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작업실이 궁금해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예술가의 작업실은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하는 모호한 장소이자 작가의 정체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지금 추상과 구상, 설치의 세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을 그들의 비밀스러운 아틀리에에서 탐구했다. | 원앤제이 갤러리,갤러리 현대,김성윤,양정욱,박민하

박민하 박민하는 풍경을 구성하는 요소를 소재로 감각적인 추상화를 그린다. 장면의 직관적인 재현 대신 소리, 공기, 빛이 몸의 감각을 건드릴 때 일어나는 자극, 변화에 관심을 두고 그때 느끼는 감정의 흔적을 표현하는 작업을 한다. 단순한 색, 비구체적인 선과 면, 무심한 붓질과 몰입으로 완성한 추상화로 서울, 미국, 홍콩 등에서 전시를 열며 주목받고 있다. 해방촌의 공장과 창고를 개조한 작업실. 그리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가구와 도구만 두었다. 작업실의 구조와 환경이 독특하다. 원래 어떤 공간이었나?  한쪽은 냉동창고, 한쪽은 지하 공장 직원의 숙식 공간이었다. 벽을 뜯고, 새 벽을 만들고, 벽돌을 붙이고 창문을 끼우는 등 대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됐다.   그림을 그릴 때 “명상하는 기분으로 물감을 섞어 색을 만들고 깊게 몰입한 상태에서 붓질을 한다”고 했다. 공간을 유지하는 방식이 작업 과정과 연관이 있나?  작품을 구상하거나 색을 만들 때 시야에 뭔가가 걸리면 방해가 되긴 한다. 다 치우고 앉아 있다가도 어떤 게 자꾸 눈에 밟히면 치우고 정리하고 안 보이는 데에 넣어두는 식이다.   자연과 풍경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뭔가? 내가 다루는 자연이나 풍경은 ‘Nature’의 개념이 아니다. 직관적으로 보이는 풍경이나 장면, 자연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때의 감정, 상황, 현상 등을 나의 감정이나 시선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노을’이라는 풍경을 휴대폰 액정 화면 같은 매개, 혹은 어떤 필터를 거쳐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L.A에서 작업했을 땐 그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햇빛의 색, 온도가 피부에 닿았을 때 나타나는 색을 그렸다. 신체에 닿는 감각 빛, 공기, 소리, 입자가 만나서 생기는 풍경, 변화와 상태, 미묘한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관심사이자 주제다.   박민하의 ‘색’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다. 작품, 전시, 평론, 예전 인터뷰 등마다 이상의 수필 <권태> 속 문장 -“이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하략)”- 이 수식어처럼 따라붙는다. 왜 <권태>인가? 캔버스를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마주할 때 <권태>는 실마리가 된다. 풍경은 마냥 아름다운 것일까? 우리가 감탄하는 저 자연의 색이 실은 조물주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것은 아닐까? 그 안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한 게 아니라 그냥 무료한 것은 아닐까? 나의 작품은 이런 질문에 대한 고민과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이 공간이 그런 작품, 작업 방식,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가?  내게 작업실은 그냥 프랙티컬(Practical)한 공간이다. 실용적인 목적에 부합하면 그만일 뿐이다.   쓰임새는 중요한 요건이지만 그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갖는 작업실도 분명히 있다. 그런 아틀리에에 대한 기억이나 혹은 욕망은 없나?  뉴욕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반 동안 일했던 작업실이 내겐 그런 공간이다. ‘222 바우어리’로 불리는 옛 YMCA 건물인데 예술가의 메카로 유명하다. 앤디 워홀, 마크 로스코, 페르낭 레제 같은 전설적인 아티스트들이 이곳을 거쳐간 것으로 알고 있다. 나의 선생님이었던 마이클 골드버그와 그의 부인 린 움라우프의 공간은 원래 마크 로스코가 썼던 스튜디오다. 두 분은 그곳에서 작업과 생활을 동시에 했다.   물감과 붓, 캔버스만이 작업실의 재료는 아니다. 작품 바깥의 흔적들. 그 장소의 ‘풍경’을 좀 더 상세히 묘사해줄 수 있나?  마크 로스코, 마이클 골드버그의 작업실이라니. 층고가 일반 집의 3층 정도 높이로 시원하게 뚫려 있다. 아마 체육관으로 쓰인 공간이었을 것 같다. 2층 가운데에 개방된 구조의 부부 침실과 발코니 창고가 있고 그 양 옆으로 마이클 골드버그와 린 움라우프의 작업실이 자리했다. 아래로 내려오면 서재, 응접실 같은 공용 공간을 만난다. 1800년대 후반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의 낡은 나무 바닥, 여기저기 물감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흔적, 천장 가까이에 난 특이한 창문 같은 것이 꽤 멋졌다. 확실히 독특하고 에너지가 있는 공간이었다   이 스튜디오가 ‘그림만 그리는 공간’이라면 작업의 주제에 닿기 위해, 즉 ‘풍경’과 마주하기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길게 떠난다. 