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바스키아의 미망인' 저자, 제니퍼 클레멘트가 돌아본 그 때 그 시절

프리다 칼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장 미셸 바스키아와 함께 뉴욕 반문화의 중심에 섰던 작가 제니퍼 클레멘트. 그가 담담히 써내려간 지난날의 기억 속엔 예술가의 혁명 정신이 녹아 있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4.12.09
1931년, 그림을 그리는 프리다 칼로.

1931년, 그림을 그리는 프리다 칼로.

1960년대 멕시코시티의 산 앙헬 지역에서 자란 나에게 프리다 칼로가 남편이자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살았던 스튜디오 하우스는 제2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엔 칼로의 손녀이자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루스 마리아가 살고 있었으니까. 매일 방과 후 들렀던 그곳에는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은, 위대한 예술가이자 연인 칼로와 리베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주변에는 언제나 붓과 테레빈유 병이 있었고, 은은한 유화 물감 냄새가 진동했다. 청동으로 주조된 리베라의 데스 마스크(밀랍이나 석고로 죽은 사람의 얼굴에서 본을 떠 만든 안면상)도 테이블 위를 지켰던 물건 중 하나다. 세상을 떠난 그의 얼굴을 매일같이 보고, 때로는 그 차가운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나는 지난 1월 출간한 회고록 <The Promised Party>를 쓰면서 나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남겼다. 예술적 자유를 향해 자신에게 닥친 고통이나 고독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끝내 항복시킨 칼로의 집념이 나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게 됐으니 말이다. 1980년대 뉴욕에서 살면서 장 미셸 바스키아를 알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의 캔버스에서 내가 느낀 독립성과 용기 같은 것들. 두 예술가 모두 자신의 존재와 삶을 표현한 초상화를 남겼고, 그 진실함은 고스란히 영감이 되었다.

1985년, 뉴욕에서 만난 장 미셸 바스키아.

1985년, 뉴욕에서 만난 장 미셸 바스키아.

어느 더운 오후, 마리아와 나는 칼로의 욕조에서 더위를 식히며 그녀의 세계를 탐했다. 검정색 머리핀과 반쯤 사용한 산보른스(Sanborns)의 오렌지꽃 향수 병, 집으로 귀가한 칼로가 언제나 가장 먼저 찾았다는 싱크대 옆의 거북 등껍질 빗 등. 곳곳에 놓인 칼로의 물건으로 인해 마치 그녀가 우리 곁에 가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칼로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What the Water Gave Me>는 그녀가 이 욕조에 누워 있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미끈한 비눗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건 멀리서 보면 어린아이의 욕조에 있을 법한 고무 오리나 장난감처럼 보인다. 화산, 멕시코의 전통 의복인 테우아나(Tehuana) 드레스, 죽은 벌새, 두 명의 여성 연인, 딱따구리,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남은 조개, 무너지는 고층 빌딩, 항해 중인 배, 익사하는 여인.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모든 것이 칼로의 삶의 조각임을 알 수 있다.
목욕하거나 낮잠을 자지 않을 때, 마리아와 나는 함께 동네를 거닐며 하루를 보냈다. 거리에는 주로 청소부, 쓰레기 수거원, 정원사 그리고 정글에 서식하는 이국적인 새를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디켄시안(Dickensian)이라 불렸던 그 시대 멕시코인들이 깃털 달린 동물을 길거리 케이지에 모아둔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 스튜디오 하우스를 설계한 위대한 건축가이자 벽화가인 후안 오고르만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살면서 늘 우리 집에 머물렀다. 나의 어머니 카틀렌 클레멘트(Kathleen Clement), 화가 호세 루이스 쿠에바스(Jose Luis Cuevas)와 군테르 헤르소(Gunther Gerzso), 조각가 헬렌 에스코베도를 비롯하여 벽화와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가진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과,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위시한 작가, 음악가, 영화감독, 무용가들도 이 세계의 일부였다. 이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에게는 멕시코의 다양한 얼굴, 즉 갖가지 가면을 탐구하는 도전적인 용기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멕시코의 원주민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여성 작가들의 시각은 내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001년에 발표한 소설 <A True Story Based on Lies>의 핵심은 1970년대 가톨릭과 멕시코 원주민의 복잡하고 혼합적인 세계에 대한 탐험이다.

프리다 칼로가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살았던 스튜디오 하우스의 전경.

프리다 칼로가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살았던 스튜디오 하우스의 전경.

그땐 멕시코를 전 세계, 특히 미국의 상업적, 문화적 영향을 흡수하도록 만든 북미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기도 수십 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렸던 그 시절 멕시코는 세계와 단절된 채 독립적인,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환경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 시를 쓰고 예술과 관련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나는 특히 초현실주의에 강하게 이끌렸다. 나에게서 비롯된 아이디어와 라이프스타일은 내가 가진 창의적 DNA의 일부였다. 이쯤에서 1938년 디에고 리베라와 앙드레 브르통이 서명한 ‘독자적 혁명 예술을 위한 선언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진정한 예술은 혁명적이지 않을 수 없다.” 초현실주의는 예술 운동이 아닌, 삶의 방식이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정치적 선전의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혁명적인 행위였다.
한 시대의 끝자락에서 자라며 라틴아메리카의 공산주의, 초현실주의, 영성주의 등 다양한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초현실주의 예술가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과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가 영혼에 대한 상상을 캔버스에 담을 때, 10대였던 나는 종종 촛불과 함께하는 심령술 파티(veladas espiritistas)로 향했다.
어린 시절 멕시코에서 무용을 배운 덕에 18세에 뉴욕으로 건너가 뉴욕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이후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의 주요 무용수이자 그녀의 제자였던 버트람 로스(Bertram Ross)의 컴퍼니에 입단했는데 멕시코시티와 달리 뉴욕에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듯했다. 모두 자신의 출생 배경을 완전히 버린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돌아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소외되지 않았다. 혈연도 지연도, 과거도 없는 이곳에서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이 있는 집, 침실, 파자마, 저녁 식사 등. 일반적인 가정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키워드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열아홉이었던 것처럼, 그 이전의 삶은 없었던 것처럼 서 있는 것 같았다. 낯선 도시에 홀로 남겨진 우리는, 그랬다.

