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하가 감각한 도시의 풍경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박민하가 감각한 도시의 풍경

프리즈 뉴욕에서 솔로 부스를 선보일 박민하 작가를 작업실에서 만났다.

BAZAAR BY BAZAAR 2023.04.30
어떤 그림은 장면보다 감각을 먼저 소환한다. 내가 있는 곳의 모양과 빛의 색. 내면에 각인된 순간의 풍경을 담는 박민하의 회화는 보는 이의 시선을 너머 기억과 감각에 가닿는다. 5월, 프리즈 뉴욕에서 솔로 부스를 선보일 작가를 작업실에서 만났다. 
 
재킷, 팬츠는 Jaden Cho.

재킷, 팬츠는 Jaden Cho.

 
프리즈 뉴욕에서 신작을 공개할 예정이다. 유년시절을 보내고, 미술 전공 학생으로 지낸 도시에 작가로서 방문하는 소감이 궁금하다.
무딘 편이라 별생각 없이 지내다 막상 닥치니 다시 데뷔하는 느낌이다. 대학원 졸업 이후 11년 만에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뉴욕에 가니 걱정도 되고, 신나기도 하고 감회가 새롭다. 현지에서 작가로 탄탄하게 입지를 잡은 친구들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는데, 싶어 긴장도 되고.(웃음)
2019년 〈바자 아트〉 ‘예술가의 작업실’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당신의 스승 마이클 골드버그의 스튜디오도 방문할 계획인가?
선생님의 아내였던 린 움라프(Lynn Umlauf) 작가가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찾아 뵙지 못해 가볼까 한다. 마크 로스코가 쓰던 스튜디오를 선생님이 이어받아 쓰시던 작업실이었는데, 어시스턴트 생활을 하며 그곳에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항상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지난겨울 휘슬에서 열린 개인전 «Tunnels»에 대한 호평을 여러 SNS 계정과 매체에서 볼 수 있었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시간성을 내포한 공간인 터널, 그리고 헤드라이트와 섬광처럼 반짝이는 빛을 캔버스에 옮긴 점이 인상적이었다. 프리즈 뉴욕을 위한 신작 역시 이 전시의 연장선일까?
어떤 순간이 감각될 때, 그때 머릿속의 풍경을 기호화해서 가장 최소한의 설명으로 재현할 수 있을지 실험하는 것이 내 작업이다. 주로 네모 같은 도형과 선적인 요소를 쓰는 것도, 내가 얼마만큼 시각언어를 최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인 것이다. 지난 전시는 운전 중 남산터널을 통과하며 포착한 순간을 그렸다. 터널에 들어가기 직전, 이걸 통과하면 미래가 보인다는 개념이 와닿았고, 계속 탐구하고 있는 주제다. 신작들은 지난 전시의 연장선은 아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말로 ‘굴다리’, 영어로는 ‘Underpass’라는 시리즈다. 경리단길에서 내려가는 길목, 용산구청에서 신용산역으로 이어진 차도 등 매일 내가 지나치는 장소를 담았다. 그래서 작품명에 ‘갈월’, ‘이태원’처럼 지역명을 붙였다.
모두 이 작업실이 자리한 해방촌 인근 지역이다.
