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9월, 놓치지 말아야 할 11개의 전시들

9월 첫째 주에 더욱 부지런해져야 하는 이유. 키아프리즈 아트 위크와 함께하는 11개의 위성 전시 리스트.

프로필 by 고영진 2024.08.24
사변적 사유는 나의 힘
“급진적인 잠재력이 사변적 사유에 있다.” 사변적 사유가 자신의 중요한 매체라고 강변하는 작가가 있다. 서도호는 스스로 자신의 창작 활동을 스페큘레이션의 과정이라고 정의하며, 삶의 복합성에 접근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제시해왔다.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는 서도호가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탐구해온 시간, 사적 공간, 기억 등의 주요 테마를 사변·추론의 의미를 지닌 ‘스페큘레이션(speculation)’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재구성했다. 도시를 연결하는 건축적 상상을 표현한 ‘브리지 프로젝트’, 다이어그램·애니메이션·모형·텍스트를 활용해 다양하게 구축한 ‘스페큘레이션스’ 시리즈, 런던과 대구를 중심으로 한 공동주택 단지 영상 작업 등을 선보인다. 아트선재센터 전관에서 8월 17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도호 작품세계의 출발점과 사유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Do Ho Suh, <Secret Garden>, 2012. Mixed media, single-channel digital animation, and display case with LED lighting, 78.35 x 70.87 x 32.28 inches (with display case). ⓒ Do Ho Suh.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London and Seoul and Victoria Miro London & Venice, Photo: Jeon Taeg Su, 아트선재센터.


초현실적인 풍경의 문이 열린다
파스텔의 재발견! 오롯이 스위스 출신 화가 니콜라스 파티를 위한 찬사다. 그는 파스텔로 풍부한 생동감과 깊이감을 표현한다. 특히 미술사의 재현 전통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구상화와 대형 파스텔 벽화로 주목을 받았다. 피카소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키리코나 마그리트를 연상시키는 초현실적인 화풍으로 독창성을 확립했다. 호암미술관은 첫 동시대 작가 전시로 18세기 유럽의 파스텔화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니콜라스 파티를 선택했다. 전시장에 직접 그리는 파스텔 벽화 4점을 필두로 다수의 신작과 기존 회화, 조각까지 준비해 국내 첫 개인전(«니콜라스 파티: 더스트»)으로 손색이 없다. 자연과 문명, 인간과 비인간의 지속과 소멸을 주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호암미술관의 방향성과 잘 어울린다. 보드라운 색감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풍경에 흠뻑 몰입할 준비만 하면 된다. 9월 3일부터 내년 1월 19일까지.

Nicolas Party, <Portrait with Peaches>, 2024, Soft pastel on linen, 150×109.9cm.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호암미술관.


한땀 한땀 수놓은 이야기
한 발 다가가 보면 회화가 아니라 자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8월 초까지 열린 전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에서 북한의 자수 장인들과 협력해 완성한 작품 <나는 상처를 받았습니다>(2009-2010)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자수 프로젝트를 진행한 주인공은 함경아 작가다. 그는 2008년 말부터 단절된 북한과의 소통을 자수로 매개해왔다. 2015년 국제갤러리의 전시 «유령 발자국»에서도 장벽을 뛰어넘는 시도는 계속됐다. 함경아의 자수 회화는 화려한 색채와 미학적 완성도를 추구하면서도 이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노동과 통제불가능한 과정의 변수가 응축된 작업이다. 그의 신작을 소개하는 전시 «Phantom and a Map»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자수 회화를 다시 음미할 수 있다. 국제갤러리 K1, K3, 한옥에 걸쳐 8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진행된다.


From Kyungah Ham’s Embroidery Project. Photo: 전병철, 국제갤러리


이토록 현대적인 물의 정령들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이나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마치 사진처럼 포착하는 회화를 선보이는 윤미류 작가는 개인전 ≪Double Weave≫(2022)에서 인물들의 얼굴을 탐구한 바 있다. 파운드리 서울에서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Do Wetlands Scare You?»에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축축한 늪이다. 검푸른 늪 속에서 여성들이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모습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작가는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루살카와 빌라에서 주로 영감을 얻었다. 다양한 신화 속 캐릭터를 연구했지만 개별적 특성과 이야기에 주목하기보다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과 미스터리, 이와 상반되는 매혹적인 특성에 주목했다. 이러한 신화의 배경이자 주무대인 늪으로 새로운 서사를 창조하고 있다.

