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대규모 개인전 《구본창의 항해》를 앞두고 작가와 나눈 대화
45년간 이어진 그의 항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저 먼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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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1979년 돌연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독일로 떠나 사진을 접한 출발점에서부터 올해 촬영한 신작 및 미공개작과 그동안의 자료 및 수집한 오브제를 볼 수 있는 전시입니다. 2년 전 베이징 스리 섀도 포토그래피 아트센터에서 연 개인전 «오랜 배회(Lingering in Time: Koo Bohnchang’s Photography 1990~2021)»보다 훨씬 방대한 규모이죠. 쉼 없이 전시를 이어온 작가님께도 43개의 시리즈와 소장품을 추리는 과정은 색다른 시도였을 텐데요.
10여 개의 전시를 동시에 준비하는 그런 기분이에요. 예행 연습을 한 셈이고, 일 년간 계속 준비를 했는데도 시간의 압박감이 많았죠. 5백10여 개의 사진을 추렸는데도 빠진 것들이 아쉽지. 구본창 하면 백자와 비누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전의 모습을 내보여야 한다는 큐레이터의 말을 믿고 옛날 필름과 자료를 샅샅이 찾았죠. 나는 전시를 한다고 잉크젯 프린트로 전부 새로 프린트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30년 전 프린트 그때 그 느낌을 구현하고 싶었죠. 40년 전 액자를 찾아내고, 망가진 건 수리해 손보고, 인화지도 몇십 년 된 걸 닦아내고. 꼼짝없이 그 작업만 붙들었죠.
최초로 ‘구본창의 연보’를 쓰는 시도라는 전시 소개글을 읽으며, 선생님의 작업을 연대기 순으로 다시 찾아봤어요. 청년 구본창의 유학 시절과 귀국 후 세상과 자신을 향한 내면의 심리가 반영된 스냅 사진 모음인 <일분간의 독백>과 <긴 오후의 미행>은 사진 매체를 좋아하는 요즘 세대에게도 꽤 알려져 있죠. 머리카락을 잘라 콜라주한 <기억의 회로>를 처음 접하고는 그 실험성에 무척 놀랐습니다.
내 작품은 삶의 경험에 따라 바뀌어왔어요. 원체 호기심이 많아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흡수하고, 즉각 반응하고, 늘 생각이 변하죠. 풍경은 풍경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사물은 사물대로 찍어왔고. 물론 초기에는 ‘특색 없이 많은 걸 찍어서 보는 이에게 혼돈을 주지 않나?’라는 고민도 한 적 있지. 하지만 그걸 내 식대로 표현하면 그게 내 사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도 자연부터 인형, 물건까지 다양하게 표현하지만 그 사진은 모두 그의 것이죠. 평생 한 가지만 파며 깊은 세계를 이루는 작가도 있지만,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제 식대로 표현하는 작가도 있죠.
1988년 워커힐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사진 새 시좌»전에 대한 언급도 빼놓을 수 없죠. 주관적 표현을 담은 사진이 드물던 한국 사진계에 임영균, 이주용 등 사진가들을 모으고 작가이자 기획자로, ‘연출 사진(Making Photo)’이라는 영역을 제시했습니다. 한국 미술계에는 포스트모던에 대한 화두가 던져지던 시기, 사진계는 어땠을지 당시 분위기가 궁금해요.
사진을 연구하는 큐레이터도 드물었고, 사진전을 여는 화랑도 몇 없던 시기였죠. 독일에는 각 도시마다 사진 미술관과 전문 책방이 있었는데 교류할 곳이 없어 내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88올림픽을 기념하는 엽서를 만들면서 인쇄소를 드나들다 지금 SK재단의 전신인 워커힐미술관 담당자를 알게 됐어요. 루이즈 부르주아 같은 외국 거장들의 전시가 열리던 곳인데, 한국 사진계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며 기회를 달라고 말했죠. 독재정권의 시대였고, 해외도 마음대로 갈 수 없던 시기에 억눌린 감정을 <탈의기>라는 시리즈로 표현했어요. 새 날개를 단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필름에 물감을 칠하고, 스크래치도 내면서 회화적 표현을 더했지. 사이즈도 11×14 크기로 작게 인쇄하던 시기에 큰 사이즈로 인쇄하고.
일부 사진가들에게 “사진이냐, 미술이냐”라며 회의적인 질타를 받기도 했습니다.
전후의 어려운 상황을 다큐멘터리적으로 기록하는 리얼리즘 사진이 지속되던 때였는데, 사진가는 자기만의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정통 흑백사진 위주로 작업을 하던 이들이 엄청 화가 났지만, 지방에서 버스를 타고 모두가 보러 올 만큼 전시는 센세이셔널했지. 졸업전시 풍경이 바뀌었죠. 자유의 감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이들이 많았던 거예요. 이후 2000년 휴스턴에서도 10명의 한국 사진가의 전시를 기획했고, 기회만 되면 다양한 기획을 해왔습니다.



부단히 이어온 결과물들을 모은 이번 전시는 ‘모험의 여정’ ‘하나의 세계’ ‘영혼의 사원’ 등 시간의 흐름과 작업에 따라 세 가지 주제의 섹션으로 나뉩니다. 특히 애착이 가는 섹션이 있으신지요?
