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전현선, 이토록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도형들
전현선은 우리가 각자의 나름을 유지한 채로 나란히 눕는다면 더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과 불, 숲과 늪, 낮과 밤, 안과 밖, 어제와 오늘, 오늘과 또 다른 오늘, 꽃과 열매. 이 일곱 개의 단어 묶음이 전현선이라는 사전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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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도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작품이 건축적인 이유가 ‘요소들의 조합’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건축도 결국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면을 넣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닮지 않았나 싶다. 나의 목표는 다양한 이미지를 가져와서 한 화면에 공존시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유화가 아닌 수채 물감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캔버스에 수채 물감이 흘러내린 자국도 이미지의 한 요소라고 여기기 때문인가? 붓질도 하나의 단위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커다란 면에 동그라미를 그린다고 치면, 그 면적을 크게 채우는 게 아니라 작은 붓으로 픽셀 단위처럼 서서히 채워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걸 여러 번 겹쳐서 색깔과 형태를 만든다. 마치 뜨개질이 그런 것처럼 완성된 전체가 축적된 시간을 보여준달까. 회화는 시간을 기록하는 작업이니까. 나는 한 번에 하나의 캔버스만 잡고 그린다. 하나 완성하면 엎어두고 그 다음 걸 시작하는 식이다. 그게 마치 타임라인처럼 하나의 흐름으로 읽혔으면 좋겠다. 명확한 스토리는 없지만 느리게 흘러가는 필름 같은 무언가로.
회화가 시간의 기록이라면, 18개월 된 아이를 둔 엄마로서의 사적인 경험은 당신의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을까? 일부러 직접적인 변화를 주고 싶진 않다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했던 작업들을 떠올리면 아이가 중심이 되고 내가 그 주변을 감싸는 느낌이랄까. 아이와 나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도형이 도형을 지키거나 도형과 도형이 서로 연대하고 의지하는 모습을 은유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 «자기 꼬리를 문 뱀»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장면들로 이루어졌다. 지금 작업 중인 그림은 관광지에 가면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날개 그림 같은 키치한 벽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 벽화들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기다리는 존재다. 쓸쓸하지만 주인공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완전해진 풍경 같은 것을 담고자 했다.

전현선, <테이블 위 사과>, 2022, Watercolor on canvas, 33.5x46cm.

전현선, <배경과 그림>, 2022, Watercolor on canvas, 61x73cm.
두 개의 평행선은 나란히 ‘누워 있는’ 모양이기도 하다. 전시 서문에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각자의 나름을 유지한 채로 나란히 누워 함께하길 바란다”고 말한 것이 유난히 뭉클하게 다가왔다. 대상이 대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누워 있는’ 상대의 옆에 나란히 누워보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다름이 사실 종이 한 장 정도의 작은 차이일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나란히 눕는다면, 우리는 더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다.
화면에 초록색이 자주 쓰인다. 당신의 초록은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색채인가? 초록색으로 그릴 때 가장 자유롭다. 실제 자연보다는 옛날 고전 동화의 숲속, 들판, 산의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았다. 캔버스를 숲속이라고 상상하면 이 안에 뭐든지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생겨날 것 같은 원초적인 즐거움을 느낀다.

«자기 꼬리를 문 뱀» 전시 전경.
모든 도형이 평등하지만 원뿔은 설사 무언가를 상징하지 않더라도 이미 상징적인 형태다. 화면에 원뿔이 등장하는 순간 원뿔은 주인공이 되고 중심이 된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도형의 형태로 비어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말하자면 원뿔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주의를 집중시키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계속 시선이 튕겨져 나오는, 그런 움직임을 만드는 존재다.
듣고 보니, 당신의 회화에서 주인공격인 ‘원뿔’이 마치 고전 동화에 으레 등장하는 성이나 침엽수의 모양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원뿔이 등장하면서부터 도형을 그림의 원동력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원뿔만이 해낼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모든 도형이 평등하지만 원뿔은 설사 무언가를 상징하지 않더라도 이미 상징적인 형태다. 화면에 원뿔이 등장하는 순간 원뿔은 주인공이 되고 중심이 된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자 중심이 도형의 형태로 비어 있다는 것이 나에게 흥미로운 지점이다. 말하자면 원뿔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주의를 집중시키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계속 시선이 튕겨져 나오는, 그런 움직임을 만드는 존재다. 프란츠 카프카의 미완성 소설 <성>을 좋아한다. 주인공 K는 성에 가야 해서 주변 마을에 도착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며칠이 지나도록 끝내 성에 당도하지 못하고 성을 바라보기만 한다. 나 역시 언제나 원뿔의 주변을 그린다. 원뿔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상상들이다.
당연하게도 폴 세잔에게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화면에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지금의 스타일은 어떻게 구축하게 되었나? 예전엔 인물을 가지고 서사적인 장면을 그렸다. 나의 의도는 인물 그 자체가 아니었지만 보는 이들 대부분이 인물에 관심을 집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물의 자리를 누구로 대체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결국 지금처럼 다양한 도형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그전까진 채도가 낮은 색을 주로 썼다면 원색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인물의 자리를 다양한 도형과 색채가 채웠다고 할 수 있다.
2018년작 <나란히 걷는 낮과 밤>의 한쪽 구석에는 벽 뒤에서 작은 망원경으로 바깥 세상을 구경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 서툴고 조심스러운 관찰 행위가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관찰을 통해 어떤 대상의 부분밖에 보지 못한다. 가끔은 그림 그리는 일이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야로 본 세상과 관계에 대한 일종의 조각보를 만드는 게 결국 인생에서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귀납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진은영 시인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두고 “나의 그림도 이런 사전과 닮아 있다”고 말한 적 있다. 당신이라는 창작자의 사전을 이루는 일곱 개의 단어를 말해달라. 두 개씩 나란히 짝을 이룬 일곱 개의 단어 묶음은 어떨까. 물과 불, 숲과 늪, 낮과 밤, 안과 밖, 어제와 오늘, 오늘과 또 다른 오늘, 꽃과 열매.

전현선, <비어 있는 그림>, 2022, Watercolor on canvas, 80.5x53cm.
손안나는 <바자>의 피처 디렉터이자 <바자 아트>의 편집장이다. 전현선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 화면에서 피어나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내 일상까지 흥미진진하게 만들 것 같다.
Credit
- 사진/ 이우정(인물,전시 전경),조현화랑 제공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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