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추모하며, 패션 거장이 남긴 영원한 유산

과시 대신 침착함, 소란 대신 완벽주의로 기억될 이름, 조르지오 아르마니. 로고 없이도 우아한 시대를 연 사람에게, 지금 세계는 조용히 경의를 표하고 있다.

프로필 by 최강선우 2025.09.09

10초 안에 보는 요약 기사

✓ 아르마니는 절제미와 젠더리스 스타일로 패션계의 흐름을 크게 바꿨다.

✓ 영화 의상,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사회공헌까지 다방면에서 혁신을 이끌었다.

✓ 아르마니를 기리며 볼 콘텐츠 5.


사진/ 게티 이미지

사진/ 게티 이미지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아르마니 그룹은 성명을 통해 “창립자이자 지치지 않는 추진력(tireless driving force)”으로 그를 추모하며 “우리는 쌓아 올린 것을 지키고 사랑과 책임으로 그의 회사를 이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패션계와 전 세계 팬들은 갑작스러운 부고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다. 추모 물결은 주말 이후 계속되고 있다. 동료 디자이너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세상은 거인을 잃었다. 역사를 만들었고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진정한 친구이자 전설”이라며 비통한 마음을 전했다.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 역시 아르마니의 작품은 단번에 알아볼 만큼 뚜렷한 개성과 비전을 지녔고 영화·음악·건축 등 모든 영역에 흔적을 남긴 거장이라 회고했다. 네 가지의 키워드를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면모와 이야기를 통해 그를 기려보려 한다.



Keyword 1 Minimalism 절제미의 극치

사진/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공

사진/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공

1934년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태어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남성복 매장에서 쇼윈도 장식을 보조하며 판매원으로 일하며 꿈을 키워나갔다. 프리랜서 일을 한 뒤 1975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했다. 론칭 4년 만인 1979년,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과 세계적 영향력을 갖춘 디자이너로 자리 매김했다. 아르마니의 디자인 철학은 겉으론 절제되어 보이지만 혁명이 깃들어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남성 정장의 틀을 깨고 옷감 선택에서 실루엣까지 새롭게 재해석했다. 두툼한 패드로 각 잡힌 재킷 대신 유려하게 떨어지는 언컨스트럭티드 수트(Unconstructed Suit)를 선보였을 때, 패션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이 변화는 여성들에게 해방감과 자신감을 선사했다.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는 재킷과 날렵한 팬츠로 구성된 그의 수트는 당시 커리어 우먼들에게 조용한 힘이 되었다. 파워 수트, 파워 드레싱의 시대를 연 그는 일찍이 1980년대부터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젠더리스 실루엣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부드러운 색상과 유연한 재단으로 남성성에 우아함을 불어넣었고, 정형화된 여성스러움 대신 강인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조용한 럭셔리’라는 현대적 개념의 초석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화려한 로고나 장식 없이도 아름다움과 권위를 풍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아르마니는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까지 패션의 흐름을 바꿔놓은 인물이었다.



Keyword 2 Movie Scene 헐리우드가 사랑한 디자이너

사진/ 울프오브월스트리트 캡처

사진/ 울프오브월스트리트 캡처

1980년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리처드 기어에게 입힌, 부드럽게 흐르는 실루엣의 수트는 아르마니의 이름을 미국에 각인시킨 결정적 순간이었다. 안감을 제거하고 어깨선을 낮춘 유려한 수트는 화면 속에서 새로운 관능미를 발산했고, 배우의 매력과 캐릭터의 이미지를 한층 배가시켰다. 이후 헐리우드는 앞다투어 아르마니를 찾았다. 영화 <언터처블> 등의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위한 의상을 제작하며 영화 의상계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다크나이트 시리즈 (2008), 바스터즈:거친 녀석들(2009),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등 다수의 영화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고 한다. 스크린뿐만 아니라 레드 카펫까지 아르마니의 무대로 변모했다. 업계 최초로 전문 팀을 꾸려 스타들을 패션쇼에 초대하고 의상을 협찬하며, 시상식장 드레스 코드를 재정의했다. 샤론 스톤, 조디 포스터, 케이트 블란쳇,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수많은 스타들이 아르마니의 드레스를 입었다. 또한 영화예술 지망생들을 위해 젊은 영화인 워크숍 Armani/Laboratorio를 후원하고, 패션필름 프로젝트를 통해 신예 감독들을 적극 지원한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Keyword 3 Daily Luxury 옷의 한계를 넘는 상상력