1984년 뉴욕에서의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1984년 뉴욕에서의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이 시기 게이 운동은 자유와 기쁨으로 충만했다. 디스코와 애프터 클럽은 시내의 낡은 창고에다 문을 열었다. 붐박스가 거리를 가득 채우고, 마을 사람들이 ‘YMCA’를 부르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키스 해링처럼 시를 썼다. 그가 ‘클럽 57’에서 여는 수요일 밤 낭독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고장나 버려진 텔레비전에 머리를 박고 시를 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도 했다. 수잔 말루크와는 맨해튼의 어느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할 때 처음 만났다. 그녀는 장 미셸 바스키아의 여자친구였고 금세 나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와 나는 수잔을 공유했다. 바스키아는 그녀를 그렸고, 나는 시를 썼다. 수잔은 아주 깡마른 체구에 커다란 옷을 입고 항상 깔깔대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바스키아는 수잔의 수다에서 따온 알파벳 글자를 뒤섞어 캔버스에 그렸다. 키 크고 수줍음 많던 그는 자신의 밴드인 그레이에서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고, 심지어 냄비와 프라이팬으로 직접 만든 타악기를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커다란 골판지 냉장고 상자에 숨겨 연주하기도 했다. 이 또한 그가 자신만의 감각으로 부조리에 대항하는 방법이다. 나는 맥스 캔자스시티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할 때 예술가 콜레트 뤼미에르를 만났다. 마돈나의 위험하고 아름다운 라이브 쇼를 보러 갔다. 마돈나는 머드 클럽(Mudd Club)의 단골손님이었고, 항상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녀를 알아봤다. 댄서였던 마돈나는 체중 관리를 위해 식사 대신 항상 커다란 비닐봉지에 팝콘을 담아 들고 다니며 먹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그 주변에서 유명했던 사람은 앤디 워홀뿐이었다.
뉴욕을 떠나 마음껏 사랑하던 그 시절엔 에이즈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막상 에이즈가 발병하자 그토록 생생했던 활기는 삽시간에 멈췄다. 댄스 파티, 클럽에서의 밤, 게이들의 목욕탕, 트랜스젠더 패션쇼, 디스코, 펑크 록 파티를 드나들다가 혈액 검사를 받기 위해 실험실을 방문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Aids test negative(에이즈 검사 음성)’라는 단어는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영어 단어였고, 누군가는 이를 그래피티 아트로도 표현했다.
이른 나이에 죽음을 직면한 우리는 질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운과 우연은 얼마나 중요한가? 아름다움은 도덕적 삶의 중심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며 답이 없는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진실과 위안을 찾아 헤맸다.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1979년 뉴욕 머드 클럽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1979년 뉴욕 머드 클럽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어느 날 멕시코와 뉴욕의 삶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바스키아에게 무엇을 먹고 사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멕시코의 초현실적 영화로도 유명한 <The Exterminating Angel>을 인용하며 “종이, 그리고 아가씨”라고 답했다. “별로 맛있지는 않지만 배고픔을 속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이며. 이건 어렸을 때부터 계속된 배고픔을 참기 위해 종이를 먹었던 멕시코 유모에 대한 말이기도 했다. 바스키아와 나는 가끔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의 어머니가 푸에르토리코 출신이고 몇 년 동안 그 섬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스페인어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바스키아가 존경하고 알고 지냈던 작가 윌리엄 버로스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는 멕시코시티에서 아내의 머리에 잔을 얹고 촬영했다. 그는 아내 조앤 버로스의 머리에 진 한 잔이 담긴 컵을 올려두고 총을 쏜 사람이다. 많은 멕시코인에게 악명 높은 사건으로, 조앤은 수도 북쪽에 있는 미국 묘지에 묻혀 있다. 바스키아는 캔버스 중 하나에 조앤을 죽인 총알을 그렸고, 수잔은 조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은 지금도 멕시코시티에 있는 내 집에 걸려 있다. 뉴욕에 머물렀던 친구들과 달리 난 언제나 이 도시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바스키아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뜬 1987년. 나는 무용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라는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정치적인 것은 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날것 그대로의 고통과 반항을 드러냈고, 이는 모든 여성들의 경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붓, 페인트 막대, 어린아이의 크레용은 인종 차별과 불의에 맞서는 칼이었다. 과학이나 사랑에 관한 시를 쓰거나 총기 사고 혹은 멕시코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인신매매에 관한 소설을 쓸 때, 내 글이 전쟁터와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미학적이고 시적인 것을 찾으려 노력했다.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와 뉴욕의 장 미셸 바스키아,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을 생각해본다. 내 삶은 결코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연이 작용했을 뿐.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Credit

  • 글/ Jennifer Clement
  • 사진/ Getty Images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