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바스키아의 작품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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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바스키아의 작품들

장 미셸 바스키아의 가족이 만든 전시회에서 우리는 전설적인 인물의 창조적 진화를 엿볼 수 있다.

BAZAAR BY BAZAAR 2022.05.09
 
(왼쪽부터) 리산 바스키아가 입은 셔츠는 Jaquemus. 스커트는 Dolce & Gabbana. 귀고리는 Arms of Eve. 지닌 바스키아가 입은 스웨터는 Eloquii. 벨트가 있는 스커트는 Prada. 귀고리는 본인 소장품. 뒤쪽에 있는 작품은 〈Untitled(Cowboy and Indian)〉(1982)로 바스키아 가족 소장.

(왼쪽부터) 리산 바스키아가 입은 셔츠는 Jaquemus. 스커트는 Dolce & Gabbana. 귀고리는 Arms of Eve. 지닌 바스키아가 입은 스웨터는 Eloquii. 벨트가 있는 스커트는 Prada. 귀고리는 본인 소장품. 뒤쪽에 있는 작품은 〈Untitled(Cowboy and Indian)〉(1982)로 바스키아 가족 소장.

얼마 전, 인터넷에서 장 미셸 바스키아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사진은 그에 대해 내가 가졌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바스키아가 예술계 스타의 반열에 오른 24세 때 맨발에 검은색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촬영한 〈뉴욕 타임스〉 커버 사진도 아니고, 앤디 워홀 옆에서 웃통을 벗은 채 복싱 장갑을 끼고 있는 모습이 담긴 «Warhol, Basquiat» 전시 광고 포스터도 아니다. 혹은 페인트가 튄 청바지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장면을 포착한 할렘 르네상스 포토그래퍼 제임스 반데르지의 사진도 아니다.
인터넷은 나에게 또 다른 바스키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흰색 티셔츠를 입은 사진 속 그는 왼손에 연필을 꽉 움켜쥔 채 금속 의자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것은 1972년, 바스키아가 11살이었을 당시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찍어준 사진이다. 그가 예술계에 혜성처럼 떠올라 유명해지기까지, 또는 그 시대 가장 유명한 흑인 예술가가 되기까지는 그 사진으로부터 10년은 더 걸릴 것이다. 바스키아의 출신에 관한 신화적 스토리(떠돌이 신세인 그래피티 아티스트로부터 1980년대 뉴욕 미술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여정)는 1988년 27세의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함으로써 비극으로 확고하게 굳혀졌다. 하지만 창의력과 상상력에 흠뻑 빠져 있는 모습이 담긴 이 사진이 신선한 이유는 바스키아의 또 다른 측면의 서사가 담겨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은 굉장할 뿐만 아니라 일찍이 가장 가까운 주변인에게 발견되고 구축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올해 4월, 뉴욕 첼시 갤러리 디스트릭트에 위치한 스타렛 리하이 빌딩에서 개막하는 전시 «Jean-Michael Basquiat: King Pleasure©»는 바로 앞서 언급된 측면의 바스키아를 다룬다. 바스키아의 여동생인 리산 바스키아와 지닌 바스키아, 그리고 새어머니 노라 피츠패트릭이 기획했다. 그들의 프라이빗 컬렉션에 있는 2백여 점의 페인팅과 드로잉, 사진, 개인 소장품, 멀티미디어 프레젠테이션(이를테면 그들이 함께 살았던 집의 거실과 다이닝룸을 실사 크기로 재현한 방)도 함께 전시된다. 바스키아의 삶에 관해 거론될 때면 늘 밀려난 존재였던 그의 가족이 총괄하는 첫 번째 전시인 것이다.
«King Pleasure©»는 바스키아의 오랜 커리어와 짧은 생애를 다루지만, 그의 발자취에 대한 개인적 회고를 가족의 시점을 통해 제공한다. 그를 예술가로 구축한 세월을 보여주는 전례 없는 창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장 미셸 바스키아 작품의 가치를 의심케 했던 인종에 대한 오랜 선입견을 뒤집고자 한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와 아이티의 문화유산, 흑인 가족 안의 관계가 바스키아의 창의력을 키우는 데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Untitled(Cowboy and Indian)〉 시리즈 중 일부분.