Miryu Yoon, <The Difference Was Clear to Us but You>, 2024, oil on canvas, 162.1×227.3cm. ⓒ FOUNDRY SEOUL Courtesy of the Artist and FOUNDRY SEOUL, Photo: Kyung Roh.


컬렉션의 정수, 참을 수 없는 유혹
현대미술이 생동하는 현장이 궁금하다면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전시다. 송은은 피노 컬렉션과 협력한 전시 «Portrait of a Collection: Selected Works from the Pinault Collection»을 9월 4일부터 11월 23일까지 개최한다. 2011년 «고통과 환희»를 통해 아시아 최초로 컬렉션(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을 공개한 이후, 13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 이번 전시는 2021년 피노 컬렉션이 파리의 옛 상업거래소를 새롭게 단장해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부르스 드 코메르스의 개관전 «우베르튀르(Ouverture)»에서 영감을 받았다. 피터 도이그,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 얀 보, 미리암 칸, 폴 타부레의 작품을 포함해 60여 점의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비디오, 설치, 조각, 드로잉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피노 컬렉션의 정수와 더불어 현대미술의 경향과 진화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자리다.

얀 보(Danh Vo), <UNTITLED>, 2020, 20세기 참나무와 황동 진열장, 15세기 중반 프랑스 호두나무 목조 성모자상, 청동기 시대 청동 도끼 머리, 184.3×99.2×63.7cm. ≪Avant l’orage≫ 전시 전경, 부르스 드 코메르스 - 피노 컬렉션(파리), 2023. 2. 8-9. 11. ⓒ Tadao Ando Architect & Associates, Niney et Marca Architectes, Agence Pierre-Antoine Gatier.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Photo: Heinz Peter Knes.


평범한 삶이 선사하는 신성함
인도 뉴델리에 거주하면서 작업하는 현대미술 작가 수보드 굽타는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신성하다”는 올곧은 신념을 지녔다. 스스로를 채우는 일상의 철학이 어울리는 작가는 주위의 익숙한 사물을 기념비적 형태로 변환시킨다. 인도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스틸 냄비, 헌 놋그릇, 자전거, 우유통 등 일상에서 쓰는 것을 오브제로 삼아왔다. 2014년 아라리오 갤러리 전시에서는 먹다 남은 음식이 일기장처럼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 식탁의 풍경을 재현한 회화작품을 내놓았다. 특정 사물 및 장소에 담긴 기억과 감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문제의식이 그의 철학을 지탱하는 힘이다. 굽타는 개인전 «이너 가든»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의 지하 1층과 1층, 3층에서 9월 4일부터 10월 12일까지 선보인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일상에서 발견한 오브제’를 사용한 신작과 만날 수 있다.

Subodh GUPTA, <Proust Mapping>, 2024, Aluminum, stainless steel and found objects, 195×135×24cm (Detail). ⓒ 2024. Subodh Gupta. Courtesy of the Artist and ARARIO GALLERY.


감각을 자극하는 색채
뉴욕에서 활동 중인 데릭 애덤스가 한국에서의 개인전을 위해 뷰티 매장의 쇼윈도 디스플레이에서 영감을 얻은 회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의 첫 전시는 색채 감각을 자극하는 «더 스트립»이다. 형형색색의 가발을 쓴 마네킹 두상들이 캔버스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유리창 위에 인도, 차량, 도로 등이 반사된 모습까지 더해지면서 내부와 외부 공간이 하나로 뒤섞인다. 애덤스는 팝아트의 전략을 활용해 광고나 소비상품이 일으키는 욕망을 포착한다. 궁극적으로 그의 관심사는 소비자이자 뮤즈 역할을 수행하는 흑인 여성들이다. 얼굴의 추상적 표현을 통해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들의 도시 속 삶을 실험적인 방식으로 묘사했다. 마네킹 두상과 가발로 제작한 조각 2점이 회화작품과 함께 설치될 예정이다. 애덤스와 가고시안갤러리의 첫 전시가 9월 3일부터 10월 12일까지 아모레퍼시픽 본사 APMA 캐비닛에서 진행된다.

