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릴리 잇 머신'이 믿는 것

그리고 일과 음악을 병행하는 삶에 관하여.

프로필 by 손안나 2025.03.09

밴드의 시대


“위대한 서막이 모두의 눈앞에.” - 카디의 ‘No Need’ 중. 태동하는 밴드들.



(왼쪽부터) 션이 착용한 셔츠는 Martin Rose. 장갑은 Givenchy. 선글라스는 Sleeq Steel. 재킷, 팬츠,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상권이 착용한 재킷은 Ernest W.Baker. 벨트는 Martin Rose. 선글라스는 Sleeq Steel. 셔츠, 팬츠,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제이가 착용한 재킷은 Recto. 톱은 H&M×Rabanne. 선글라스는 Sleeq Steel. 이어커프는 Portrait Report. 반지는 Bell&Nouveau. 슈즈는 Converse×JW Anderson.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현구가 착용한 모자는 Mister Child. 선글라스는 Sleeq Steel. 슈즈는 Ascis. 재킷, 셔츠, 팬츠, 타이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릴리 잇 머신 LILLY EAT MACHINE


하퍼스 바자 이름의 의미는?


2022년 동물영화제에서 <고독의 지리학>을 보다가 문득 생각난 세 단어를 조합해 내가 만들었다. 문법에 맞지 않는 엉터리 문장이지만 단어 ‘Lilly(혹은 Lily)’가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질감과 ‘Machine’의 날카로운 질감이 부딪히며 내는 시너지가 곧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하퍼스 바자 어떻게 만들어졌나?


2020년 나와 제이는 소위 말하는 작업실 메이트였다. 나는 솔로 앨범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제이가 연주하는 기타 리프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녹음해서 톱라인을 붙여보고 드럼과 베이스를 찍어 구조를 만들었는데 되게 잘 나와서 함께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와 제이의 건강 이슈, 내 학업 문제로 몇 년 동안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그러다 2022년 전에 함께 활동했던 밴드 구십구십구의 베이스였던 상권이를 꼬셔서 기타로 스카우트했고 제이가 베이스 멤버로 동아리 선배인 현구를 포섭, 상권이가 동아리 선배인 드러머 용호를 포섭해서 2022년 늦가을에 지금의 구성원을 갖췄다.


하퍼스 바자 밴드 내의 직접적인 포지션과 간접적인 포지션은 무엇인지.


노래와 키보드 또 전반적인 작사, SNS 계정 관리, 섭외 및 행정적 업무 등을 맡고 있다. 솔로로도 활동 중이고 다른 밴드에서 드럼도 치고 있다.


제이 기타를 치고 있고 션이 작곡 기폭제라고 하더라.


상권 기타를 치고 어쩌다 보니 밴드의 얼굴 담당이 되었다. 형들이 자꾸 나를 ‘굿 루킹 가이’라고 해서 1집 앨범 커버도 내 얼굴로 하게 되었다.(웃음)


현구 베이스 포지션이며 감사원장을 맡고 있다. 션이 일을 벌이면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보고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용호 드러머. 멤버들이 자꾸 정신적 지주라고 하더라.(웃음) 나이가 가장 많아서 그런가….



하퍼스 바자 1집 <우리는 불연소의 여름에 갇힌 채 밤을 맞고>에 담으려고 한 것은?


앨범 콘셉트는 내가 짰다. 혼자 있을 때 종종 망상이나 추억 회상을 하곤 하는데 그 시간이 끝나면 당장 내 눈앞에 닥친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그렇게 싫더라. 그것을 앨범으로 옮기면 어떨까 했다. 그 당시 내가 끔찍이 그리워하던 2011년의 여름방학, 옛 애인과의 즐거운 시간들에 관한 노래로 시작해서 어릴 적 트라우마, 이별, 최근 겪은 힘들었던 일을 지나 완전한 혼돈에 관한 곡으로 앨범이 끝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가장 위에 있던 순간으로부터 맨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을 그린 앨범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퍼스 바자 앨범 제목도 그렇고 캔맥주를 마시는 커버 사진까지 여름과 닿아 있다.


제이 여름에서 가을 넘어갈 때 노래를 많이 썼다. ‘Dentist’를 제외하고 거의 같은 시기에 썼다. 계절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 싶다.


여름에 담긴 뜨거움, 열기, 뭔가 부글거리는 듯한 에너지가 알게 모르게 가사 속에도 있는 것 같다.


하퍼스 바자 우리의 명곡.