〈Untitled(Cowboy and Indian)〉 시리즈 중 일부분.

“장 미셸은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유명하죠.” 지닌보다 네 살 많은 리산이 말한다. “저희는 그의 사적인 면을 조금 더 세상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30년 이상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서 아직 세상에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것입니다.”
바스키아보다 7살 어린 지닌에게 이번 전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저희 가족의 이야기와 장 미셸의 추억을 되찾는 것은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스키아와 꾸준히 교류했음에도 세상 사람들은 바스키아에게 두 명의 여동생 또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종종 깜짝 놀란다고 고백한다. “저희는 그가 죽을 때까지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오로지 저희 둘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대중을 위한 것만큼이나 저희에게도 이 전시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희 가족의 놀라운 인물을 기록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이 전시를 열기 위해, 자매는 가나 태생의 런던 출신 건축가 데이비드 에드제이에게 전시 기획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필립 프리론과 함께 미국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을 디자인한 그는 이번 전시를 기획하면서 바스키아의 삶의 풍만함을 포착하고자 했다.
“바스키아를 한 가족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그를 가족이나 사람들과의 교류가 단절된 고독한 인물로 여겼으며, 걱정이 가득한 채로 세상을 살아간 사람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가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에드제이는 말한다. “그의 천재성이 집안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는 지식인 가정에서 자랐고 다양한 창의적 아이디어에 자극받았습니다.”
짧은 생애 동안, 바스키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작을 했다. 그는 사망 당시 거의 2천여 점의 완성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대 미술시장 호황기에서 그는 확고한 존재로 자리 잡았고, 페인팅, 드로잉, 재즈와 역사 등에서 영향을 받은 작업을 남겼다. 그리고 그 시대의 지배적인 탐미주의 운동이었던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와 힙합을 결합시키며 발자취를 남겼다.
이제는 바스키아를 만나고 싶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그의 왕관, 해골, 얼굴, 그리고 텍스트 조각들은 거의 모든 곳에 있다. 티셔츠, 모자, 재킷, 향초, 스케이트보드, 소파 커버, 닥터마틴 구두, 컨버스 운동화 등.(나는 심지어 유치원생인 딸을 위해 바스키아 그림이 새겨진 마스크도 구입했다.) 그리고 바로 지난가을, 티파니앤코는 비욘세, 제이지와의 광고 캠페인을 공개했는데 그것은 바로 1백28캐럿 다이아몬드와 바스키아의 희귀한 페인팅 〈Equals Pi〉(1982)와의 협업이다. 이 작품에서는 티파니앤코의 대표적인 색깔인 로빈스 에그 블루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최근까지 리산과 지닌은 주로 바스키아 에스테이트의 브랜드 관리에 주력해왔다.(바스키아 에스테이트의 관리자였던 아버지 제러드가 2013년에 사망 후 이어받은 직업이다.) 두 여성 모두 폭넓은 사업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리산은 에스테이트의 관리자뿐만 아니라 인생 상담 코치이자 기업 경영가이기도 했다. 제닌은 재무 분야에서 일했다.
장 미셸 작품의 폭넓은 접근성은 그가 생전 예술을 창조해내는 방식, 이를테면 벽, 테이블 상판, 냅킨, 가죽 재킷, 문고리 없는 문, 버려진 창틀 등 그가 접하는 모든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일치한다고 두 자매는 생각한다.
“저희는 모든 작품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습니다.”제닌은 말한다. “그리고 이 저작권 덕분에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림들이지만 미술관에 전시되지 않을 수도 있었거든요.” 리산이 끄덕이며 동의한다. “게다가 다양한 소재의 제품에서 접할 수 있죠. 이 또한 그의 유산을 이어가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아트워크: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Cowboy And Indian)〉, 1982,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50x105 In (127x266.7cm); Jawbone Of An Ass, 1982 (Detail), acrylic, oil stick, and paper on canvas with strings and wood supports, 60x84 In (152.4x213.36cm); All Artwork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아트워크: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Cowboy And Indian)〉, 1982,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50x105 In (127x266.7cm); Jawbone Of An Ass, 1982 (Detail), acrylic, oil stick, and paper on canvas with strings and