연기한 입장에선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역할을 준비하면서 느낀 게 트랜스젠더라고 해서 흔히 사람들이 떠올리는 특성만을 갖고 있진 않더라고요. 수술을 했으면 긴 머리를 하겠지, 귀고리를 하고 치마를 입겠지 이런 상상에서 오히려 벗어나려고 노력했어요. 클럽 신의 경우엔 박새로이(박서준)를 제외한 ‘단밤’ 식구들이 이 친구의 정체성을 모르는 상태잖아요. ‘나만의 시간을 가질 때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더 표출하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고심해서 스타일링을 한 거였고요. 후반부에 마현이가 수술을 한 뒤에는 일부러 그런 스타일링을 배제했어요.
“네가 너인 걸 굳이 납득시킬 필요는 없어.”라는 박새로이의 말에 펑펑 우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기술적으로도 좋았지만 화면을 뚫고 진정성이 느껴졌거든요.
개인적으로 너무나 큰일이 닥쳤지만 현이의 성격상 새로이 앞에서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친구가 도망쳐도 된다고 얘기해주는 거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복합적인 기분이었어요. 감정을 얼마나 표출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다 쏟아내는 게 맞겠다 싶더라고요. 무장해제된 사람처럼 엉엉 울었죠.
배우야말로 내가 나인 걸 남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본체 이주영으로서도 공감했나요?
그 부분이 때론 힘겹게 느껴져요. 제가 갖고 있는 능력이나 대중이 저에게 보내는 관심에는 분명 한계치가 있을 텐데 저는 그걸 깨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또 제 성격상 그런 일이 아니면 흥미를 느끼지 못할 거예요.
스트라이프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Alexander Wang.
해보고 아니면 말자 주의거든요.(웃음) 그렇다고 제가 엄청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많은 것을 모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부딪혀봐야 느끼는 게 있겠죠.
여성주의에 대해 공식석상에서 여러 번 본인의 생각을 밝힌 적 있어요.
흔히 ‘소신 발언’이라고 하잖아요. 어떻게 여자배우가 저렇게 용기를 내서 이야기하느냐고도 하시고요. 그런데 전 용기를 낸 적 없거든요. 제 말 한마디가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냥 제가 느낀 바를 제 성격대로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오히려 그렇게 받게 되는 주목들이 좀 민망해요.
‘이주영은 솔직하되 유연한 배우’라는 평가에 동의해요?
이 일을 하면서 매 순간이 선택의 기로였던 것 같아요. 충돌하는 지점은 언제나 있고요. 그런데 꼭 한 길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 나름의 소신이 있고 최소한의 선이 있다면, 〈이태원 클라쓰〉에서 마현이 역할을 선택한 것처럼 조금은 어렵거나 빗나갈 수 있는 선택도 일단 해보는 게 맞다고 봐요.
드라마 스페셜 〈집우집주〉에서 이주영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달까요. 멜로에 대한 재능요.
집, 연애, 결혼. 누구나 하는 고민들이잖아요. 보편적인 서사와 보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라서 거기서 오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만약 차기작으로 하고 싶은 장르가 뭐냐고 물어보시면 저는 멜로라고 답할 거예요. 생각해보니까 제가 재미있게 본 작품들이 다 멜로거든요? 아니, 난 이렇게 멜로를 좋아하는데 왜 지금껏 장르물만 한 거지?
막연히 작업 과정에 있어서 장르물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집우집주〉를 하면서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됐고요. 역시 어떤 작품을 하든 저에겐 무조건 플러스 요인이 있다니까요.
비록 부모님은 걱정하셨을지라도(웃음) 2016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지치진 않아요?
잘 지쳐요.(웃음) 이번 드라마 하면서 수백 번은 지쳤거든요. 자잘하게 너무 잘 지치니까 이제는 슬럼프가 와도 그런가 보다 해요. 그분이 한번 오시면 쓸데없는 고민을 계속하게 되잖아요. 머리 싸매고 드러누워봤자 당장에 답을 내릴 수 없는 것들요. 그럴 땐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잘 자고 좋은 영화 보고 좋은 책 읽고. 그게 최고인 것 같아요. 어느 날 바닥까지 내려갔다가도 다음 날 날씨가 좋으면 기분이 풀어지는 거죠. 그때마다 스스로 ‘와, 나 정말 하찮은 인간이다’ 싶고.(웃음) 사실 재작년쯤 번아웃을 겪었어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한번 ‘극복’하겠답시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죠. 수영도 해보고 게임도 해보고 자전거도 타보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됐죠. 작품을 시작했더니 그 와중에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힘듦이 찾아오면 그걸 안고 땅굴까지 파고드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흘려 보내야 한다는 걸요. 뭐든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힘든 것 같아요.
지금 이주영이 품고 있는 단순한 진리는 무언가요?
저는 늘 제가 별거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주변을 보면 다 저보다 열심히 하고 잘하는 사람들 투성이에요. 20대 초중반에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는데.(웃음) 어차피 내가 별게 아니라면 그냥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도인 같은 말이긴 한데 사는 게 참 별거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고 너무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전 제가 할 수 있는 걸 할래요.
크롭트 가디건은 Miu Miu. 스트라이프 팬츠는 Instant Funk. 신발은 Converse. 이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저는 늘 제가 별거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도인 같은 말이긴 한데(웃음). 어차피 내가 별게 아니라면 그냥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고 너무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