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발렌시아가는 리세일 서비스 기술을 제공하는 업체 리플런트(Reflaunt)와 손잡고 재판매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발표했다. 이번 제휴를 통해 고객들은 매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크레디트를 받는 조건으로 옷장 속에 잠들어 있던 철 지난 발렌시아가의 의류 및 액세서리를 판매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실행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을 지정된 매장에 전달하면 리플런트로 보내져 인증과 사진 촬영, 가격 책정의 과정을 거친 뒤 베스티에르 콜렉티브(Vestiaire Collective), 레벨르(Revelle)와 같은 25개 이상의 2차 리세일 플랫폼을 통해 업로드되는 식. 발렌시아가는 리플런트와의 협업이 지속가능한 브랜드가 되기 위한 더 큰 사명의 일부이며, 재사용 및 재활용 관행을 장려하기 위한 것임을 밝혔다. 아울러 이 계획이 하우스가 새롭게 추진하고 있는 ‘순환 프로그램’의 일환이라 덧붙였다. 실제로도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는 몇 시즌 전부터 최근의 2022 가을 쿠튀르 컬렉션, 그리고 2023 S/S 컬렉션까지, 런웨이를 통해 다수의 업사이클링 피스를 선보인 바 있다.
중고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시장을 어지럽히고 위조품을 조장하며 신중하게 쌓아온 브랜드의 평판을 깎아내리게 될까 우려를 표했던 럭셔리 하우스들도 이제는 리세일 시장의 급속한 성장에 주목하는 추세다. 발렌시아가와 방식은 다르지만, 이미 지난해 자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상징적인 아카이브 피스, 빈티지 제품들을 재판매 혹은 렌털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한 구찌, 발렌티노, 휴고 보스, 장 폴 고티에가 대표적인 예다. “저희는 벼룩시장을 샅샅이 뒤지던 세대죠. 그곳에서 네이비 스트라이프 셔츠를 발견해 입기 시작했는데 그게 제 코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헌 옷에 새생명을 불어넣고 다시 입는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에요. 위기와 혼란의 시대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요? 옷은 너무 많은데 입을 사람은 부족하니 말이에요.” 50년 만에 패션계를 은퇴한 장 폴 고티에도 빈티지 제품의 재판매에 두 손 들어 환영의 의사를 밝혔다.
네타포르테와 매치스패션과 같은 거대 온라인 쇼핑몰도 후발주자로 리세일 시장에 뛰어들었다. 먼저 작년 가을, 리플런트와의 위탁 파트너십을 통해 럭셔리 리세일 서비스를 시작한 네타포르테의 경우 판매자가 제품을 넘기자마자 매장 크레디트로 바로 보상받거나(이 경우 10%의 인센티브가 추가된다), 판매 후 은행 송금을 받는 두 가지 옵션 중 보상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조건으로 눈길을 끌었다. “고객에게 디자이너 제품을 쉽게 재판매할 수 있는 손쉬운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리커머스가 제품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진정한 조력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네타포르테의 럭셔리 및 패션 부분 사장인 앨리슨 로니스(Alison Loehnis)가 말했다. 한편 매치스패션은 올해 8월, 리세일 플랫폼인 리럭스(Reluxe)와 함께 프리-러브드 상품으로 구성한 익스클루시브 컬렉션을 선보였다. 패션 컬렉터의 아이코닉 상품으로 구성된 캡슐 컬렉션은 피비 파일로 시절의 셀린,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발렌시아가 아우터를 비롯해 샤넬의 시그너처 트위드 재킷, 알라이아의 수트 앙상블, 베르사체의 가운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몇몇 인기 제품은 오픈과 동시에 품절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BCG(Boston Consulting Group)와 베스티에르 콜렉티브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럭셔리 및 중고 패션 시장은 2020년 이후 3배 규모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현재까지 리세일 제품은 중고 제품을 구매하는 구매자의 옷장 속 4개 중 1개를 차지하고 있지만 2023년에는 27%까지 올라갈 것이라 전망했다. 이 흐름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이들은 Z세대. 그 뒤를 밀레니얼세대가 잇고 있다. 