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세계의 마음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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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세계의 마음

예술로 모든 걸 하는 수퍼플렉스가 ‘계약서 놀이’를 제안한다. 유일한 규칙은 어린이들이 제시하는 룰에 철저히 따르며 ‘어린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BAZAAR BY BAZAAR 2022.04.11
 
수퍼플렉스와 KWY.studio가 덴마크 빌룬 시 1백21명의 아이들과 함께 제작한 공공미술작품 〈Play Contract〉. 2021년 ‘어린이 수도(Capital of Children)’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레고그룹 지주사 키르크비(KIRKB)가 빌룬 시민과 방문객을 위해 마련한 선물이다.

수퍼플렉스와 KWY.studio가 덴마크 빌룬 시 1백21명의 아이들과 함께 제작한 공공미술작품 〈Play Contract〉. 2021년 ‘어린이 수도(Capital of Children)’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레고그룹 지주사 키르크비(KIRKB)가 빌룬 시민과 방문객을 위해 마련한 선물이다.

지금 덴마크 윌란반도의 빌룬(Billund)이라는 소도시에서는 동화에나 있을 법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인구 몇 천 명 정도인 이 마을이 유명한 건 레고 그룹의 본사가 위치해서이기도 하지만, 도시 자체의 행보 때문이다. 빌룬은 스스로를 ‘어린이 수도(Capital of Children)’라 칭하고, 세상에서 가장 어린이 친화적인 도시가 되고자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레고 덕에 번듯한 국제공항까지 얻은 알짜배기 소도시에 어울리는 이벤트라고 생각했었다. 레고는 주식시장에 기업공개를 하지 않은 비상장 기업으로 유명한데, 이미 충분한 이윤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는 이 기업은 종종 레고로 작업하는 미술가 아이 웨이웨이에게 “정치편향적 작업에 재료를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게다가 부모들이 더 좋아하는 레고는 지난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평판 좋은 기업’ 6위를 차지한 바 있다. 하지만 빌룬의 어린이 수도 선언문을 읽은 후 나는 의심 어린 선입견을 아침 안개처럼 거두었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어른들만큼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은 빌룬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로 만듭니다. 놀이를 통한 배움을 지켜나가고 있는 곳, 빌룬의 사람들이 모여 어린이 수도를 건설하는 것은 재미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더 똑똑하고, 더 재미있고, 더 인간적인 미래와 삶. 놀이, 학습, 창의성이 교육, 사업, 도시계획, 도시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곳. 빌룬은 세계시민을 창조하는 곳이며, 우리가 유일하게 바라는 건 우리 어른들이 놀이를 다시 배우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호기심이 강하고 놀이를 통해 삶을 배우지만, 더 많이 배울수록 덜 놀게 됩니다. … 아이들은 함께 놀 때 아무도 보지 못하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이하 생략)”
확고한 신념이 전혀 생경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난 이미 첫 문장에 감동해버렸다. 어린이들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어른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시선, 어른들의 기준에 맞게 어린이들을 창의적으로 키우겠다는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그렇게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겠다는 의지,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를 개발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른에게도 놀이가, 그 시간 자체가 중요하다는 믿음. 이는 단순한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과 어린이의 삶을 동일한 가치로 놓는 태도 자체에 대한 문제다. 덴마크에서 활동하는 3인조 작가 그룹 수퍼플렉스가 ‘어린이 수도 10주년’을 맞이해서, 각계의 지식인들이 탁상공론을 나누는 세미나나 으리으리한 파티가 아니라, 조각공원에 기념비적 속성이라고는 없는 공공미술작품 〈Play Contract〉(2021)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Play Contract〉는 수퍼플렉스가 건축가, 큐레이터, 교육자 등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KWY.studio 그리고 빌룬의 아이들 1백21명과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이다. 아이들은 레고 블록으로 직접 놀이터를 설계하고,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어른 예술가들은 어린이들의 생각과 의견을 반영해 핑크색 대리석으로 직접 구현해 보였다. 사진으로 보면, 아이이든 어른이든 거대한 대리석을 기구 삼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먼 과거나 먼 미래에서 온 것 같은 향수를 자극한다. 무얼 하고 놀아도 좋았던 나의 어린 시절, 영원히 반복될 미래의 그 시절에 대한 기억 말이다. 어쨌든 수퍼플렉스는 “공정의 흔적과 불규칙한 자연의 속성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여 작품 제작에 반영했다”고 밝혔는데, 예술가가 가장 큰 권한인 재료의 가공이라는 통제력을 최소화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품은 의도를 강조하는 막중한 제스처다.
