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맹의 수장, 올리비에 루스테잉의 10여년의 발자취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Fashion

발맹의 수장, 올리비에 루스테잉의 10여년의 발자취

발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지난 10년간 파리 패션계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도전해왔다. 그 결과 발맹은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났으며 그에 대한 평판 또한 180도 달라졌다.

BAZAAR BY BAZAAR 2022.03.27
 
루스테잉이 착용한 의상과 액세서리는 개인 소장품.

루스테잉이 착용한 의상과 액세서리는 개인 소장품.

저는 결코 반역자나 분열하는 사람이 되려 하지 않았어요. 어릴 때는 시스템을 신경 쓰지 않아요. 그저 자신만의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 하죠.
 
 (왼쪽부터) 파리 거리에서 포착된 킴 카다시안. 발맹의 2014 F/W 컬렉션에 참석한 리아나. 그레미 어워즈에 참석한 제인 폰다. 2015년 메트 갈라(Met Gala)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제니퍼 로페즈. 2018년 코첼라 뮤직 & 아트 페스티벌에서 공연 중인 비욘세.

(왼쪽부터) 파리 거리에서 포착된 킴 카다시안. 발맹의 2014 F/W 컬렉션에 참석한 리아나. 그레미 어워즈에 참석한 제인 폰다. 2015년 메트 갈라(Met Gala)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제니퍼 로페즈. 2018년 코첼라 뮤직 & 아트 페스티벌에서 공연 중인 비욘세.

잿빛이 드리운 파리의 겨울. 전 세계에서 가장 시크하다는 파리지앵의 기분조차 우울하게 만드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패션 디자이너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흠잡을 데 없는 모습으로 사무실에 도착했다. 오전 10시임에도 날렵한 블랙 블레이저에 후디를 매치한 올 블랙 룩과 오버사이즈 선글라스를 착용한 그의 모습은 언제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2011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이래 루스테잉은 발맹 하우스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7백40만 명을 보유한 그는 대표적인 패션계 셀러브리티다. 또한 25세의 나이에 이브 생 로랑 이후 파리에서 가장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고 럭셔리 하우스를 지휘하는 최초의 흑인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따르기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루스테잉은 현존하는 어떤 디자이너보다 럭셔리 하우스의 의미를 재정립한 것으로 손꼽힌다. 그는 소셜미디어가 성행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를 활용했고, 인플루언서를 앰배서더로 내세웠다. 발맹의 여성상에 대한 그의 비전은 때때로 분열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남다른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2013년 첫 번째 패션 캠페인에 리아나를 캐스팅했고, 일 년 후에는 킴 카다시안과 칸예 웨스트를 모델로 선정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성복은 물론 쿠튀르까지 부활시켰으며 전통적인 패션 마케팅을 초월한 뮤직 페스티벌부터 스트리밍 단편 드라마 시리즈, 넷플릭스, 바비(Barbie)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협업을 통해 브랜드의 범위를 확장했다. “저항하거나 분열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적이 없어요.” 루스테잉이 커피를 마신 뒤, 검은 대리석 책상 뒤에 있는 의자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소셜미디어는 사치일까요? 시크한가요? 우아한가요? 어릴 때는 그런 말을 묻지 않았죠. 어릴 때는 시스템을 신경 쓰지 않아요. 그저 자신만의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할 뿐이죠.”