미국의 명품 리세일 플랫폼 더리얼리얼(The RealReal)이 발표한 2022년 럭셔리 리세일 보고서에도 2만8천만 명의 전체 이용자 중 MZ세대가 가장 높은 41%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가성비보다 ‘가심비(심리적인 만족도)’, 자신의 신념을 드러낼 수 있는 가치 소비를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지속가능한 소비 방법인 리세일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 실제 앞서 언급한 BCG와 베스티에르 콜렉티브가 행한 조사에서도 구매자의 40%가 중고 상품을 패션을 지속가능하게 소비하는 방법으로 느끼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 독특하고 다양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점, 남들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물건을 디깅(Digging)하는 즐거움도 리세일 마켓의 매력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 상황은 어떠할까? 일찍이 중고나라, 번개장터, 당근마켓 등과 같은 C2C(Consumer to Consumer, 소비자 간 상거래) 플랫폼이 인기를 끌었고, 머스트잇, 트렌비, 발란과 같은 온라인 럭셔리 플랫폼이 약진을 보였지만 중고 명품에 대한 체계적인 판매와 소비가 확대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국내 시장의 이러한 변화를 눈여겨보던 프랑스의 리세일 플랫폼 베스티에르 콜렉티브는 지난 7월, 국내에 정식으로 론칭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의 CEO인 막시밀리안 비트너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시장의 잠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한국은 K팝, K드라마, K패션과 뷰티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고 C2C 분야에서도 큰 잠재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성장성뿐 아니라 성장속도에 주목하고 있죠.” 이 밖에도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대표적인 리세일 플랫폼으로는 럭셔리 커뮤니티인 네이버 ‘시크먼트’ 카페와 네이버의 자회사인 ‘크림’이 손잡고 만든 중고 명품 플랫폼 ‘시크(Chic)’, 2020년부터 중고 명품 위탁 서비스인 ‘트렌비 리세일’을 운영하다 올해, 개인 간 명품 리세일을 할 수 있는 프리미엄 정품 리세일 서비스를 선보인 ‘트렌비(tren:be)’, 옷장 속 패션 제품을 공유(Sharing)하던 것에서 판매로까지 서비스를 확대한 ‘클로젯셰어(Closet Share)’를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리세일 플랫폼은 온라인에만 존재할 것이라는 편견을 깬 오프라인 콘셉트 스토어 ‘브그즈트(BGZT) 컬렉션’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중고 거래 플랫폼인 번개장터가 지난해 선보인 것으로 작년 2월 더현대서울에 스니커즈 리세일 매장 ‘브그즈트랩(BGZT Lab)’을 오픈하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올해 8월엔 신세계 SSG닷컴이 BGZT 컬렉션을 입점시키며 판매를 시작해 이제는 온라인에서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리세일의 가장 큰 순기능은 ‘순환성’에 있다. 옷장 속에 잠자고 있던 고품질의 제품에 새생명을 부여하고, 누군가에겐 특별한 상품을 ‘득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새 상품을 덜 사게 만드는 것.(참고로 휴고 보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고 구매가 새로운 구매보다 평균적으로 탄소배출량이 44%나 낮다.) ‘리세일이 패션 브랜드로 하여금 새 옷을 덜 생산하게 만드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지만 다수의 전문가들은 리세일이 지속가능한 패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해결방안 중 하나라는 것에 동의한다. 특히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거론되는 패스트 패션 제품의 생산 규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고무적으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리세일을 촉진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식’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사람들이 집에 있는 물건을 다시 유통시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원하며 이를 위해 다방면의 도움을 제공할 계획입니다.” 더리얼리얼의 홍보 및 비즈니스 개발 부사장인 앨리슨 소머(Allison Sommer)의 말처럼, 오늘날 리세일 플랫폼의 인기가 중고 제품에 대한 인식, 나아가 대중의 소비방식을 바꾸고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삶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