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바젤리츠와 그의 스튜디오, 2021. Photo: © Elke Baselitz 2021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 London•Paris•Salzburg•Seoul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일생 논란을 일으키며 자기 방식대로 살아왔다. 1938년 독일의 드레스덴 외곽 도이치바젤리츠에서 한스 게오르그 케른(Hans-Georg Kern)이라는 본명을 갖고 태어난 그는 동독에서 조형예술대학을 다니다가 ‘정치적으로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제명당했다. 서독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자신의 고향 지명으로 이름을 바꾼 바젤리츠는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때 과장된 남근을 손으로 잡고 있는 소년을 묘사한 그림으로 음란죄 혐의를 받으며 작품을 압수당했다. 이후에도 회화적 관습의 해체를 도모하다 1969년 처음으로 작품 구도를 거꾸로 뒤집기 시작했고 이 새로운 형식이 바젤리츠의 시그너처가 되었다. 1980년에는 안젤름 키퍼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선정되어 처음으로 조소를 시도했는데, 독일 TV 채널에서 한쪽 팔을 공중으로 들어올린 바젤리츠의 작품을 소개하며 BGM으로 나치 애국가를 사용했고 이후 크나큰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은 바젤리츠가 미국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2000년대 이후의 가장 큰 논란은 2013년 독일의 대표적 주간뉴스 잡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여성 아티스트들은 아주 훌륭한 아티스트는 될 수 없다는 요지로 말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그의 가장 최근의 해명은 지난 5월 미술전문매체 〈아트넷〉과의 인터뷰를 들 수 있다. 그 말은 자신이 말한 맥락에서 벗어난 채 인용돼 오해를 빚은 도발적인 발언 중 하나이고 예술을 쿼터(quota)에 의해 남성, 여성, 흑인, 백인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완전히 멍청한 짓이며 “훌륭한 예술과 형편없는 예술이 있을 뿐”이라는 답변이었다.
바젤리츠의 논쟁적인 언행을 접하며 드는 생각은 ‘현존하는 전설’은 도발적인 예술가의 역할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 작업량이 대변한다. 그는 80대 중반에 가까운 나이에도 매일 아침 작업실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는 10월 6일 문을 여는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는 개관전으로 30여년 간 함께한 바젤리츠의 개인전을 준비했는데, 이 전시에서 바젤리츠는 12점의 회화와 7점의 드로잉 신작을 선보인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렸던 «잊을 수 없는 기억: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러시안 페인팅» 전시 이래 15년 만이다. 이번 전시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예정된 대규모 회고전과 맞물리는 전시이기도 하다. “회고전의 주인공이 아직 살아 있을 경우 전시는 그해에 완성한 작품으로 끝을 맺습니다. 저의 퐁피두 전시도 2021년 작품이 전시를 마무리하면서 열린 미래를 기약합니다. 그저 다해가는 시간이 아닌, 나아가는 시간이 되길 희망합니다.” 서울에서 질문지를 보낸 지 정확히 일주일 만에 성실하고 단호하게 답변을 달아 보낸 바젤리츠의 마지막 말이었다.
〈Untitled〉, 2021, Red and black ink on paper, Image 66x51.1cm. Photo: Ulrich Ghezzi
〈Untitled〉, 2021, Red ink on paper, Image 66,1x51.1cm. Photo: Jochen Littkemann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대형 회화 연작에서 당신의 아내 엘케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고요. 당신은 수십 년 동안 엘케의 이미지를 매번 다르게 그려왔습니다. 엘케는 당신에게, 당신의 작품 세계에 어떤 존재인가요?
아시다시피 예술가는 모델에 의존적입니다. 초상화, 누드화, 실내화, 증기기관이나 다리미 또는 물병을 그린 정물화를 떠올려보세요. 그것이 무엇이든 핵심은 모델입니다. 저는 활동 초기에 모델 없이 작업했습니다. 당시 저는 독립적이고 추상적인 미술 작업을 하는 예술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1969년까지 완성된 제 그림들 속 알아볼 수 있는 모든 형상은 제가 직접 창조한 것입니다. 모티프를 뒤집기 시작한 1969년 이후로는 이런저런 큰 부가적인 것들을 지양하게 되었습니다. 상하를 뒤집기 시작하니 이미 그림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으로 보였습니다. 그 후로는 바로 제 앞에 있는 사물 또는 제 옆에 있는 무언가만으로 제가 구상한 이미지적 재현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나무, 공장, 스튜디오 한 구석, 절친한 친구. 그러다 점점 깊은 사적 관계를 담은 모델이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제 아내처럼요.
당신의 시그너처 스타일이 거꾸로 그린 그림이듯이 당신의 (예술) 인생 역시 거꾸로라는 생각이 듭니다. 1969년에 그림을 거꾸로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때나 이후의 혁신들 역시 시대에 발맞추는 대신 철저히 자기만의 방식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글로벌하게 가는 대신 로컬적인 스타일로, 미래로 나아가는 대신 과거의 것들을 탐구했습니다.
글로벌한 예술은 없다고 저는 꽤나 확신합니다. 예술은 언제나 그 자신의 기원과 동일시됩니다. 여기에서의 기원이란 국가나 시대, 문화 등 하나의 예술이 유래하고 탄생한 곳을 지칭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까지 이런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독일적인 것, 미국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늘 이 같은 관점이었습니다. 제 시선 또는 저의 길은 단 한 번도 미래를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과거로부터 얻은 통찰에 집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이미 거쳐온 무언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진지하게 뜻을 품고 작업하기 시작한 이래로 저는 항상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선 가능한 모든 정보를 취합한 뒤 자신에게 의미 있는 정보만 골라내는 작업이 선취되어야 합니다. 작업 초창기에는 이런 부분에 관해 확신이 없었지만 머지않아 아주 빨리 그리고 명확하게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소위 ‘세계적인’ 신(scene)을 유심히 관찰해왔으나 진입할 틈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결심했던 거죠.
