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 부허,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 크로이츠링겐 벨뷰요양원, 1988, 거즈, 부레풀, 라텍스, 360x525x525cm.
아트선재센터 2층 1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스크린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화면 속 여성은 고풍스러운 저택의 출입구로 보이는 곳에서 얇고 얼룩진 천막 같은 것을 떼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필승의 줄다리기에 임하는 듯 낑낑거리지만 진척이 더디다. 이 여성은 1970~80년대 스위스 취리히에서 조각을 기반으로 드로잉,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활발하게 활동한 하이디 부허(Heidi Bucher)이고, 그녀가 표면을 뜯어내고 있는 듯한 장소는 스위스 빈터투어에 있는 19세기 저택이다. 그 집은 하이디 부허의 부모님을 비롯해 선조들이 몇 세대에 걸쳐 살아온 장소다.
작가가 이 작품을 제작한 1978년 당시 스위스 가정의 생활공간은 성별에 따라 명확하게 나뉘어 있었다. 서재는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의 공간이고, 부엌은 살림을 돌보는 아내의 공간이었다. 부허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족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집의 공간과 사물을 ‘스키닝(skinning)’했는데, 특히 아버지의 서재를 다룬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1978)은 그 작업 과정을 14분짜리 16mm 필름으로 남겼다.(이번 전시의 강렬한 포스터는 바로 이 작품의 스틸 컷이다.)
작가가 고안한 ‘스키닝’은 기존 공간과 사물에 거즈 천과 라텍스를 이용하여 새로운 표면, 즉 ‘피부’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떼어내는 부허만의 독창적인 조형언어이자 행위예술이다. 이번 전시를 만든 문지윤 프로젝트 디렉터는 스키닝이라는 하이디 부허만의 방법론에 관해 설명하며 영상작품으로 전시를 시작한 이유를 밝혔다. “하이디 부허는 구도, 의상 등을 미리 설계해서 작업 과정을 영상작품으로 남겼어요. 부허의 작품 세계에서 영상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기에 화질이 썩 좋지 않음에도 조각과 병치했습니다. 화면 속에서 작가는 건축 면에 접착제 바른 거즈 천을 덮고 액상 라텍스를 발라 말린 뒤 굳어지면 이를 벗겨냅니다. 부허는 스키닝 기법 설치 작업을 ‘피부를 생성하는 행위’로 명명했어요. 작가에게 ‘피부’란 세계와 만나는 인터페이스로서 한 사람의 기쁨과 고통, 행복과 불편함을 담고 있는 기억의 감각적 창고였어요. 피부를 생성하고 떼어내 조각으로 제시하는 부허의 이러한 행위는 공간에 내재한 딱딱하고 억압적인 사회 질서를 부드러운 것, 움직이는 것, 유동적인 것으로 변신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죠. 이때 자신의 무게를 실어서 씨름하는 순간들이 생생하게 기록된 영상을 보면서 그 모습 자체로 저항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이디 부허, 〈안나 만하이머와 타겟〉, 1975, 텍스타일, 라텍스, 종이, 자개 안료, 213x200x3cm.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6월 말까지 계속되는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는 2004년 스위스, 2013년 파리, 2021~22년 독일에서 열린 전시 이후 아시아에서 마련된 첫 회고전이다. 아트선재센터 김선정 관장이 독일 뮌헨에 있는 현대미술관 하우스데쿤스트에서 «Heidi Bucher. Metamorphoses»를 본 것이 계기가 됐다. “관장님은 충격적이었다고 하셨어요. ‘이렇게 훌륭한 작가를 모르고 있었다니!’ 하이디 부허는 현대미술사에서 간과되거나 조명이 필요한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플랫폼을 제공하고자 하는 아트선재센터의 미션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작가였죠.” 문지윤 디렉터의 말대로 아트선재센터는 1998년 이불 개인전을 비롯해 정서영, 양혜규 등을 작품 활동 초기에 소개한 곳이다.
이번 전시는 1970~80년대 제작된 하이디 부허의 주요 작품 뿐만 아니라 초기 드로잉 및 실크 콜라주 작업, 작가 관련 영상기록 및 다큐멘터리 등, 1백3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전시는 연대기적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작품 전체를 ‘공간’과 ‘몸’으로 구분하여 부허의 작품 세계를 재구성해 선보인다.
전시실 중앙에는 가로세로 5m가 넘는 스키닝 작품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1988)이 바닥에서 들어 올려진 채로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원래는 뽀얗게 보였던 이 작품은 세월에 따라 메이플 시럽처럼 색상과 채도가 변했는데 균일하지 않아 다소 괴기스러운 느낌을 준다. 진찰실은 스위스 크로이츠링엔의 벨뷰요양원에 있던 곳으로, 1988년 작가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주인 없이 버려진 상태였다. 스위스 정신의학자 루트비히 빈스방거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활동했으며 벨뷰요양원은 빈스방거 가문이 4대에 걸쳐 운영한 시설이었다. 이 진찰실에서 프로이트는 ‘안나 O.’라는 환자를 치료해 <히스테리아 연구>(1895)를 출간했다. 〈꿈의 해석〉(1900)과 더불어 프로이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책은 이후 서구 지성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히스테리아’라는 진단명은 그리스어로 ‘자궁’을 의미합니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히스테리아는 여성들만 걸리는 질병이라는 편견과 혐오가 내포된 단어였어요. 물론 빈스방거와 프로이트는 이를 믿지 않았지만 여전히 히스테리를 여성의 성적 에너지와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혐오하는 것과 상응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당시 남성 전문의에 의해 잘못 진단된 여성 환자들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요양시설로 보내졌고, ‘안나 O.’라는 환자명으로 책에 등장했던 베르타 파펜하임은 훗날 여성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은 문 손잡이는 물론 창문틀, 라디에이터까지 그대로 새겨진 일종의 네거티브 표면으로 시각과 촉각을 동원해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마치 무의식에 새겨진 이야기들을 표면으로 끄집어내는 정신분석처럼 하이디 부허는 이 공간이 지닌 역사를 표면으로 새겨내 조각으로 제시합니다.”