풍경 추상을 그리기에 지금 내가 있는 곳을 그리는 게 맞지, 숲이나 자연을 그리는 건 자연스럽지 않다. 내 작업은 추상이지만 항상 시간과 장소가 명확하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고 소스를 가져오는지 정확한 편인데, 예를 들어 2020년 개인전 «Peculiar Weather - 은빛 공기»는 서울의 봄에 맞닥뜨리는 황사와 과거 산업혁명 시기, 런던의 스모그에 대한 자료를 중첩해 작업한 것이다.  
용산구의 색은 어떻게 해석했나?
도시의 색을 표현하는 것은 심플하다. 공기가 깨끗한 날, 좋지 않은 날처럼 날마다 변화하는 색을 어떻게 하나의 색으로 응축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감정, 그날 듣는 노래 등 내면의 요소도 반영하려 한다. 신용산 풍경의 경우, 용산역 전자상가에서 아모레퍼시픽 사옥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내게는 늘 파랗게 느껴진다. 마냥 예쁜 색은 아니다. 그래서 붓을 쓸 때 의도적으로 조금 더 러프하게 표현하려 하고, 은색 광택이 있는 미라발 페인트 또한 큰 입자를 썼다. 사진으로 찍으면 더욱 자글자글하게 나온다.
과거 «Sun Gone» 전시 당시, 한 인터뷰에서 “밝은색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게 꼭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세균이 몸에 닿았을 때 피부를 핑크색으로 표현한 점이 기억에 남는다. 원하는 색을 위해 물감을 배합할 때 어떤 노하우가 있나?
엄마들에게 김장 노하우를 물으면 “몰라,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터득하는 자기만의 비법이 생긴다. 물감을 만드는 과정은 요리와 비슷하다. 유화는 맨 위에 올라가는 물감이 기름 분포도가 제일 높아야 한다. 캔버스에 올렸을 때 투명도와 물감 두께가 어떨지 예측하면서 기름, 왁스, 안료를 배합하는 과정을 따른다. 매일 반복하다 보니, 처음보다 얇고, 매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촬영이 이루어진 가벽 앞에 다양한 색으로 변주된 비교적 작은 크기의 작품 8점이 걸려 있었다. 그 작품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제목은 〈토치(Torch)〉, 담배를 뜻한다. 점심 시간쯤 충무로와 을지로에 가면 높은 빌딩 사이로 흡연을 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담배를 피운다. 내게는 무척 인상 깊은 서울의 모습 중 하나여서, 그 생각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은 담배의 모양과 불꽃의 모습을 담으며 언어에 비유하자면 ‘단어를 구사하는’ 단계라면, 나아가 군중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는 풍경까지 형상화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Underpass, Sinyongsan〉, 140x158cm, Acrylic, vinyl paint, spray paint, oil, wax and MIRAVAL® on canvas, 2023.

