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찌 2023 크루즈 쇼가 열린 카스텔 데 몬테의 전경.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새로운 크루즈 쇼를 선보이기로 마음먹은 곳, 바로 이탈리아의 남쪽 풀리아의 중심 도시 바리(Bari)에 자리한 고딕 양식의 성 ‘카스텔 델 몬테’다. 언제나 풍부한 시각적인 요소와 더불어 그와 연결되는 역사적인 장치들을 컬렉션 속에 버무려내는 패션계의 철학자, 미켈레다운 공간이었다. 13세기경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지은 카스텔 델 몬테는 엄격하게 느껴질 만큼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팔각형의 왕관 모양을 한 이 장엄한 요새에는 팔각형의 보루와 팔각형의 안뜰이 자리해 있으며 건물 두 개 층에는 각각 여덟 개의 사다리꼴 형태의 방이 존재한다. 이곳에 강박적으로 사용된 숫자 8이 전하는 불가사의한 힘에 미켈레 역시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고. “신화에 우아함을 더해줄 만한 곳을 찾고 있었어요. 이 공간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치수와 비율이 교차하고 있죠. 칼라(Collar)와 재킷의 치수를 변주해 마법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과 닮아 있어요.”

다채로운 캐릭터가 공존한 코스모고니 컬렉션의 피날레.










자, 그 결과로 탄생한 컬렉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쇼가 시작되자 붉은 보름달이 뜨는 밤하늘 아래 웅장한 현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성 외곽을 따라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마치 우주선에서 지구로 메시지를 보내듯 중간중간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은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우주론의 개념은 옵티컬 및 그래피컬한 패턴의 룩, 그리고 별자리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엠브로이더리 장식이 돋보이는 가운으로 등장했다. 여기에 성주(城主)를 떠올리게 하는 퍼 케이프를 걸친 중성적인 여인, 고고장에 놀러온 듯 반짝이는 드레스 혹은 자수 장식의 데님 점퍼를 입은 소녀들, 클래식한 모자에 투피스를 입은 부르주아 귀부인 등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들이 혼재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패션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그 중에서도 시선을 사로잡은 건 초상화 속 목걸이, 십자군 망토, 기차, 중세 크리놀린 등 역사적 참고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섬세하고도 키치한 디테일들! 물론 구찌 특유의 페티시적인 요소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클라이맥스로 이어진 피날레에서는 성 꼭대기 8개의 모서리에서 푸른색 빔이 쏟아져 나오며 별의 형상을 드러냈고, 성 전체가 거대한 은하수와 별자리, 별자리 이름으로 수놓였다. “성이 정적에 휩싸인 채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성이 지어졌을 때처럼 살아서 기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은 당시의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와도 같은 곳이죠.” 미켈레의 말대로 성벽에 쏘아 올린 별자리와 은하수의 이미지는 카스텔 델 몬테에 어떤 생명력을 불어넣는 듯 느껴졌다. 절로 카메라를 꺼내 들게 만드는 황홀한 장관 아래로 체크 셔츠에 헐렁한 면 바지, 여기에 검은색 볼캡을 눌러쓴 미켈레가 밝은 미소를 띠며 걸어 나왔다. 자신이 꿈꾸고 계획한 코스모고니를 현실 속에 완벽히 재현해내는 데 성공한, 동시대를 대표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런웨이의 마술사, 패션 철학가의 걸작에 모두가 환호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