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사람들은 반듯한 가구나 우아한 도자기를 보면서 비뚤어진 자아가 교정되는 느낌을 받는다. 시각적인 평화로움은 의외로 심리적인 안정감으로 이어지며 산란했던 머릿속을 고요하게 만들기로 해서 아스피린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어느 업계보다 소란스럽다는 패션계에서 20여 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박만현 디렉터는 집이 일과는 완전히 분리된 온전한 쉼의 공간이길 원했다. 그 어떤 트렌드도 머물지 않는 부암동 산 아래 그의 3층집이 있다.
블랙 & 화이트의 간결한 대조가 멋스러운 몬타나 팬톤 와이어 선반.
빛을 자연스럽게 투과시키는 빌라에이트의 토넷 체어.
“이 집터를 찾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어요. 그 후로 설계하고 다 짓기까지 3년이 더 걸렸으니 총 5년을 기다려서 이 집을 만났네요.” 인왕산과 북한산의 품속에 쏙 들어와 있는 그의 집에서는 기와집이 내려다보였다. 고작 서울 도심에서 10여 분 차를 타고 왔을 뿐인데 이곳은 그의 지인의 말처럼 발리 우붓처럼 느껴질 만큼 한적했다. “이제껏 살았던 집들은 제가 중심이 아니라 제가 가진 짐들이 중심인 것 같았어요. 옷과 신발 등 온갖 물건에 눌려 살았죠. 그래서 집에 있어도 100% 풀 충전이 된다는 느낌이 없었어요. 이 집으로 이사 올 땐 과감하게 많은 걸 정리하고 왔어요. 신발만 해도 1백여 켤레는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온 것 같아요. 그렇게 비우고 온전히 내가 중심이 되는 집으로 꾸미길 원했죠.”
집안 곳곳을 채운 작은 새와 불상 조형물들.
나무 간살창과 조화를 이루는 몬타나 팬톤 와이어 선반.
불멍을 가능케 하는 에코 스마트 파이어.
모든 공간이, 어떤 시간에도 쓰임을 다하고 있죠. 그러고 나니 이 집이 곧 저의 정체성이 됐습니다.
정구호 작가의 투명한 반닫이.
«바자전»에서 구매한 신선혜 작가의 사진. 무채색 위주의 1층 인테리어에 색과 빛을 더한다.
나무와 돌 같은 자연 물성의 소재가 주를 이루는 그의 집은 고아하고 침착했다. “호텔 같은 집이길 원했어요. 출장 갔을 때 호텔에 들어서면 약간은 설레면서 그 특유의 반듯한 편안함이 좋았어요. 그 느낌을 집으로 옮겨오고 싶었죠. 편안함을 느끼는 시각적인 자극이 모두 다를 텐데 저는 예전에 도쿄 아만 호텔에 갔을 때 굉장히 좋았어요. 그곳에서 ‘나의 집’에 대한 이미지를 많이 그렸던 것 같아요.” 총 3층으로 이뤄진 집은 1층에는 검은색 돌과 짙은 우드가 주를 이룬다. 거실과 응접실 사이에 단층을 두고 공간마다 흐름을 만들었다. “스타일리스트로 일할 때 컬러와 소재 매칭에 유난히 예민했어요. 집을 지을 때도 같은 석재와 우드라도 오묘하게 컬러톤을 다 다르게 했어요. 그리고 이 집 구조에는 ‘ㄱ’자나 ‘ㄴ’자 형태가 많아요. 햇빛을 최대한 담고 싶어서 일부러 창도 크게 냈죠. 사람도 식물과 마찬가지로 빛이 충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3층 욕실에도 ㄱ자로 큰 창을 내서 온전히 빛을 받을 수 있게 했어요. 저희 집에서 빛이 안 들어오는 공간은 드레스룸이 유일해요.”
동양적인 선과 색감이 현대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1층 거실 공간.
가장 현대적인 동양미를 찾는다면 이 집의 1층을 참고하면 좋겠다. 몬타나 팬톤 와이어 선반의 창살과 조화를 이루는 나무 간살창, 뱅앤올룹슨의 대형 TV와 마주하고 있는 정구호 작가의 투명한 반닫이, 검은 석조들 사이로 빛을 내는 노란 스마일 달항아리, 난로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에코 스마트 파이어까지. 현대와 전통, 서양과 동양이 섞여 만들어낸 운격이 느껴진다. 진회색빛 기와지붕의 풍경이 창을 가득 채우는 2층은 게스트 룸과 키친으로 이뤄져 있으며 1층과는 달리 온화한 우드 컬러가 주를 이룬다. 단순한 아르떼미데 톨로메오 조명과 묵직한 탠 컬러의 자노타 라마 소파 라운지 체어는 들뜨지 않게 공간 속에 스며들었다. “어렸을 땐 옷을 정말 좋아했어요. 근데 옷이란 건 아무리 좋은 소재로 만들고 관리를 잘해준다 해도 생명력에 한계가 있더라구요. 하지만 가구는 다른 것 같아요. 한번 사면 1백 년을 쓸 수 있고, 내가 죽고 나면 또 누군가에게 쓰여질 수도 있고. 그런 깊은 생명력에 매력을 느꼈죠. 집을 지으면서 인생의 기준이 좀 바뀌었어요. 가구를 비롯해 집에 들일 물건은 더 멀리 보고, 더 찬찬히 고르게 됐죠.”
송태석 작가의 노란 스마일 도자기.
서로 다른 톤이 입체적인 우드 포인트 인테리어.
아르떼미데 톨로메오 조명.
3층은 온전히 주인의 공간이다. 툇마루처럼 한 단 올려서 만든 침실과 은은하게 빛이 넘어오는 창호지 창, 멀리서도 보이는 웅장한 돌산. “이 집에서 어느 곳이 제일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답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아파트는 정형화된 공간에 나를 밀어넣는 거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레 제가 가진 물건을 채우기 위해 집을 활용했다면 이 집을 지을 땐 온전히 제 시간의 쓰임에 따라 꾸몄어요. 모든 공간이, 어떤 시간에도 쓰임을 다하고 있죠. 그러고 나니 이 집이 곧 저의 정체성이 됐습니다.” 집은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심리적 성소라고 했던가. 나를 닮은 집은 나를 온전히 담아내고, 또 나를 한없이 품어준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안온, 자고로 집이란 이런 존재여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