<백자>와 <황금> 시리즈가 놓인 마지막 방이 제일 나다운 방이 아닐까 싶어요. 초기 작업은 작가로서의 서바이벌, 한국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 자의식이 뒤섞여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지만, 작가로서 성숙해진 지금을 보여주는 곳이 그곳이니까. 전 세계 기관에 소장된 달항아리를 작업해온 <Moon Rising III> 시리즈의 12점의 달항아리 작업이 처음으로 모두 공개돼요. 빛과 어둠이 비추는 것에 따라 보름달이 되는 과정처럼 만든 시리즈를 한 번에 볼 수 있을 거예요. ‘사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만큼 40여 년간 작가 구본창이 다양한 시도를 했구나, 관람객들이 느껴주기를, 전시장에 오래 머물며 감동받길 바랍니다.
시리즈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시선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호흡을 담은 <숨>, 대영박물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기관에 속한 도공들의 도자를 촬영한 <백자>처럼 일종의 사명감에서 발현된 작업이 있는가 하면, 여행지에서 혹은 여행을 다녀왔을 때 생경한 비누 형태를 담은 <비누> 시리즈처럼 모두가 공감하는 주제가 있죠. 흔히 사진가는 피사체와 대화를 한다고 하잖아요. 전자가 딥한 토크라면 후자는 카카오톡 채팅 같은 대화 정도로 짐작되네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두 작업 모두 시간의 흔적을 살피는 과정은 같아요. 작은 대화들도 묶으면 그만의 스토리가 되니까, 비누는 여러 개를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죠. 나는 같은 작업을 계속하는 걸 지루해하는 편이에요. 비누도 매일 다른 색깔, 다른 향기를 맡고 싶지 ‘다이알’ 비누가 좋다고 해서 하나만 고집하는 스타일이 아니죠. 내가 모르는 지식, 학문이 있으면 그걸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발현돼요. 음악도 즐거운 아침에는 모차르트, 다운되는 날에는 베토벤과 바그너를 듣지.
작업실을 다녀온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모두 선생님의 ‘수집 본능’에 대해 한마디씩 덧붙이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에세이집 <공명의 시간을 담다>에서 어릴 적 내성적인 성향 탓에 사금파리 조각을 모으며 ‘작고 조용한 존재에 말을 걸고 귀 기울이는 행위’를 하고 시간을 보냈다고 하셨죠. 이번 전시에서도 자료와 오브제를 선보입니다.
얼마 전 에드워드 호퍼 전시의 마지막 섹션을 보면서, “나도 다 모았는데” 싶었죠. 83년 로마행 기차표와 비행기 티켓도 있고.(웃음) 컬렉터처럼 귀하거나 값비싼 것을 모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겐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이는 것도 내게 의미 있는 것을 버리질 못해요. 버리는 게 너무 안타깝고, 죄악 같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물건들을 마주할 때 조금만 노력해 내 걸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노력을 기울여요. 그걸 가져와 사진기로 담으려는 욕구 때문에,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포착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나는 사진가가 된 거겠지. 한번은 마라케시의 기념품 가게에 햇빛을 가리는 천막이 있는 거예요. 갖고 싶다고 말하니 영어를 못 알아들어, 자꾸 가리키다 2백 불인가를 주고 샀지. 비와 햇빛에 삭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묘한 하늘색이 되어버린 걸 지나칠 수 없었죠. 시간이 담긴 물건이 주는 장면이 나한테는 강렬한 하나의 기운으로 와닿을 때가 있어요. 거장의 작품을 봤을 때 작가의 인고, 노력과 시간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과 같죠.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다이앤 아버스의 말을 인용하며 “사진이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게 해주는, 도덕적 한계와 사회적 금기를 넘나들게 해주는 여권”이라고 말한 바 있어요. 어쩐지 저는 <익명자> 시리즈에서 코펜하겐의 유리창에 비친 선생님의 그림자 실루엣을 보며 그 말이 떠올랐어요. 자유라는 감각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익명자가 되는 게 제일 편해요. 낯선 도시에 낯선 눈으로 관찰하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이 시리즈를 어떻게 선보일지 고심 중이라 큐레이터에게 시간을 달라 하고, 끝까지 붙들고 있죠. 내가 계속해서 익명자로 살고 싶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이 테마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 같아.
※ «구본창의 항해»는 12월 14일부터 2024년 3월 1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2층에서 열린다.

후배 사진가 표기식이 망가진 카드 리더기를 활용한 <에러>시리즈의 일환으로 담은, 구본창의 작업실 풍경. 두 사진가는 필름 현상 과정에서 빛을 먹이는 ‘솔라리제이션’ 작업과 리더기가 만든 에러 사이의 우연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 전시에서 구본창 작가는 1989년 그룹전에서 단 한번 공개한 이후 최초로 솔라리제이션 기법을 적용한 <무제> 전작을 선보인다.
안서경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10년 뒤쯤 <태초에>, <숨> 시리즈 같은 구본창의 사진에서 지금은 볼 수 없던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 짐작하지 못한다.
Credit
- 글/ 안서경
- 사진/ 표기식, 구본창(<화이트>, <익명자>)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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