지난해 9월은 그가 발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지 10주년이 된 해였다. 급변하는 패션계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군림한 10년의 시간은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한 놀라운 이정표였다. 이를 기념하며, 파리 세갱섬의 센 뮤지컬 공연 센터에서 6천여 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선보인 2022 S/S 컬렉션은 스타들이 총출동한 패션쇼였다. 2막을 알리는 비욘세의 축하 음성 메시지와 함께 등장한 나오미 캠벨은 루스테잉의 최고의 작품을 재해석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프랑스의 전 영부인인 카를라 브루니가 쇼를 마무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틀간 진행된 발맹 페스티벌에는 도자 캣(Doja Cat)과 스코틀랜드의 록 밴드 프란츠 퍼디난드(Franz Ferdinand)가 헤드라이너로 등장했으며 티켓을 소지한 일반 대중에게도 공개되었다. 쇼의 입장료는 저렴했고 모든 수익금은 글로벌 자선단체(RED)와 글로벌 펀드에 기부되어 에이즈 및 코로나로 발생한 팬데믹 사태에 투쟁하는 데 사용되었다. 페스티벌과 컬렉션은 우리 모두는 물론 루스테잉이 최근에 겪은 복잡한 관계에 대한 감정과 자유에 대한 기쁨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쇼가 끝나고 일주일 뒤, 그는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사진을 업로드했다. 평소처럼 흠잡을 데 없는 셀피가 아닌,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집의 벽난로가 폭발해 부상을 입었다고 썼다. 소방관들에 의해 구조된 그는 얼굴과 팔, 가슴에 2도 화상을 입은 채 다음 날 눈을 떴다. 회복하고 흉터가 치유되는 데 몇 달이나 걸렸지만 그는 터틀넥과 후드 티, 여러 개를 레이어드한 반지로 이를 숨겼다. “세상이 무너진 느낌을 받았지만, 셀피를 찍을 때면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어요. 그 해의 퍼포먼스는 정말 극적이었어요.” 그가 말했다. “저는 소셜미디어는 현실이 아닌, 우리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테잉은 불행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여정을 스케치했고, 그를 뒤덮었던 드레싱과 거즈는 2022 S/S 컬렉션의 드레스 제작에 큰 영감을 주었다.
루스테잉은 2009년, 로베르토 카발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서 파리로 건너와 당시 발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크리스토프 데카르넹과 함께했다. 1945년 피에르 발맹이 설립한 하우스를 되살린 인물인 데카르넹은 그야말로 오리지널 ‘발마니아(Balmania)’였다. 그의 지나친 대담함(일부는 쓰레기라고 부르기도 했다)은 깡마른 파리지앵의 유니폼으로 각광받았다. 1천4백 달러가 넘는 찢어진 스키니 진은 크리스털 프로그 단추와 날렵한 파워 숄더의 밀리터리 재킷, 몸에 딱 달라붙은 미니 드레스와 함께 전설적인 피스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무명의 25세 디자이너 루스테잉이 발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맡게 되었고 그는 자신이 바라본 19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대한 사고방식을 재해석해 발맹의 성장을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춘기 시절 활약했던 슈퍼모델, 섹시함과 쇼맨십에 대한 정의를 심어준 MTV 시절의 마이클 잭슨까지, 그는 피부를 드러낸 디자인으로 화려함을 더하고 스트리트웨어적인 부분을 믹스 매치했으며 동시에 자수 장식과 코르셋, 금속을 엮은 디테일, 퀼트 형태의 가죽으로 장인정신을 부여했다.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탄생시킨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해석의 미니멀리즘이 강타한 시절, 대중문화와 맥시멀리스트를 향한 루스테잉의 사랑은 회의론을 불러일으켰다.(2016년 〈뉴욕 타임스〉는 그의 디자인을 ‘습득한 취향(acquired taste)’이라 평하기도.)
 
