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ue yellow monk〉, 2020, Painted bronze, 295x125x114.5cm.
수녀와 수도승이 머물 미학적·경험적 공간을 위해, 작가는 전지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화이트 큐브의 지평선이 사라진 자리, 속을 감춘 회색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멘트를 전체에 발라 벽과 바닥, 천장의 경계를 없앤 시도는 제3의 시공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의 결과물이다. 시공간의 구분이 무의미한 이 진공의 공간은, 따라서 천상이거나 지하의 어디라 해도 무방하다. 전시장을 일종의 환경으로 바꾸어놓는 건 론디노네의 전매특허다. 지난 2015년에 그는 바로 이 공간에 인간 형상의 청석 조각들을 초대했고, 2019년에는 거대한 금빛 태양을 띄웠으며, 고대의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심해를 연출했다. 수고로운 개입은 충분히 가치 있다. 작가의 우주 안에 스스로를 위치시킨 관객들이 익숙하지만 낯선 이 공간에서 비로소 자신의 내적 풍경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수십 년째 시적인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인류세의 풍경 한가운데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 작가가 아니라 관객이 존재한다.

〈yellow red monk〉, 2020, Painted bronze, 295x170.5x97cm.
수녀와 수도승에게는 목소리가 없다. 이들은 침묵한다. 표정도 없다. 이들은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이름도 없다. ‘검은 머리의 초록 수도승(black green monk)’ 식의 서술일 뿐, 존재 각각을 호명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눈치 챘겠지만, 수녀와 수도승을 구별할 방도도 없다. 인간들은 습관처럼 눈앞의 대상과 머릿속의 고유명사를 연결시키고자 애쓰지만 역시 의미 없는 시도다. 중요한 건 작가가 함구하는 그 미궁의 지점에서 서로 대비되는 비가시적, 유동적인 에너지가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청석 조각은 현대적인 것과 원시적인 것의 기묘한 대조를, 〈더 선〉에서는 그들의 태양과 나의 태양이 조화로운 대비를 이루었다. 오늘 이 섬에서 수녀와 수도승 역시 가장 인공적인 형광색 사제복으로 환복하고 서 있음으로써, 그들의 존재 자체를 연상시킨다. 신비롭고 엄숙한 동시에 획기적으로 현대적인 이들은 색채, 형태, 질량 등을 직감하게 하고, 현실이라는 외적 세계와 내적 구조가 분리될 수 없음을 각성하게 하며, 이는 동시대에 통용되는 초월성, 우리를 울리는 현대적 숭고함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sechsterjulizweitausendundzwanzig〉, 2020, Watercolor on canvas, artist’s frame, 20.3x30.5cm.