제일 사랑받는 노래는 아무래도 ‘Peach Sand’나 ‘Bubblegum Disorder’인 것 같다. 근데 라이브에서는 ‘God is Love, Love is Dead’가 가장 반응이 좋은 듯하다.


제이 ‘Dentist’가 숨은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술 먹고 처음 리프를 만들었을 때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상권 아직 공개하지 않은 곡인 ‘천사를 위한 응급처치 책’. 메시지가 맘에 들었다.


현구 최근 ‘Dopamine Boulevard’로 바뀌었다. 여자친구가 좋다고 해서.(웃음)


용호 ‘선잠’. 가사와 제목, 노래의 궁합이 제일 좋은, 이미지가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노래인 것 같다.


하퍼스 바자 창작에 영향받는 것들은?


아무래도 영화이지 않을까 싶다. 1집을 만들 때는 <멍하고 혼돈스러운> <코야니스카시> <데이지즈> <영향 아래 있는 여자> <인디아 송> 등의 영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이 책과 술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벨에포크 시대 문학, 프랑스 문학, 러시아 문학 등 세계 문학 명작들, 혹은 무라카미 류와 같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거기다 술까지 들어가면 더 곡이 잘 써진다.(웃음)


상권 역시 술이 아닐까 싶다. 또한 다른 좋은 음악을 들으면 더 자극을 받아 곡을 쓰기도 하고, 유튜브 마스터클래스를 들으며 공부를 하기도 한다.


현구 S&P 500.(웃음)


용호 내가 정박을 좋아한다. EDM을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웃음) 그래서 2집 노래에선 EDM에 영향을 받은 정박 노래를 쓰고 싶다.


하퍼스 바자 무대에서 가장 잘하는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은?


제이 멤버들 간의 합을 잘 보여주는 것. 그래서 그런지 라이브를 하면서 즉석으로 편곡을 하기도 하고 그때그때 다른 라인을 치기도 한다. 어떤 곡들은 아예 앨범 버전과 라이브 버전이 다르다. 다 멤버 간의 합이 잘 맞아서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싶다.



하퍼스 바자 다시금 밴드가 주목받는 시대로 접어든 것 같다. 예전에 즐기던 신과 지금 신이 어떻게 같고 다르다고 느끼는지, 요즘 밴드 신의 특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나?


현구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음악을 접했을 때는 TV라는 대형 매체에서 인디 음악을 조명하곤 했었다.


맞다. 근데 요즘은 그런 대형 매체와 인디 신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음악적으로 보자면 그냥 유행하는 장르의 차이 정도? 내가 인디 신에 열광하던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신스 팝이나 댄서블 록이 정말 유행했는데 지금은 슈게이징이나 베드룸 팝 장르가 다수인 것 같다. 외에는 대개 같다. 지금도 여전히 재밌는 사람들이 작당모의를 하고 크루를 꾸리고 멋진 음악을 만든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존재하는 한, 인디 신은 계속 이렇게 재밌게 굴러가지 않을까 싶다. 바라건대.


하퍼스 바자 DIY 음악이 주된 시대에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밴드 활동을 한다는 것은?


제이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음악으로 돈 버는 일이 더더욱 힘들어진 시대이다. 그래서 나 포함 세 명이 현재 직장 생활 중이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어본 사람으로서 나에게 밴드는 어떤 균형을 잡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아무리 음악이 좋다고 해도 그걸 본업으로 삼게 되면 불분명한 미래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평생 살아야 하며 설령 잘될지라도 음악이 싫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나는 음악이 좋고 음악이 주는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용호 회사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촬영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의 정상성 추구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이가 꽤 찼는데 밴드를 한다는 것에 대해 아니꼽게 보는 분들이 많다. 가깝게는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밴드를 하는 일이 참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드를 하는 이유는 제이가 아까 말했듯이 음악이 주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치 있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밴드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하퍼스 바자 앞으로의 계획.


제이 2집 준비를 위해 노래를 쓸 예정이다. 목표는 10곡 정도를 채워서 앨범을 만들고 싶은데 그 이상의 곡을 만들어서 좋은 노래들을 골라 2집을 완성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또한 1집 수록곡이나 미공개 곡들을 다른 방식으로 편곡해 보는 것도 계획 중이다.


현구 우리끼리 MT를 가야 할 것 같다. 지금 몇 년째 미루고 있다.


Credit

  • 프리랜스 에디터/ 박의령
  • 사진/ 이우정
  • 헤어&메이크업/ 장하준
  • 스타일링/ 이명선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