wood supports, 60x84 In (152.4x213.36cm); All Artwork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바스키아의 작품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식지 않고 최고조에 이른다. 2018년에는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4층까지 채운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그 다음 해에는 브랜트 재단에서 «Jean Michel Basquiat»전을, 그리고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Basquiat’s Defacement: The Untold Story»전을 연달아 열었다. 2020년에는 «Writing the Future: Basquiat and the Hip-Hop Generation»전이 보스턴 순수미술 박물관에서 열렸으며, 지난여름엔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 워홀 박물관에서 «Warhol and Basquiat in Focus: Works From the Permanent Collection»전이 열렸다.
컬렉터들조차도 대중과 작품을 공유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2017년, 일본의 억만장자 마에자와 유사쿠는 미국 아티스트 작품 중 사상 최고액인 1억1천50만 달러로 바스키아의 〈1982 Untitled〉를 낙찰받은 후 공공시설에 전시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2018년 브루클린 박물관에서 열린 «One Basquiat»전 때 작품을 대여해주었다. 그곳은 2005년에 바스키아 회고전이 열렸던 장소이자 바스키아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자주 갔던 곳이다. 또한, 마에자와는 자신의 고향인 일본 치바에 바스키아 소장품을 기반으로 한 박물관을 개관할 계획을 발표했다.
대중에게 알려진 바스키아의 이야기는 보통 이렇다. 1960년,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어머니 마틸드 안드라데스와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출신인 아버지 제러드 바스키아 사이에서 태어나 브루클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8살이었을 때 부모가 이혼했다. 바스키아와 그의 동생들은 초반에는 어머니인 마틸드와 살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제러드에게 보내졌다. 그들은 브루클린 보어럼 힐에 있는 타운하우스로 이사했고, 그 후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푸에르토리코로 이사해 한동안 그곳에 거주했다. 장 미셸은 17살에 집을 나와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고, 일련의 여자친구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그 중에는 유명해지기 전의 마돈나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는 고등학교 친구인 알 디아즈와 함께 SAMO©라는 태그를 달고 맨해튼 시내 곳곳에 스프레이를 뿌리며 그래피티 아트를 하기 시작했다. 20세 무렵에는 포스트펑크 음악 밴드 ‘그레이’를 결성했고, 마이클 홀먼, 배우 빈센트 갈로, 그리고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인디 영화 〈Downtown 81〉을 제작했다. 엽서를 그려 길거리에서 팔면서 점차 캔버스 페인팅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4년 뒤, 바스키아는 1980년대 아트계의 최고 스타 중 한 명이 되어 앤디 워홀과 함께 전시를 열었다. 바스키아의 유별난 행동이 워홀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둘의 관계는 워홀이 사망하는 1987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바스키아의 유명세가 절정에 달했을 때도 바스키아는 여전히 열외자였다. 비록 이전의 흑인 예술가들이 얻지 못한 수준의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그는 비평가와 문화 기관들으로부터는 소외감을 느꼈다. 〈뉴욕 타임스〉는 «Basquiat, Warhol»전을 “예술계 마스코트”라고 평했고 그의 작품들은 종종 ‘원시적’ 또는 ‘이질적인’ 것으로 취급받았다.
바스키아가 죽은 후, 그를 추모하려는 시도는 종종 그의 걷잡을 수 없는 삶을 조명하는 역할을 했다. 줄리언 슈나벨이1996년에 만든 영화는 바스키아가 톰킨스 스퀘어 공원에서 골판지 상자에서 자다 깨어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거기에서 그는 똑똑하지만 불안정하고, 궁핍하며 중산층 교육을 강력히 거부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피비 호반의 1998년 작 〈Basquiat: A Quick Killing in Art〉 비공인 전기에서는 장 미셸 바스키아의 어린 시절, 하루아침에 유명해지는 과정, 그리고 마약 중독에 빠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때로는 불안정하게 묘사했다.
바스키아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자매에게 그들이 바스키아의 삶에서 배제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지닌은 솔직하게 대답한다. “이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알려진 것들’에 포커스를 둬야 합니다. 장 미셸이 집을 떠나고 백인 가정에 입양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상자 안에서 살았다는 말도요. 혹은 그가 가족을 다시 보지 않고 살았다든지요. 어머니가 30년 동안 보호시설에 갇혀 있었다는 말도 있었고요. 물론 모두 사실이 아닌 허위 정보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수정하는 것이 저희가 바스키아의 삶에 포함되는 것보다 우선적입니다.”
 