이번 전시의 타이틀 «가르니 호텔»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착안한 발상에 유머를 더해 지어진 제목이라고요.
일반적으로 제 작업은 전통 회화 및 미술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은 유럽 아방가르드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작품입니다. 수많은 예술가가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피카소가 생애 마지막 시기에 겪었던 비극은 지금까지 수많은 예술가에 의해 작품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당시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을 대하는 예술계의 태도에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지요. 특히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서 전시했을 때는 아비뇽 시에서 피카소의 기증 제안을 거부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예술가의 실패 또한 제가 작업으로 다루는 예술 전통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에서 ‘가르니 호텔’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바는 일종의 저렴한 러브호텔로, 숙박이 목적이 아닌 즐기려고 찾는 공간이라는 뜻을 내포하기에 유희적인 의미를 담으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와 그의 스튜디오, 2021 . Photo: © Elke Baselitz 2021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 London•Paris•Salzburg•Seoul
예술은 언제나 그 자신의 기원과 동일시됩니다. 여기에서의 기원이란 국가나 시대, 문화 등 하나의 예술이 유래하고 탄생한 곳을 지칭합니다.
지난해 뉴욕 스카스테트(Skarstedt) 갤러리에서 당신과 바스키아의 1980년대 초반 작품을 함께 선보인 전시를 보았습니다. 전시 벽면에 당신의 이런 말이 인용되었죠. “The 80s helped me to rearrange everything.”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이 논란을 불러모았고 국제적인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뉴욕에서의 첫 개인전도 이 시기였고요.
1945년의 독일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시기였습니다. 문화까지도요. 먼저 프랑스 문화가 압도하더니 그 뒤에는 더 강력한 미국 문화가 들어왔습니다. 무거운 과거를 뒤로한 독일 출신 예술가로서 목소리를 내기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198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저는 안젤름 키퍼와 함께 확고한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저희의 메시지가 완전히 잘못 받아들여졌지만, 국제적으로는, 특히 미국에서는 전반적으로 환영받았습니다. 물론 독일의 과거 자체는 끔찍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지극히 주관적인 재해석을 선보일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저에게는 아주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예술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있었다면 언제인가요?
저는 상당히 오랫동안 성공의 경험 없이 작업을 해왔습니다. 돈이 없는 생활을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하였습니다. 끊임없는 위기였습니다. 캔버스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생활 환경에서는 매우 눈에 띄게 드러나는 위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된 건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간 1980년 이후부터였습니다. 비록 미국 문화가 지배적인 시기였으나 동시에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관심도 높았습니다. (올해 초 바젤리츠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 여섯 점을 기증하며 기증의 동기에 대해 특정 작품에 접근할 권한을 국가에 부여하는 독일 법의 제정을 반대하는 동시에 자유롭게 혁신적인 시도를 추구할 수 있었던 미국에 감사를 표한다는 요지의 말을 남겼다.)
미술가들은 이제는 사라진 마법사나 주술사의 역할을 대신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전 시대와 비교해 경외감을 경험할 기회가 훨씬 적은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교회 대신 미술관에 갑니다.
일반적으로 주술사라 하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한 개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주술사 같은 개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독일에는 이런 예술계의 주술사 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요셉 보이스입니다. 제 기준에서 이런 사람들은 항상 정당이나 이단 종교 같은 것들을 만들려고 하고 대규모 대중을 이끌려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저는 이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했지요.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방향. 그리고 저는 항상 저 자신하고만 비교해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아주 밀폐된 상태를 선호합니다. 물론 이 말이 제가 남들보다 겸손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미술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매장과 미술관을 방문하는 인파를 쉽게 볼 수 있지요.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나아가 그림은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다른 세상을 보는 시야를 제공하는 것 같고요. 과거를 통해 알 수 있듯 몸값이 가장 높은 예술가가 항상 최고의 예술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예술의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기 어린 평가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스운 소리지요. 전 시대를 통틀어 그림은 투자나 상속 자산으로 여겨졌습니다. 또, 미디어에서는 줄곧 예술가와 부정적인 운명을 엮어 이야기하길 좋아하지요. 누구는 다리가 너무 짧네, 누구는 자기 귀를 잘랐네, 누구는 눈이 멀었고, 대부분은 지독하게 가난하네 등등.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예술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요셉 보이스의 예술은 전위의 예술이고 루이즈 부르주아의 예술은 치유의 순간을 선사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예술은 어떤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서술한 내용은 사회 시스템 안에서 희망과 지혜라는 가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은 폭력적인 시대에 젊은 나날을 보냈습니다.(1945년 고향에서 멀지 않은 드레스덴에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본 바젤리츠 가족은 어느 건물 지하실에 숨어 있다 폭격이 멈춘 아침 식사 시간을 기해 손수레에 짐을 싣고 피난길을 떠났다.) 2021년 세계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폭력적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전쟁은 사라졌지만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그리고 부의 불평등으로 분열되고 있으며 기후위기도 심각합니다. 알다시피 팬데믹도 현재진행형이지요. 끊임없이 인간 형상을 화면에 새기는 작가로서 이 시대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Nein. Nein. Nein.)
〈Einzelzimmer, Einzelbett〉, 2021, Oil on canvas, Image 250x200cm Frame 254x204x5cm (GB 2530).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 London•Paris•Salzburg•Seoul Photo: Jochen Littkemann
안동선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예술가 내부에서 길어올린 영감으로 창작한 작품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 내면의 신성에 집중하게 하는 ‘마법’에 매번 탄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