사진/ 아고다 제공

사진/ 아고다 제공

사진/ 아고다 제공

사진/ 아고다 제공

사진/ 아고다 제공

사진/ 아고다 제공

사진/ Armani/Casa

사진/ Armani/Casa

사진/ Armani/Casa

사진/ Armani/Casa

사진/ Armani/Casa

사진/ Armani/Casa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디자인한 드문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그의 철학은 인테리어 브랜드 ‘Armani/Casa’와 요식·호텔 사업까지 확장되었다. 패션 하우스의 경계를 넓혀 인테리어, 호텔, 레스토랑, 심지어 부티크 카페와 서적까지 자신의 미학을 스며들게 했다. 도쿄의 아르마니/긴자 타워 등 세계 주요 도시에 콘셉트 스토어를 열며 유명 건축가들과 협업했다. 두바이와 밀라노에 개장한 아르마니 호텔은 패션 디자이너가 설계부터 참여한 세계 최초의 호텔로 화제를 모았다. 품질과 디자인에 대한 집념 덕분에 아르마니는 가구, 향수에서 부티크까지 일관된 우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패션은 음악, 영화, 스포츠, 예술, 건축과 연결되어 있다”라는 신념대로 삶의 순간순간 품격을 불어넣으며 ‘일상적 럭셔리’라는 개념을 우리 삶으로 정착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eyword 4 조용하지만 강한 리더 leadership

사진/ 게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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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성공 뒤에는 조용한 리더십이 있다. 그는 묵묵히 작업에 몰두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늘 검은 티셔츠 차림으로 쇼 마지막에 인사하러 나오는 소박한 모습은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는 광고의 폰트 하나까지 직접 신경 쓸 만큼 모든 디테일을 장악한 꼼꼼한 경영자였다. 항상 스튜디오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가장 늦게 떠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50년간 자신의 이름을 내건 회사의 독립성을 지켜온 배경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완벽주의와 소신이 있었다.

사진/ 아르마니 제공

사진/ 아르마니 제공

사진/ 아르마니 제공

사진/ 아르마니 제공

사진/ 아르마니 제공

사진/ 아르마니 제공

디자인만큼 경영 스타일도 요란함 없이 적은 말, 빠른 행동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런웨이 뒤의 그는 나눔과 책임의 아이콘이었다. 2010년 조르지오 아르마니 뷰티(Armani Fragrances)는 유니세프와 함께 개발도상국 식수 지원 캠페인 ‘Acqua for Life’를 시작해 깨끗한 식수를 제공하는 데 앞장섰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동물권을 향한 결단도 눈여겨볼 부분. 2016년 모피 사용을 전면 중단하며 신념을 밝혔고 페타(PETA)로부터 패션 업계 공로상을 받을 만큼 혁신적 행보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공익적 행보는 2016년 조르지오 아르마니 재단 설립으로까지 이어졌다.



아르마니가 남기고 떠난 것들

아르마니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아함의 상징이자, 조용한 혁명을 이끈 거인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철학을 지켜냈기에 시대를 넘어선 클래식을 탄생시켰다. 회색과 베이지의 중간톤 “그레이지(greige)” 색상, 차분한 네이비, 블랙 등이 제안하는 중립적인 팔레트는 브랜드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외에도 절제된 장식, 완벽한 재단은 패션의 교과서적 기준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파워 드레싱’ 스타일 옷을 입고 커리어를 쌓은 여성들, 레드 카펫에서 빛났던 영화배우들, 일상을 우아하게 가꾸고픈 일반인들까지, 모두의 옷장과 삶 속에 아르마니의 유산이 깃들어 있다.