가면 3개월 정도 머무는 편이다. 마냥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작업실을 빌려 아침 10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습관을 지킨다. 장소가 가진 새로운 풍경보다는 그곳에서 내가 발견하고 느끼는 감각에서 영감을 받는다.       양정욱 양정욱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일상을 긴밀히 관찰한다.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 평범하고 소소한 삶이 관찰의 대상이다. 그 이야기를 나무, 실, 금속 등의 재료가 갖는 물성, 심상과 연결하면서 하나의 구조물로 시각화하는 설치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시화의 공장 지대 한복판에 위치한 양정욱 작가의 작업실. 처음 들어섰을 때 예술가의 작업실이라기보단 기능적인 면에 매우 충실한 철공소 같았다. 예상과 다른 풍경이 인상적이다.  작가의 작업실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는 건 안다. 레지던시 스튜디오에 거주했을 때 일 년에 한 번 ‘오픈 스튜디오’ 행사를 했었다. 그때 최대한 미치광이 과학자 같은 느낌이랄까, 조금 너저분하고 산만한, 뭔가 있어 보이는 연출을 해놓기도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게 있고 그거에 맞춰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사실 여긴 오로지 작업, 일만 하는 공간이다. 아이디어, 영감, 구상은 밖에서 이뤄진다. 작업실이 “와,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느긋이 커피 마시고, 웹서핑도 좀 하고, 빈둥대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구상이나 해볼까?” 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작업실의 임대료가 월 2백만원 정도다. 몇 시간 동안 멍 때리거나 음악만 듣다 가는 건 ‘곤란한’ 정도의 비용이 발생한다. 성실히, 오로지 일만 하되,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는 곳. 그게 작업실에 대한 나의 정의다.   작품을 만들 때 고수하는 규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눈앞에 다 펼쳐지는 걸 좋아한다. 모든 게 전부 눈에 띄고, 내 눈이 그걸 익히길 바란다. 작업 중에 청소를 안 하는 이유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 생활 쓰레기, 아무렇게나 뜯은 겉포장지가 어딘가에 나뒹구는 모양 자체도 내 흔적이기 때문에, 그게 자꾸 눈에 들어오면 작업도 그런 식으로 풀어나가게 된다. 쉽게 말해 내 습관이 공간과 작업에 투영되기 때문에 내가 쓰레기를 세로로 쌓아놨으면 작업도 세로로 쌓게 된다는 뜻이다. 작품을 만들다가 공간을 둘러보면, 이게 어디서 시작됐고 어느 공간에서 주로 이뤄졌는지 다 보인다. 작업실은 너저분한데 작품은 칼같이 단정하고 반짝거릴 수 있을까? 공간의 습관과 동떨어진 작품은 없다.   재료의 물성과 움직임으로 메시지를 만들기 위해선 치밀한 설계와 구상이 필요하다. 메모에 남은 고민의 흔적들. 사람들은 괴짜 과학자의 발명품 같은 작품들의 움직임, 그러니까 ‘기술’에 좀 더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이 신기한 ‘기계’는 뭐지?  저 벽에 붙은 도면 같은 걸 보면 마치 공학자나 건축가의 설계도를 보는 것 같다. 내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가장 낮은 수준의 기술이다. 밀고, 당기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단순한 움직임들. 그 과정을 추적하고 반복시켜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든다. 다만 기계는 그 움직임을 정확한 로직으로 만들어내지만 나는 변화, 중첩, 반복 같은 작동을 통해 회화적으로 표현한다. 내 작품에서 기술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다음 작업실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들었다. 어떤 공간인가?  대림 창고에 작품이 하나 있다. 대형 미술관에선 대중의 피드백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 여기에선 엄청난 분량의 반응을 접했다. 부담 없이 접근하고 살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 작품을 이렇게 읽는구나,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 집중하는구나, 같은 반응이 내겐 중요하다. 난 이렇게 읽혀지길 바라는데 사람들이 안 읽는다면, 읽기 쉽게 내놔야 하니까. 그런 반응을 빨리, 많이, 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 작업실과 쇼룸, 카페 등이 모인 복합 공간을 기획하고 있다.     김성윤  김성윤은 추상화와 디지털 이미지가 넘치는 시대에 전통적이며 고전적인 구상회화를 그린다. 19세기 부유층의 초상화를 제작했던 인물화가 존 싱어 사전트의 기법을 인용해 근대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의 인물화를 표현한 ‘Authentic’, 젊은 작가의 과도기적 단절과 회화 작가로서의 고찰을 표현한 ‘Dead Man’ 시리즈를 거쳐 최근 16세기 에두아르 마네, 17세기 얀 브뤼헐, 얀 반 휘섬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꽃 정물화 ‘Arrangement’를 선보였다. 