바스키아는 젊은 흑인으로서 당한 인종차별과 일상에서 받은 비난을 작품 전면에 드러냈다. 그는 25세 흑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마이클 스튜어트의 죽음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튜어트는 뉴욕 지하철역에서 체포된 후 경찰에 의해 강제로 구속되었고 호그타이로 묶인 뒤 혼수상태에 빠져 13일 뒤에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바스키아의 1983년 작 〈The Death of Michael Stewart (Defacement)〉는 이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당시 바스키아는 이 그림을 키스 해링 스튜디오 벽면에 그렸고, 이후 해링은 그림을 벽면에서 떼어내 액자를 씌웠다.
“동료, 비평가, 예술계는 장 미셸의 ‘흑인성’을 항상 문제 삼았습니다. 그건 일상이었고 꾸준히 지속되었습니다.” 지닌은 말한다. “바스키아에게 흑인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작품에서 끊임없이 다룬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흑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미묘한 차별이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보스턴 MFA에서 열린 «Writing the Future»전에서 공동 큐레이터로 활동한 문화평론가 그렉 테이트가 관측한 것처럼, 바스키아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흑인 예술가들과 운동선수들을 여러 차례 반추했다. “그가 재즈 음악가들을 존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셀로니어스 몽크, 맥스 로치, 그리고 다른 비밥 음악가들은 흑인 남성 천재들로 제기되었습니다. 바스키아는 그들이 창의력, 코스모폴리탄 스타일, 그리고 행동 방식으로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12월에 세상을 떠난 테이트는 바스키아와 힙합의 관계를 탐구한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이었다. 테이트는 1989년 〈빌리지 보이스〉에 기재한 에세이 ‘Nobody Loves a Genius Child: Jean-Michel Basquiat, Lonesome Flyboy in the 80s Art Buttermilk’(이 제목은 랭스턴 휴스의 시에서 인용한 것이다.)에서 이 주제에 대한 획기적인 탐구를 제시했다. 바스키아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흑인 출신 뮤지션 제이지와 스위즈 비츠가 이것을 이어나갔다. (“I’m the new Jean-Michel”은 제이지의 2013년 곡 ‘Picasso Baby’ 중 유명세를 탄 구절이다.)
현재 다행히도 바스키아의 다양한 흑인 문화유산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흑인 예술가들에게 어떻게 영감을 주었는지에 대해 조명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바스키아의 어린 시절을 사려 깊게 포착한 아동용 책 〈Radiant Child: The Story of Young Artist Jean-Michel Basquiat〉의 저자 자바카 스텝토는 콜더컷 상과 코레타 스콧 킹 일러스트레이터 상을 수상했다. 미술사가 조다나 무어 사게세의 2014년 책 〈Reading Baquiat: Exploring Ambivalence in American Art〉는 바스키아의 다양한 정체성, 작품의 창조 과정, 그리고 백인 예술계에서의 복잡한 평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학술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영화제작자 줄리어스 오나는 바스키아의 삶과 아프리카 교민들의 유산을 기념하는 새로운 전기 영화인〈SAMO Lives〉를 제작하고 있다고 최근 발표했다.
바스키아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관심을 키워준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임을 언급한 바 있다. 그가 세 살 당시 그림을 막 그리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 마틸드는 제러드가 직장에서 가져온 종이 위에 바스키아와 함께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리고 종종 바스키아를 뉴욕 현대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리고 브루클린미술관에 데리고 다녔다. 심지어 장 미셸은 여섯 살 때 주니어 멤버십에 가입되어 있었다. 의학 교과서 〈Gray’s Anatomy〉를 소개해준 사람도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바스키아가 여덟 살 때, 길에서 놀다가 차에 치여 병원에 입원할 당시 선물해준 책이였다.) 그리고 그는 평생 동안 그것을 영감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밴드 이름을 거기서 땄고, 심지어 그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 제목으로도 사용하였다. 장 미셸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에 능통한 다국어를 할 줄 아는 소년이었을 뿐만 아니라 재즈와 비밥(1940년대 중반 미국에서 유행한 재즈 연주 스타일)에 심취한 아버지의 광범위한 레코드 컬렉션에 둘러싸여 자란 아이였다. «King Pleasure©»는 장 미셸의 인생의 어두운 면을 회피하지 않는다. 이 전시는 가족과의 깊고 복잡한 관계, 그리고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부모가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깊이 파고든다.
 