Derrick Adams, <Where My Girls At?>, 2024, Acrylic on wood panel, in artist’s frame, 66×66cm. ⓒ Derrick Adams Studio Courtesy the artist and Gagosian


진화하는 점선면
80대 후반의 원로 작가 존 배의 예술적 여정을 돌아보는 개인전 «Shared Destinies». 2013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In Memory’s Lair» 이후 다시 진행되는 전시로 작가의 70년 작업 과정을 집약했다. 존 배의 작품은 공간 속 드로잉으로 비유될 만하다.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그의 추상 조각은 수천 개의 철 조각 또는 철사를 용접해 만든 질감 있는 판들로 구성된다.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 같은 작가의 작품은 전 과정을 혼자 진행하는 작업 방식 속에서 태어난다. 미리 완성을 상정하지 않은 채 작업을 시작하지만 공간 속에 놓인 점, 선과 대화를 이어가며 유기적인 구조로 작품을 형상화한다. 1960년대 초반 구상주의에 영향받은 강철 조각을 비롯해 연대기별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30여 점을 선별했다.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8월 28일부터 10월 20일까지 숭고한 기하학적 구도에 빠져들 수 있다.

John Pai, <Involution>, 1974, welded steel, 101.6×101.6×101.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Photo: Geoffrey Quelle.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레베카 애크로이드의 전시 ≪파티는 여성이다(Party is a Woman)≫는 시계, 터빈, 회전자, 거대한 꽃 등을 통해 나선형의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캔버스 회화와 종이 드로잉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애크로이드가 최근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인 ≪거울 단계≫에서 확장된 전시다. 그의 작품은 일상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즉 일상에서 보던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로 재조합한다. 따라서 애크로이드의 회화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거나 반대로 알 수 없는 대상과 형체를 통해 기묘한 친숙함에 빠져들게 이끈다. 상상과 환영이 맞물린 초현실적 공간이자 내면의 무의식이 잉태한 파편화된 세계로 읽히기도 한다. 9월 4일부터 10월 27일까지 페레스프로젝트에서 지적 호기심으로 세상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작가의 난해하지만 감각적인 파티에 동참해보자.

Rebecca Ackroyd, <Occupation>, 2024, Drawing - Gouache, soft pastel on Somerset satin paper, 185×145cm. 페레스프로젝트 제공.


끝나지 않은 이야기
멕시코를 대표하는 현대미술의 거장 가브리엘 오로즈코는 한때 이방인이자 유목민의 삶을 살았다. 그는 세계를 떠돌며 다양한 환경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재료를 실험했다. 예술과 일상 환경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개념미술을 추구하기도 했다. 2009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회고전을 개최할 정도로 그의 1990년대 작품들은 이미 미술계의 고전이 되었다. 다양한 매체에 왕성하게 도전해온 그의 최근 작업에선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하학적 형상의 시각적 구성이 돋보인다. 회화와 드로잉 위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는 신작이 포함되어 있다. <Diario de Plantas(식물도감)> 시리즈의 연장선으로 종이 위 나뭇잎 프린트에 과슈와 흑연이 어우러져 자연을 품고 있다. 오로즈코 개인전은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9월 4일부터 12월 14일까지 개최된다.

Gabriel Orozco, <16.IV.22 (a) #22>, 2022 , Gouache, tempera, ink and graphite on paper, 16.5×12.8cm. ⓒ Gabriel Orozco. Photo: White Cube (Gerardo Landa Rojano).


전종혁은 프리랜스 에디터다. 올가을에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전시들을 정리하다가 미술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예술에 취한 삶은 언제나 난감하다.

Credit

  • 글/ 전종혁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