〈Underpass, Sinyongsan〉, 140x158cm, Acrylic, vinyl paint, spray paint, oil, wax and MIRAVAL® on canvas, 2023.

 
 〈A Square〉, 25.5x20.5cm, Vinyl paint, oil, wax and MIRAVAL® on canvas, 2023.

〈A Square〉, 25.5x20.5cm, Vinyl paint, oil, wax and MIRAVAL® on canvas, 2023.

 
2m가 훌쩍 넘는 대형 캔버스도 당신의 작업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대작을 그릴 때 고려해야 할 특징은 무엇인가?
항상 큰 작업을 해왔는데, 붓질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사진에서 기반을 잡거나, 컴퓨터로 초안을 잡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냥 캔버스에서 바로 시작하기도 한다. 하나의 구상이 완료되면 일일이 크기를 잰 다음 여러 캔버스에 복제한다. 보통 바닥에 커다란 캔버스를 적어도 4~8개를 깔아두고, 동시다발적으로 작업한다.
체력 소모가 심하지 않나?
구상이 정해지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사실 너무 재밌어서 힘들지 않다. 다만 밑칠을 할 때 은색 아크릴을 활용해 20번 이상 말리고 칠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그 과정이 무척 고되다.
요즘은 에어브러시 같은 도구를 활용해 작업하는 화가들도 많은데, 오직 붓질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듯하게 재단된 도형 옆에 휘두른 붓질의 흔적이 캔버스에 남아있는 것 또한 특징이다.
에어브러시는 나보다 다음 세대의 화가들이 더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스크린을 통해 이미지를 접하고, 맨질맨질하고 매끈한 느낌을 많이 보고 자란 세대. 나는 거친 물질의 느낌이 보이는 게 좋다. 색을 채울 때 테이핑을 이용하는데, 그래도 스며드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그냥 남겨두기도 한다. 완전 스트릭트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게 아니기에.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작업할 때 가시적으로 100% 완벽을 추구하는 건 오히려 작가의 상태가 불안하거나 온전치 않을 때 그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밀인데, 보기보다 내 작품은 지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웃음)
어린 시절 스크린을 보기보다는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편인가? 주로 영향받은 문화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나는 유니텔, 천리안처럼 초창기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시대의 사람이다.(웃음) 음악을 좋아해 ‘펑크 공화국’ ‘사이버 락 스페이스’ 등의 동호회에 심취해 있었는데, 정모를 하려면 실제로 만나야 했다. 학생 때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다가 갑자기 회화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는데, 그전까지 오케스트라 연습이 끝나면 바이올린을 메고 매일 홍대에 갔다. ‘모시핏’이라고, 공연장에서 과격할 정도로 몸을 던지며 음악을 듣는 문화도 무척 즐겼다. 지금도 밴드를 하는 친구들과 연락하며 지낸다. 그래서인지 내겐 실질적으로 보이는 것, 만져지는 감각이 중요한 주제 같다.
당신의 작품은 일상적 풍경에서 빛을 포착하는 점이 1960년대 미국 남부에서 ‘빛과 공간’ 운동을 따른 작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말리부 해안가 고속도로에서 빛에 매료된 작가 메리코스처럼 지나치는 길가의 빛을 포착한 점도 닮아있다. 영향을 받은 작가를 꼽아본다면?
메리코스, 너무 좋아한다! (책이 수백 권 놓인 책장에서 여러 권의 책을 꺼내며) 그래도 내게는 다음 네 명의 작가를 빼놓을 수 없다.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작가 존 디볼라는 바다가 보이는 폐공간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공간을 꾸민 다음, 그 장면을 촬영한다. 〈주마(Zuma)〉라는 시리즈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가 시간과 장소를 점유하는 방식에 크게 영향 받았다. 또, 내가 예일대 대학원에 입학한 이유는 온전히 학장이었던 피터 핼리에게 배우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 건물의 네모난 창 같이 도시를 셀을 통해 바라보고 추상화를 그리는데, 내 작업과 닮아있다. 그리고 대학 때부터 좋아한 작가인 메리 헤일만. 몇 해 전 뉴뮤지엄 전시 오프닝 날 온갖 뉴욕의 젊은 아티스트는 모두 모였을 정도로, 할머니가 되어도 쿨한 태도와 동시대적인 감각이 매력적인 화가다. 마지막으로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토마스 노즈코브스키는, 평생 같은 사이즈의 그림을 그렸는데 보잘것없는 사물이나 순간도, 자신에겐 스펙터큘러한 장면으로 만들 수 있는 점에서 내 시야를 바꾼 예술가다. 나는 예술 학교에서 입시를 한 것도 아니고, 스킬이 없는 상태에서 그림을 늦게 시작한 편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세밀히 묘사하는 게 내 예술적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만의 언어를 갖는 건 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여기고 다양한 예술가에게 영감받으며, 어떻게 내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회화의 속성 중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중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좋다. 조각 같은 다른 매체와 비교했을 때, 작은 면적에 가장 많은 걸 담아낼 수 있는 매체여서 매력적이다. 회화는 한 면을 한눈에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시간과 내용이 응축되어 있다. 수많은 화가들의 행보가 있었기에 지금의 회화가 가능하다는 점도.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찰나〉라는 시리즈를 작업 중인데, 1백 개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찰나 0.01초’에서 ‘찰나 1초’가 될 때까지 만들고자 하는데 지금 20개를 그렸다. 머지않아 한 장소에서 이 시리즈를 공개하는 게 꿈이다.
 
안서경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캔버스 위의 자유분방한 붓질의 흔적을 감상하는 것을 즐기지만, 박민하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덜어내는 행위에 몰입하는 작가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왁스와 오일, 미라발 페인트를 섞어 특유의 은은히 빛을 발하는 은빛 물감을 만든다.

왁스와 오일, 미라발 페인트를 섞어 특유의 은은히 빛을 발하는 은빛 물감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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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안서경
    사진/ 김형상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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