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바스키아의 미망인' 저자, 제니퍼 클레멘트가 돌아본 그 때 그 시절
프리다 칼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장 미셸 바스키아와 함께 뉴욕 반문화의 중심에 섰던 작가 제니퍼 클레멘트. 그가 담담히 써내려간 지난날의 기억 속엔 예술가의 혁명 정신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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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그림을 그리는 프리다 칼로.
나는 지난 1월 출간한 회고록 <The Promised Party>를 쓰면서 나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남겼다. 예술적 자유를 향해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나 고독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끝내 항복시킨 칼로의 집념이 나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게 됐으니 말이다. 1980년대 뉴욕에서 살면서 장 미셸 바스키아를 알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의 캔버스에서 내가 느낀 독립성과 용기 같은 것들. 두 예술가 모두 자신의 존재와 삶을 표현한 초상화를 남겼고, 그 진실함은 고스란히 영감이 되었다.

1985년, 뉴욕에서 만난 장 미셸 바스키아.
목욕하거나 낮잠을 자지 않을 때, 마리아와 나는 함께 동네를 거닐며 하루를 보냈다. 거리에는 주로 청소부, 쓰레기 수거원, 정원사 그리고 정글에 서식하는 이국적인 새를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디켄시안(Dickensian)이라 불렸던 그 시대 멕시코인들이 깃털 달린 동물을 길거리 케이지에 모아둔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 스튜디오 하우스를 설계한 위대한 건축가이자 벽화가인 후안 오고르만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살면서 늘 우리 집에 머물렀다. 나의 어머니 카틀렌 클레멘트(Kathleen Clement), 화가 호세 루이스 쿠에바스(Jose Luis Cuevas)와 군테르 헤르소(Gunther Gerzso), 조각가 헬렌 에스코베도를 비롯하여 벽화와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가진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과,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위시한 작가, 음악가, 영화감독, 무용가들도 이 세계의 일부였다. 이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에게는 멕시코의 다양한 얼굴, 즉 갖가지 가면을 탐구하는 도전적인 용기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멕시코의 원주민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여성 작가들의 시각은 내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001년에 발표한 소설 <A True Story Based on Lies>의 핵심은 1970년대 가톨릭과 멕시코 원주민의 복잡하고 혼합적인 세계에 대한 탐험이다.

프리다 칼로가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살았던 스튜디오 하우스의 전경.
한 시대의 끝자락에서 자라며 라틴아메리카의 공산주의, 초현실주의, 영성주의 등 다양한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초현실주의 예술가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과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가 영혼에 대한 상상을 캔버스에 담을 때, 10대였던 나는 종종 촛불과 함께하는 심령술 파티(veladas espiritistas)로 향했다.
어린 시절 멕시코에서 무용을 배운 덕에 18세에 뉴욕으로 건너가 뉴욕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이후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의 주요 무용수이자 그녀의 제자였던 버트람 로스(Bertram Ross)의 컴퍼니에 입단했는데 멕시코시티와 달리 뉴욕에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듯했다. 모두 자신의 출생 배경을 완전히 버린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돌아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소외되지 않았다. 혈연도 지연도, 과거도 없는 이곳에서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이 있는 집, 침실, 파자마, 저녁 식사 등. 일반적인 가정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키워드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열아홉이었던 것처럼, 그 이전의 삶은 없었던 것처럼 서 있는 것 같았다. 낯선 도시에 홀로 남겨진 우리는, 그랬다.

1984년 뉴욕에서의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뉴욕을 떠나 마음껏 사랑하던 그 시절엔 에이즈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막상 에이즈가 발병하자 그토록 생생했던 활기는 삽시간에 멈췄다. 댄스 파티, 클럽에서의 밤, 게이들의 목욕탕, 트랜스젠더 패션쇼, 디스코, 펑크 록 파티를 드나들다가 혈액 검사를 받기 위해 실험실을 방문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Aids test negative(에이즈 검사 음성)’라는 단어는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영어 단어였고, 누군가는 이를 그래피티 아트로도 표현했다.
이른 나이에 죽음을 직면한 우리는 질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운과 우연은 얼마나 중요한가? 아름다움은 도덕적 삶의 중심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며 답이 없는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진실과 위안을 찾아 헤맸다.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1979년 뉴욕 머드 클럽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예술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라는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정치적인 것은 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날것 그대로의 고통과 반항을 드러냈고, 이는 모든 여성들의 경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붓, 페인트 막대, 어린아이의 크레용은 인종 차별과 불의에 맞서는 칼이었다. 과학이나 사랑에 관한 시를 쓰거나 총기 사고 혹은 멕시코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인신매매에 관한 소설을 쓸 때, 내 글이 전쟁터와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미학적이고 시적인 것을 찾으려 노력했다.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와 뉴욕의 장 미셸 바스키아,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을 생각해본다. 내 삶은 결코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연이 작용했을 뿐.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Credit
- 글/ Jennifer Clement
- 사진/ Getty Images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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