〈neunzehnterfebruarzweitausendundzweiundzwanzig〉, 2022, Watercolor on canvas, artist’s frame, 22.9x33cm.
평생 예술을 통해 내면의 지도를 그려온 우고 론디노네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자연의 모티프들이 있다. 무지개, 나무, 태양, 구름, 달, 새, 물고기…. 특히 돌은 그에게 특별한 재료다. 형태적인 아름다움, 대지의 초월적 에너지, 아방가르드한 구조와 질감, 그리고 시간을 축적하고 응집하고 상징적인 사물이라는 점까지, 돌은 모든 작품을 잇는 근간이자 가장 훌륭한 시어가 된다. 돌을 활용한 그의 작품은 현대인들에게 시(詩)만큼이나 몰입적인 시공간을 선물한다. 록펠러센터 광장에 설치된 아홉 개의 청석 조각 〈휴먼 네이처(human nature)〉(2013)는 세상의 끝에서 온 전령이 되어 현대성을 남용하며 사는 인간들이 제 안에 내재한 원시성을 만끽하도록 했다. 라스베이거스 네바다사막에 대지미술과 팝아트를 결합한 색색의 돌탑 〈세븐 매직 마운틴스(seven magic mountains)〉(2016)는 미술사와 도시 역사에 길이 남을, 인간계와 자연계, 현대와 고대의 선연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내며 회자되고 있다. 중요하게는 이 두 가지 연작이 자연의 현신인 동시에 〈넌스 앤 몽크스〉의 전신이라는 점에서, 이 이름난 작품들은 또 다른 명분을 획득한다.
“청석 조각과 돌탑, 그리고 〈넌스 앤 몽크스〉 모두 원시적이면서도 동시대적 느낌을 자아내며, 시간과 삶의 순환에 대한 개념을 물리적으로 구체화한다. 돌이 거쳐온 생애를 암시하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생태변형적인 왜곡은 다채로운 색과 이에 따른 정서적 에너지로 새로 태어나며, 이는 잊지 못한 개방감을 선사한다. 취약함과 강인함이 혼재하는 이 세 작업군은 인간과 자연 간의 유대감을 표현한다.”(〈Mousse〉, ‘Organic Accord: Ugo Rondinone’ 中) 특히 그에게 전시는 재료에 대한 탐구와 개선의 결과다. 언뜻 돌처럼 보이는 수녀와 수도승은 실제 돌이 아니다. 물론 진짜인지 아닌지 맞춰보라는 식의 시험도 아니다. “사제복의 주름 같은 상징적인 면까지 표현할 수 있는” 석회암을 발견했지만, 연성인 이 돌로는 이상적인 크기의 작품을 구현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작가는 작은 돌을 3D 스캔해 확대, 청동으로 주물을 뜨고 도색해서 완성했다. “순전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고안한 방법이라지만, 덕분에 우리는 진짜 돌과 돌을 표방한 인공 재료 사이에서, 본다는 것의 물리적 의미와 형이상학적 의미 사이에서 충분히 배회할 수 있게 되었다.
수녀와 수도승은 지난 2020년 로마 산탄드레아 데 스카피스에 머물렀다.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건물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이들의 모습은 어떤 설명도 부족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조명 없이도 형형한 이들은 사방이 가로막힌 시대에서 역설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시간의 순환을 증명했다. 이들의 과거(작품의 궤적)는 곧 미래(예술의 가능성)다. 작금의 재앙이 막연한 불안감으로 증폭되고 있는 2022년, 수녀와 수도승은 사신으로 우리에게 파견되었다. 이들은 인류가 줄곧 대면해온 고통과 고뇌, 그럼에도 살아야 하고 살고자 욕망하는 인간들의 희망과 절망의 지점을 고요하게 응시한다. 이들은 마법사도, 해결사도 될 수 없다. 그저 어떤 말도 어떤 제스처도 없이, 가장 먼 과거 혹은 미래의 어느 순간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과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아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국제갤러리 서울점(K3) 우고 론디노네 개인전 «nuns and monks by the sea» 설치 전경.
각각 다른 공간에 놓인 조각과 회화는 서로의 배경과 서사로 충실히 기능한다. 언젠가 어느 해안가에 서 있던 청석 조각 사진을 본 적 있기 때문인지, 나는 회화 속 태양이 뜬 하늘과 수평선을 배경으로 수녀와 수도승 조각이 선 장면을 결합해 연상하기에 이르렀다. 위에서 언급한 고전 〈바다의 수도승〉의 21세기 버전이 내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그려지는 절묘한 상황이다. “서로 다른 도시에서 동시에 새로운 조각을 선보일 때, 조각은 사람들의 영혼에, 관념에 더욱 강력하게 자리 잡는다”는 걸 이미 경험한 작가는 전시 제목인 «넌스 앤 몽크스 바이 더 씨»의 문제의 ‘바다’를 이 항구도시로 설정하는 묘수를 발휘했다. 더욱이 회화 작업군인 이른바 ‘매티턱’ 연작의 존재감까지 모두 중의적으로 담아내는 이 제목은 서울과 부산 사이 5백km가 넘는 거리감을 일시에 자기 예술세계의 스펙트럼으로 편입시킴으로써, 현대미술의 가장 큰 미덕인 함축성, 상징성, 관념성 등을 영리하게 과시한다.
매티턱은 작가의 집 겸 작업실이 위치한 뉴욕 롱아일랜드의 지명이다. 헤겔은 프랑스혁명 중에 신문을 읽는 행위로 아침 기도를 대신했다지만, 론디노네는 코로나 시국에 바다가 보이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의 시간을 보냈다. 시를 쓰고,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보는 등 혼자만의 시간에 몰두하던 론디노네는 특히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분리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해 질 녘의 풍경을 수채화로 그려냈다. 하늘과 바다, 그 사이의 태양은 계절과 날씨, 시간대에 따라 시시각각 형태를 달리하고, 작가의 감정에 따라 심상도, 그 색도 달라진다. 그의 작업 중 가장 사적인 순간에 탄생한 직관적인 이 회화는 오직 보기 위해 존재하는 작품이다. “말로 표현하는 대신 눈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눈앞에 있는 것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고백은 이 그림 앞에서 더 진솔하게 읽힌다.

스위스 출신의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 Photo: Brigitte Lacombe
이 그림들은 세상에서 유일한 이름을 가진다. 작품이 완성된 날짜를 예컨대 ‘siebterfebruarzweitausendundzweiundzwanzig’, 즉 ‘이천이십이년이월칠일’로 적어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이 풍경을 마주한 찰나를 영원으로 기록하고자 염원하는 방식은 구름 연작이나 풍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론디노네에게 자연과 우주, 시간은 동의어이며, 그저 흘러가버릴 지금을 기록한다는 건 곧 열망과 욕구, 정서적 상태를 마주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과 내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 같은 것처럼. 그림 사이사이 회색의 텅 빈 벽이 자리하는 듯, 마법 같은 순간 사이사이에는 지리멸렬하거나 지긋지긋하거나 절망스러운 삶이 있다. 오늘과 내일 사이의 또 다른 시공간, 깊은 감각으로 보고 느껴야만 비로소 존재하는 순간이 있다. “일기를 쓰듯 우주를 기록한다”는 론디노네에게도, 그의 작품 앞에 선 우리에게도 “이 계절, 이 하루, 이 시간, 이러한 풀의 소리, 이렇게 부서지는 파도, 이 노을, 이러한 하루의 끝, 이 침묵”은 공평히 도래한다. 이 작은 프레임 밖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자연의 풍경이 위대하다면, 그것은 결국 나의 ‘심적 풍경’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의 내적 자아 사이의 탐구”라는 임무를 받고 온 수녀와 수도승은 절절히 성찰해야 하는, 가장 난해하고도 고유한 우리의 우주에 사색의 에너지를 채우고는 홀연히 이곳을 떠날 것이다.
※ 우고 론디노네의 «nuns and monks by the sea»전은 국제갤러리 서울과 부산에서 4월 5일부터 5월 15일까지 열린다.
윤혜정은 국제갤러리 이사로 활동 중이며, 예술에 관한 다양한 결의 글과 인터뷰를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