유려한 화법과 독창적인 시선, 실험적인 회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음 전시를 위한 작품을 준비 중인 김성윤 작가. 갤러리 퍼플 레지던시에 입주해 있다. ‘레지던시 스튜디오’라는 공간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이곳은 벤타 코리아가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작가들에게 창작 공간, 전시 기획 등을 후원하는 공간이다. 2015년부터 4년째 여기에서 작업하고 있다. 이전에 다른 레지던시 프로그램, 개인 스튜디오에서 작업했을 때와 달리 관심사를 자연스럽게 확장할 수 있어 좋다. 사실 회화에만 관심을 두는 편이라 이전엔 다른 분야, 매체를 잘 살피지 않았는데 여기에 와서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과 교류하고 있다. 최근 ‘Arrangement’ 시리즈에서 도자 작업을 하는 유의정 작가와 협업할 수 있었던 건 이런 환경 덕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물건이 별로 없다. 보통 자기 공간에 서재나 좋아하는 물건, 오브제, 기념할 만한 물건 같은 것들로 꾸미는 경우가 많은데.  처음엔 짐이 많았다. 책, 물건을 거의 다 가져다 놓았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신경 쓰이더라. 그래서 다 치우고, 작업에 필요한 것만 두고 있다. 공간의 모습은 작업 방식에서 연유한다. 어떤 작업을 할 때, 그 작업과 관련된 것들이 어지럽혀져 있는 상태에서 집중이 더 잘 된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그런 느낌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 머릿속, 공간을 다 비우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그럼 싹 치운다. 예를 들어 꽃을 그릴 때 뭘 그릴 건지 마음먹기까지 필요한 다양한 선 작업들, 책을 읽거나 자료를 찾거나 꽃을 사다가 여기저기 꽂거나 하는 과정을 거친다. 준비 기간 동안 바닥에, 벽에, 컴퓨터 바탕 화면이 모두 꽃으로 도배된다. 보이는 게 온통 그런 장면이면 없던 것도 생길 것 같은 기대감이 들어 좋다.   지금 이 작업실에서 보이는 장면엔 여전히 꽃이 많다. 양동이에 꽂힌 다발들, 그리다 만 꽃, 원예 도서들. 왜 꽃인가?  예쁘니까. 자연물 중 새와 꽃을 좋아한다. 아내와 연애할 때도 꽃을 많이 선물했다. 이 사람과 결혼은 하고 싶고, 비싸고 좋은 선물을 주기엔 여의치 않고. 그럴 때 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어떤 브랜드의 제품은 값이 분명하지만 꽃은 농수산물이라 정가가 없다. 농협 공판장이나 시장 같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자연의 산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다. 내 작품이나 전시가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꽃을 사는 경험, 그걸 사서 꽂고,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감상하는 경험에 대한 욕구를 유발했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꽃을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생화와 빈티지한 유리병. 작업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작품의 소재들. 그리기까지?  사는 건 좀 더 능동적인 행위다. 사실 꽃 한 송이 사는 게 쉬운 일 같아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긴 어렵지 않나. 꽃을 사서 화병에 꽂고 그걸 그리다 보면 꽃의 색이나 질감, 모양, 냄새, 감도 등의 요소를 뜯어 살피게 되고 그 대상이 얼마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보편적인 대상일수록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 가치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여길 수 있는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일이 나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실 바깥의 작업실은 어디인가?  꽃을 그리는 지금은 화훼 공판장.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특히 거칠고 투박한 아저씨들이 꽃 무더기를 대충 집어 들어서 팍팍 잘라 아무렇게나 부려놓은 것 같은데 막상 보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꽃꽂이가 된다. 그런 걸 보는 게 즐겁고, 아이디어나 영감도 떠오른다.   다음 꽃은 언제, 어디에서 볼 수 있나?  이전 작업에선 도자 작업을 하는 유의정 작가가 기존에 만들었던 화병에 내가 꽃을 꽂고 그걸 그렸었는데, 이번엔 시작부터 함께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도자의 형태에 코카콜라라는 현대적인 기호를 섞은 청자를 만들고 나는 거기에 꽃을 배열한 후 그걸 회화로 표현하는 협업이다. 9월 말에 갤러리 퍼플에서 선보인 정기적으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계획도 있다. 이 작업 공간 덕분에 같이 할 때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기는 동료를 만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