(왼쪽부터) 2012 F/W, 2013 F/W, 2015 S/S, 2018 S/S, 2022 S/S, 2022 S/S 발맹 컬렉션.

(왼쪽부터) 2012 F/W, 2013 F/W, 2015 S/S, 2018 S/S, 2022 S/S, 2022 S/S 발맹 컬렉션.

그는 자신을 표현하고 진정성을 전하는 방식으로 인스타그램을 활용했다. 인스타그램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미디어로 여기는 것 자체가 이제는 우스운 시대지만 당시 럭셔리 패션에서 진지함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에 인스타그램은 마케팅 수단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때였다. “올리비에는 인스타그램을 활용한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그의 이미지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2007년부터 발맹과 함께한 최고마케팅경영자(Chief Marketing Officer) 트샘피 디스(Txampi Diz)가 말했다. “발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명되었을 때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루스테잉이 말했다. “저는 정말 어렸고, 일을 진행하면서 나이 때문에 좌절했던 적도 종종 있었어요. 어릴 뿐만 아니라 무명 디자이너였기에 두렵기도 했고요. 당시에는 몇몇 유명 디자이너들의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전 시작이 좋지 못하거나 되려 혁명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의 대한 비평이 잠재워지게 된 것은 수백만 명의 충성스러운 팔로어, 그리고 10년 전보다 무려 7배나 증가한 매출 때문이었다. 루스테잉의 능력은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탁월했다. 새로운 패션 카테고리를 확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는 발맹의 엔터테인먼트와 혁신적인 콘셉트 스토어인 원더랩(Wonderlabs)을 론칭하며 브랜드의 다각화에 앞장섰다. 올 1월에는 NFT 메타버스 시장에 진출하기도. “올리비에는 항상 새로운 패션 하우스가 필요치 않다고 느껴왔어요. 그는 발맹을 글로벌 브랜드로 만들었죠.” 디스가 말했다.
그가 일궈낸 성과는 노력 없이 이뤄질 수 없었으며 늘 싸워야 했다고 루스테잉은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어요. 하지만 과거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필요가 있죠.” 현재까지 이룬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 중 하나는 발맹이 나야가야 할 목표에 포괄성이란 항목을 추가한 것이다. 발맹 군단(Balmain Army)으로 알려진 다양하고도 대담한 성격의 군단이 함께하는 루스테잉의 쇼와 캠페인, 그리고 쇼의 프런트 로는 늘 부유한 파리 지역 외부에 존재하는 다문화 세계를 대표해왔다. “저는 이러한 움직임을 계속 진행하고 있어요. 이제는 발맹을 넘어 파리의 모든 이들이 특유의 특권의식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만나기 일주일 전, 루이 비통 맨즈웨어의 아티스틱 디렉터 버질 아블로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업계를 뒤흔들었다. 그의 나이는 겨우 41세였다. “너무나 비통하고 충격적입니다.” 루스테잉은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한때는 둘이었지만, 이제는 저 혼자네요.(아블로는 루이 비통의 첫 흑인 아티스틱 디렉터였다) 제가 남들과는 다르게 일하는 것이 어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단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새로운 세상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죠.” 루스테잉은 특히 고상한 럭셔리 세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동질성에 대해 말했다.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들은 단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할 뿐이죠.”
198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루스테잉은 늘 외톨이였다.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서 첫 달을 보내다 백인 부부인 안경사 리디안 루스테잉(Lydiane Rous-tenig)과 항구 관리인 브루노-장 루스테잉(Bruno-Jean Rousteing)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부르주아 남서부 도시 보르도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심오한 완벽주의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소문난 워커홀릭이기도 하다. 유일한 휴식은 아침에 하는 복싱이 전부지만, 그는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유머 감각까지 갖춘 경우는 아주 드물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는 절대 화를 내지 않거든요.” 디자이너와 긴밀히 협력하는 스타일리스트 샬럿 스톡데일(Charlotte Stockdale)이 말했다.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다큐멘터리 〈원더 보이(Wonder Boy)〉는 루스테잉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을 다뤘다. 그는 생모를 찾는 과정을 공개하며 가슴 아픈 상처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겨우 14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손글씨를 보며 자신이 상상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닌, 사춘기 소녀였을 어머니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또한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둘의 관계가 합의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슬픔에 잠겨 흐느끼는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영화가 끝날 무렵, 그는 더 이상 과거를 캐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중단했죠. 무엇을 발견하든 그건 어머니와 저 사이의 일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어머니가 원했다면 당신이 먼저 그를 찾았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수백만 명의 팔로어는 물론, 루스테잉과 매일 함께하는 크레이이티브 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름 속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삭제했다.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부엌에 자리한 긴 테이블에는 저녁식사를 하는 그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여러 장 놓여 있었다. “저 사람이 정말 외로워 보인다고 느꼈어요.” 그가 처음 편집본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을 이야기했다. “외롭나요?”라는 질문에 “네, 그럼요.”라고 답했다. 루스테잉은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 이유는 가장 인간다운 면모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제 어깨 패드에 장식된 글리터처럼 보여지는 게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성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모두가 고통받아요.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정점을 찍은 남자의 외로움을 통해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말라’ 라는 메시지를 전하죠.” 순수한 솔직함을 비관주의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한 해를 보낸 뒤, 루스테잉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들을 회상하며 인스타그램에 밝은 게시물들을 업로드했다. 그는 여전히 낙관주의자다. “지난 10년간 어떠한 고난도 없었다면 승리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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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Alice Cavanagh
    번역/ 채원식
    사진/ Christopher Anderson
    Beretta/Sim(Shutterstock)
    Michel Dufour(Wireimage)
    Valerie Macon/AFP VIA(Getty Images)
    Jackson Lee(Getty Images)
    Kevin Winter(Getty Images)
    Dan & Corina Leccav Balmain 제공
    메이크업/ Samira Pikpo
    프로덕션/ Celine Guillerm(Octopix)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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