아트워크: 〈Untitled (Cowboy And Indian)〉, 1982 (Details),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50x105 In (127x266.7cm),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아트워크: 〈Untitled (Cowboy And Indian)〉, 1982 (Details),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50x105 In (127x266.7cm),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이 작품들은 30년 이상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아직 세상에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리산 바스키아
 
장 미셸 바스키아의 모습(1986).

장 미셸 바스키아의 모습(1986).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씁니다. 그리고 바스키아는 본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전시 디자이너 데이비드 에드제이
 
바스키아 가족 소장품에서 〈Jawbone of an Ass〉(1982)를 꺼내고 있다.

바스키아 가족 소장품에서 〈Jawbone of an Ass〉(1982)를 꺼내고 있다.

“이 전시의 큐레이팅을 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어떻게 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리산은 말한다. “삼남매였는데 그 중 한 명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저희 오빠고요. 그의 삶은 순식간에 끝나버렸죠. 그리고 그의 죽음은 바스키아라는 인물에 일종의 정지화면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정말 든든한 오빠였어요.” 그녀는 덧붙인다. “그리고 그는 정말 웃겼죠. 마치 장난꾸러기 같았어요. 마법사 같기도 했고요. 우리에게 늘 속임수를 써가며 장난을 쳤지요.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세상에 어떻게 모습을 나타낼 건지를 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에드제이에게 «King Pleasure©» 전시는 새로운 문맥으로 바스키아의 천재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시에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임무와도 같았다. “저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되고 싶은 흑인 아이가 이 전시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에드제이는 말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린다기보다 ‘공감’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는 점에서는 ‘예외적인’ 인물이지만, 흑인 가족이 그의 아이를 위해 들였던 노력과 지지 측면에서는 예외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씁니다.” 에드제이는 덧붙인다. “그리고 바스키아는 본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20대 삶의 한 조각만 가져와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줄게요’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리산이 말한다. “그동안 알려진 것들이 잘못된 이야기라는 건 아니지만, 이 전시는 넓은 맥락 안에서 장 미셸의 삶을 보여줄 것입니다. 장 미셸은 항상 자신의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굳게 결심했고, 이것이 바로 그가 한 일입니다.”
사진 속 바스키아는 이 모든 것을 힘의 원천으로 내재화한 것처럼 보였다. “저는 17살 때부터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작업이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도, 저는 제 자신에게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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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Salamishah Tillet
    어시스턴트 에디터/ 백세리
    사진/ Ari Marcopoulos
    스타일리스트/ Miguel Enamorado
    헤어/ Tashana Miles(The Chair For The Chair Beauty)
    메이크업/ Jessica Taylor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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