5개의 덩어리로 된 설치조각은 갖가지 독특한 모양을 한 3백 개의 돌로 구성되었다. 아침 해가 비치거나, 황혼의 그림자가 드리우거나, 비가 오기라도 하면, 대리석 색이 자연스레 변화하도록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매끈하게 정제된 형태가 아니라, 표면 처리를 하지 않아 잘린 흔적이 그대로 남거나 모서리가 부서진 날 것의 상태이다. 실용적인 부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태곳적부터 존재했을 것 같은 이 미술작품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지를 매번 확인하거나 증명해야 하는 어른들로 하여금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끔 한다. 현실 속 어른들은 이 작품에 전제된 덕목들, 즉 다양성, 우연성, 통제불가능성, 포용성, 비실용성, 유연성 등을 양손에 쥔 채 운영의 묘를 발휘할 뿐, 이들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의미 있는 예술작품으로 무엇을 하는가 하면, 그냥 논다. 이 놀이에는 하나의 룰만 존재한다. 어린이들이 정한 규칙에 무조건 따를 것. “대부분의 공공미술이 어른들의 관점에서 만들어진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어린이들이 직접 만들고, 모든 방문객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의무사항을 벽면에 새겨 놓았다.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를 이용할 때 어른들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시간 개념에서 벗어나 놀이가 얼마나 지속되든 아이들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이를 통해 어른은 놀이의 즐거움을 재발견하고, 상상력을 펼치며, 멋진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어른이 이 조항을 위반할 시 어린이들이 구제할 수는 있지만, 고집을 부리면 여길 떠나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법 좋아하는 어른들을 위해 작품의 법적 근거까지 명시해두었는데, 모든 건 어린이의 놀 권리를 보장하는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1조에 따라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남자, 야콥 펭거, 브외른스테르네 크리스티안센, 라스무스 닐슨으로 구성된 수퍼플렉스 사이에는 어떤 계약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자신들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어보자는 공통의 생각이자 목표, 꿈이 있을 뿐이다. 기후, 환경, 에너지, 예술기관, 예술시장, 도시, 역사, 난민, 노동, 민주주의, 권력, 기업, 경제, 저작권 문제 등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거의 모든 문제를 미술로 발언해왔다. 한국에서도 종종 작업 및 전시를 선보였는데, 마침 3월 중순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그룹전에 참가, 작업 〈Free Beer〉를 공개한다. 이와 함께 수제맥주인 ‘Free Beer’도 판매하는데, 맥주 레시피를 오픈소스로 공개하면서 누구든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는 열린 저작권 개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맥주를 사 먹는 행위로 미술작업의 일부가 될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이다. 광주공원에 유네스코 본부의 상임위원 화장실을 복제한 화장실 〈Power Toilets/UNESCO〉(2010)를, 파주 도라산전망대에 〈one two three swing!〉(2019)을 설치하기도 했다. 특히 테이트 모던 터바인홀에서 선보인 그네 작품은 만약 모든 인간과 동물들이 같은 순간에 점프할 경우 그 무게와 충격이 일시적으로 행성을 흔든다는 신박한 이론에 착안한다. 함께 만들어가는 집합적 에너지가 행성(세상)을 움직이고 중력(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은 수퍼플렉스의 작품들까지 모두 관통한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순진한 예술가들의 그저 착한 작업이라 치부하겠지만, 그간의 수퍼플렉스 작업 중에서 가장 고난이도로 보인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을, 예컨대 권력과 자본의 유대를 저격하는 예술가의 반어법에 감탄하는 것보다 어렵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후자가 지식과 개념이라면, 전자는 상상과 실천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 서로 존중하고, 약자를 차별하지 말고, 관용의 정신을 발휘하자는 이야기에는 익숙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보다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익숙하지 않다. 어느 누구도 어린이가 아닌 적 없었지만 본능과 경험, 기억과 추억으로 뒤범벅된 어린 시절을 과정 혹은 과도기로만 기억한다. 그렇기에 이 공원에서는 무장해제한 어른만이 즐겁게 머물 수 있다. 예기치 못한 놀라움을 받아들이고, 통제 의식을 내려놓고, 세상의 시간 개념에서 벗어나,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내 안에 숨은 어린이를 깨워 그들의 규칙에 따라 신나게 노는 것만이 가치 있는, 이른바 위치와 지위의 변수를 지운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유토피아다.
도대체 믿기지 않는 전근대적 전쟁을 매일 목격하고 있는 요즘이다. 셈에만 능할 뿐 상상할 줄 모르는 어른들은 이렇게 폭력적이고 무지하고 어리석다. 그런 면에서 〈Play Contract〉는 어른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읽힌다. 우리가 만든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린이의 마음으로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한가? 예술가란 “설령 실패할 운명의 미션이라 해도 끝까지 해보는 사람”이라 믿는 수퍼플렉스가 이제껏 해온 어떤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어른들이 더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그런 세상에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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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저자)
    에디터/ 손안나
    사진/ Torben Eskerod, 수퍼플렉스 제공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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