또한 그는 가족 경영이 주를 이루는 이탈리아 패션계에서 외부 자본 없이도 세계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독립성을 지키는 뚝심, 장인정신과 자율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평가다. “아름다운 것은 유효기간이 없다. 한 계절이 지나 갑자기 못나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멋과 개성을 더해간다”라는 생전 그의 말처럼, 시간을 견디는 우아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디자이너가 설정해놓은 원칙 ‘품질에 대한 고집, 일관된 스타일, 과장 없이도 전달되는 미학’은 오래 남는다.



거장이 떠나고 난 자리에

사진/ 조르지오 아르마니 SNS

사진/ 조르지오 아르마니 SNS

아르마니의 별세는 이탈리아 전통 패션 하우스의 큰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오트 쿠튀르의 시대를 개척했던 창립자 세대가 무대 뒤로 사라지며, 모든 관심은 아르마니 제국의 향방에 쏠린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지만, 생전에 가족과 오랜 동료들로 구성된 후계 구도를 마련해두었다. 2016년에는 재단을 설립하여 지배구조를 안정화하고, 여동생 로자나와 조카 실바나, 로베르타, 안드레아를 기업 경영에 참여시켜왔고, 50년간 동고동락한 수석 디자이너 판탈레오 델오르코 등을 사실상 가족으로 두었다. 아르마니 측은 팀 경영 체제를 꾸려갈 예정이라 밝혔지만 변화는 예단하기 어렵다. 향후 몇 년간 창의성 측면에서 단일 수장 체제로 갈지, 부문별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체제를 도입할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까지 수차례 거부해왔던 LVMH 같은 글로벌 대기업의 인수 제안을 뿌리칠 수 있을지도 귀추가 주목된다.



아르마니를 기리며 볼 콘텐츠 5

이토록 멋진 디자이너의 삶과 철학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발자취와 정신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책 1 Per Amore (조르지오 아르마니, 2015 리졸리)

88세의 아르마니가 2015년에 직접 쓴 자서전이다. 제목인 ‘사랑으로’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패션에 대한 애정과 자기 철학을 담담하게 풀어낸 책이다. 그의 깊은 통찰이 곳곳에 담겨 있어, 디자인 세계관을 가깝게 이해해볼 수 있다.


책 2 Being Armani, 레나타 몰호

사진/ 출판사 Independent

사진/ 출판사 Independent

이탈리아 패션 전문 기자 레나타 몰호가 쓴 아르마니 평전이다. 평범한 의류 판매원에서 세계적 패션 아이콘으로 어떻게 도약했는지 30여 년의 여정을 상세히 조명한다. 잘 모르는 아르마니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영화 3 아메리칸 지골로 (American Gigolo), 폴 슈레이더 감독, 리처드 기어 주연.

사진/ alamy

사진/ alamy

아르마니가 영화 의상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 작품으로 주인공 줄리안의 옷장 가득 걸린 아르마니 수트들은 언스트럭처드 수트의 매력을 한껏 보여준다. 아르마니의 이름이 할리우드에 각인되게 만든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4 Made in Milan, 마틴 스코세이지

세계적 거장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Martin Charles Scorsese) 가 연출한 20분 분량의 단편 다큐멘터리로, 디자이너 아르마니의 밀라노 작업실을 들여다 본 귀한 기록. 패션쇼 준비 과정과 밀라노라는 도시 풍경을 교차 편집해 일하는 현장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다큐멘터리 5 Giorgio Armani: A Man for All Seasons

3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영국 다큐멘터리로, 사생활 노출을 꺼리던 아르마니가 직접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밀라노 본사 일상, 스태프들과의 교감, 인터뷰를 통해 전하는 철학 등 패션 아이콘의 인간적 모습과 업적을 균형 있게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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