하퍼스 바자 독일 창간호(1969년 1월호) 표지에 소개된 〈랜딩스 투 웨어〉. Courtesy of The Estate of Heidi Bucher
이번 전시의 2부에 해당하는 ‘몸’ 파트는 〈잠자리의 욕망〉(1976)을 입고 포즈를 취한 하이디 부허의 사진과 그 옆에 걸린 조각으로 시작한다.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에게 거미라는 상징이 있었다면 하이디 부허에게는 잠자리가 있었습니다. 마치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날아가듯이 부허에게 변신이란 위계적인 사회적 조건에서 분리되어 해방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였으며 이것을 잠자리라는 상징을 통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조각가인 남편 칼 부허와 함께 뉴욕,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이혼 후 취리히로 돌아온 시기에 제작되었다. 1971년이 돼서야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을 만큼 가부장적인 사회였던 당시 스위스에서 부허는 정육점 지하 공간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자신만의 조각 언어를 새롭게 펼쳐나갔다. 1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소프트 오브젝트〉가 그 시작점에 있는 연작이다. 어머니, 할머니 등이 사용했던 앞치마, 코르셋, 침구류 등을 액상 라텍스에 담그고 ‘움직임’을 상징하는 자개 안료를 더한 부조 작품들은 여성의 시간과 기억을 콜라주한 아름다운 형상으로, 부허 작품에서는 드물게 컬렉터블하다.
하이디 부허, 〈랜딩스 투 웨어(Landings to Wear)〉, 1969-1971, 뉴욕에서 칼 부허와 함께. 이미지 제공: 하이디 부허 재단
20대 시절 취리히 미술공예학교에서 바우하우스 출신의 요하네스 이텐의 지도 아래 직물을 사용하여 색채와 조형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하이디 부허. 작품 활동 초기에는 예술과 패션의 상호작용을 실험했던 작가는 이내 변화와 움직임이라는 부허 예술의 핵심적인 요소를 조각으로 풀어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이디 부허의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국제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하우스데어쿤스트 관장 안드레 리소니는 부허를 모더니즘 조각사의 ‘게임 체인저’로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부허가 남편 칼 부허와 함께 제작한 〈랜딩스 투 웨어〉(1969~70) 등으로 이미 페미니즘 조각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 조각 실험은 철, 돌과 같이 반영구적 재료를 바탕으로 거대한 스케일로 제작하는 모더니즘 조각사에 반기를 들었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부허가 L.A에 거주하던 시절 제작한 〈바디쉘〉(1972)과 〈바디랩핑〉(1972)을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영상과 재제작 작품으로 선보인다. 부드러운 스티로폼으로 만든 이 작품들은 조각은 단단하고 고정된 것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신체의 움직임과 함께 유동적으로 변하는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 1972년 L.A 베니스 비치에서 퍼포먼스로 선보인 〈바디쉘〉의 영상과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선보인 〈바디랩핑〉의 기록 사진은 사랑스러운 조각 실험의 한 장면으로 애틋한 여운을 전한다. 또한 부허 사후 최초로, 아트선재센터는 〈바디랩핑〉을 재제작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입고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부허의 두 아들 인디고와 메이요는 기록 사진 앞에서 재제작한 〈바디랩핑〉을 입고 포즈를 취하며 즐겁게 지난날을 회상했다. “당시 우리는 11살, 9살이었는데, 부모님께서는 매일 일만 하셨어요. 그런데 이날은 다 같이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것 같았죠. 언제든지 오셔서 〈바디랩핑〉을 입어보세요.”
〈인디고, 메이요와 함께 몸을 감싼 하이디 부허〉,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할리우드 힐, 1972. 이미지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의 영상 촬영을 담당하는 등 어머니의 작품 활동에 적극적으로 조력한 두 아들은 이 시대가 소환한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하이디 부허를 ‘파이터’로 정의했다. “스위스의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이 1990년대에 와서야 인정됐습니다. 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예술계까지 만연한 시절에 어머니가 이어나간 작품 활동을 오늘날 서울에서 선보이는 게 무척 감격스럽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은 파이터였습니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눈앞에 있는 이익에 흔들리지 않으며 정진하셨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가 있는 거라 생각해요.” 흥미로운 건 그녀의 투쟁이 변화와 변신을 모토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딱딱하고 권위적인 질서를 부드럽고 유동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자유와 해방을 꿈꾼 그 특별한 전략은 오늘날에도 눈부신 비전을 제공한다.
안동선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세실리아 알레마니의 베니스 비엔날레 〈The Milk of Dreams〉와 이숙경의 광주 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그리고 하이디 부허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변화’의 메시지를 계시처럼 받아들이며 오늘도 우왕좌왕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