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성식(b.1980), 〈밤(Night)〉, 2015-2016, 158.8x407cm, 캔버스에 아크릴.
문성식의 회화 〈밤〉을 보면서, 가로 4미터 크기의 그림 어느 부분에 라가시 행성 사람들을 숨겨두어도 좋겠다 싶었다. 아니, 이미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성식이 그려낸 밤에는, 나의 세상이 전부라 착각하는 이들을 각성할 만한 일들이 벌어진다. 알고 있지만 종종 외면하거나, 도외시하거나, 못 본 척 눈감는 세상의 갖가지 일들은, 그림 속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레오퍼드 무늬의 표범이 노루를 공격한다. 노루 무리 중 한 녀석은 무엇 때문인지 뒤처진다. 들개 무리가 다른 들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어미 새가 둥지를 지킨다. 사냥에 성공한 올빼미가 전리품을 낚아채 날아간다. 어미 여우가 새끼 여우들에게 먹이를 갖다 먹인다. 수노루 두 마리가 암노루를 사이에 두고 뿔을 맞대 싸운다. 한 남자가 나뭇가지를 꺾는다. 남자들이 사냥한 표범을 옆에 두고 불을 피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민다…. 이 밤의 세상에는 자연계와 인간사의 구분이 없다. 모두 딱딱한 덩어리 위에서 그렇게 악다구니 치며 살고 있다. 먹고 먹히는 관계, 싸우고 지키는 관계, 이기고 지는 관계. 감히 잔인하다 단언할 수도, 그렇다고 손쓸 수도 없는 불편하지만 엄연한 진실이다.
작품 제목은 ‘밤’이지만, ‘산’이라는 부제를 달아도 무방하다. 특유의 섬세한 묘사는 각종 서사가 움찔거리는 땅을 다채로운 질감과 색감으로 그려내는데, 너무 사실적인 나머지 실재하는 산이 아니라 국적불명의 땅,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함축한 추상적인 땅으로 완성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표범의 레오퍼드 무늬도 한몫한다. 드문드문 나무가 서 있긴 하나 대부분 돌덩어리로 구성된 이 산은 차갑고 황량하며, 기이하고 무섭기도 하다. 반면 이 산과 맞닿은 하늘은 이질적일 정도로 낭만적이며 순수하게 느껴진다. 별이 떠 있는 까만 밤하늘이 어찌나 선명하고 또렷한지, 별을 조명 삼은 산중의 밤풍경은 오히려 희부옇다. 별이 형형한 밤하늘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본능대로, 순리대로 살도록 부추기는 동시에, 밤의 산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충돌의 상태, 즉 삶의 필연적인 양가성을 역설하는 장치가 된다. 하늘과 별은 비현실적이지만, 그 아래 펼쳐지는 세상은 분명한 현실이다. 평화롭고 서정적인 풍경과 치열하고 잔혹한 현실은 늘 공존하지만, 우리는 이 섭리를 종종 잊을 뿐이다.
“삶의 원형 같은 풍경화를 그리고 싶었어요. 자연이 곧 삶이니까요. 사람의 감정도 그렇잖아요. 아무리 평온해 보여도, 누구에게나 어두운 구석이 공존하죠. 이 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 혹은 이를 대면한 우리 마음처럼 마냥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태, 그게 바로 삶인 것 같아요. 어떤 충돌의 느낌이, 내 안에 늘 자리하고 있어요. 그래서 의도하지 않는데도,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공존하거나 교차하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본다’는 것은 세계를 만드는 하나의 주효한 방식이며, 그런 점에서 어떤 작가 혹은 작품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문성식의 드로잉 에세이집 〈굴과 아이〉에서 작가가 직접 쓴 어떤 글을 읽으며 나는 거의 울 뻔했다. “철수 할머니 집을 지날 때면 할머니의 현관 유리 너머로 푸른 텔레비전 불빛을 보았다. 파란 불빛이 껌뻑껌뻑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불빛만 껌뻑거렸다. 덩그런 집 안에서 작은 체구를 누여 텔레비전을 보며 울고 웃고 하다 잠드시겠구나 생각하니 밤은 사람에게 너무나 가혹하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고 혼자가 될 우리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110~111p) ‘리얼리스트’ 문성식은 ‘풍경의 초상(2011년 국제갤러리 개인전 제목)’을 그저 능수능란하게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아름다움, 기묘한, 더러움(2019년 국제갤러리 개인전 제목)’이 뒤섞인 ‘얄궂은 세계(2016년 두산아트센터 개인전 제목)’로 그려낸다.
문성식의 작업 저변에서 느껴지는 멜랑콜리의 정서가 비정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이 비정함은 ‘비정함을 인정하는 담담함’을 야기한다. 예컨대 〈밤〉이라는 같은 제목을 가진 다른 대형 회화에는 올무에 걸려 발버둥치는 노루와 이를 무심히 지켜보는 다른 노루 무리가 등장한다. 〈숲과 아이〉라는 작업에는 거대한 검은 숲 앞에 오도카니 멈춰선 아이가 있는데, 그 가련한 뒷모습만 봐도 숲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충돌이, 그 두려움과 무서움, 설렘과 호기심이 절절하게 읽힌다. 문성식의 고유한 시선은 자신의 주관적 경험과 기억을 넘어, 세계를 구성하는 연약한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혹은 불가해한 자연과 인간세상의 순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어떤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태도는 긴장감과 처연함의 정도를 달리하고, 회화적 방법론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맞물리며, 어떤 결과물로 내년 1월 국제갤러리 부산점 개인전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흔적과 운동감이 극대화된 새롭고도 낯선 드로잉 기법으로 그려낸, 이를테면 아름답게 흐드러진 벚꽃나무 아래 결별한 연인 같은 인간적인 동시에 역설적인 상황은 정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만나는 회화의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문득 낯선 세계에 온 것처럼 모든 사물, 대상, 존재들이 무심하게, 서로 어울리지 않게 놓여 있음을 종종 경험하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어떤 경계에 위치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없이 맑은 하늘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 행복과 우울의 경계를 실감한다.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실감한다. 집 안의 불빛을 모두 없애야, 빛과 어둠의 경계를 실감한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일 때, 밤의 아득함과 숭고함의 경계를 실감한다. 싫어하는 이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알게 될 때, 애정과 적의의 경계를 실감한다. 전력질주를 했기 때문이든,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든, 어쨌든 심장이 빨리 뛰어야 내 몸뚱이에 심장이라는 게 있음을 새삼 알게 되듯이, 안주하는 삶에서 한 발 벗어나 좀체 느낄 수 없는 날 선 경계의 지점에 서야 평소엔 눈감았던 또 다른 편의 세상을 인지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현실 혹은 현실성이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마따나 밝음 혹은 어둠 중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중간지대의 그늘에 가깝다.
어째서 내 삶에 내재한 이질성 혹은 양면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날로 궁색해지나 봤더니, 대체 언제부터 일상의 밝음을 극대화하고 어둠을 죽이려 애쓰게 됐나 봤더니, 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단순화되고 작아지면서부터다. 라가시 행성 사람들처럼 낮에 매몰되어 살면서,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면서, 나의 밤은 힘도, 정체성도 잃었다. 낮이 금한 것을 행하는 자유로운 이단의 시간이 아니라 빛나야만 하는 낮을 보장하는 시간으로 길들인 것이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밤의 풍성함을 말살하듯, 밝고 안온한 길을 선택해온 나는 스스로를 멜랑콜리한 상태에 두는 법을 잊었다. 그럭저럭한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삶의 이면을 향한 호기심을 번번이 이겼다. ‘광대한 세계와 우주는 본래의 크기를 잃고 납작해져버리며, 그 위태위태한 공간에 행복을 위한 환상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식이다. ‘순리대로’와 ‘순응하며’를 구분하지 못하는 꼴이다.
나의 시야 너머 보이지 않는 대상들과 생각해보지 못한 의미들,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낮이 아니라 밤이다. 그러므로 밤은 내가 대면해야 하는 내 삶의 그늘이자 모순의 본질, 불안을 헤치고 다시 향해야 할 또 다른 세계를 은유한다. 심리적 야맹증에 시달리는 내가 ‘밤의 질감’을 찾아 나설 언젠가, 철학자 알도 레오폴드의 명언이 작은 불빛이 되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두려움이 제거된 삶은 분명 초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