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호주 원주민 출신 작가 다니엘 보이드의 예술 화두는?

호주 원주민 출신의 미술가 다니엘 보이드는 지워진 기억과 잊혀진 역사를 현재에 복원함으로써, 21세기적 상실의 시대 속 예술과 삶을 관통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발굴한다.

BYBAZAAR2021.05.15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시간이 적층되어 있는 소우주에서 다니엘 보이드.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시간이 적층되어 있는 소우주에서 다니엘 보이드.

 
다니엘 보이드(Daniel Boyd)는 호주 원주민 출신이다. 정확하게는 시드니에서 활동 중인, 케언스 태생 쿠즐라-강갈루(Kudjla-Gangalu) 혈통의 현대미술가다. 세 아이의 아버지인 동시에 다정한 아들인 그는 6월 예정인 서울 전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는 와중에도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가고, 연로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섬의 북쪽 끝에 있는 케언스에 들른다. 보이드는 삶과 예술이 한 몸이라는 진리를 정석대로 실천한다. 가족으로 상징되는 자기 존재의 이해와 타인(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고찰, 그리고 호주라는 터전에 스민 역사와 신화의 탐구가 그의 예술 화두임을 기억한다면, 둘은 더욱이 분리될 수 없다. 특히 그는 강자의 일방적 시선으로 기록한 역사 면면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시간과 존재를 복원해왔다. 호주의 탈식민주의 역사는 그의 작업에서 고조부의 초상화나 당시인들이 사후세계로 향한 길이라 믿은 모래그림을 되살리거나 제임스 쿡을 위시한 건국신화의 아이콘들을 해적으로 그려내는 등 사적 역사와 거대 서사를 넘나든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모두가 맹렬히 내달리는 오늘도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그가 말한다. “식민주의는 선대의 문화와 전통을 변화시켰죠. 거부당해온 문화적 정체성을 작업을 통해 들여다보고자 해요.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끼치기에, 잠재된 것을 활성화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풍자나 재현에 머물지 않고 미화되거나 잊혀진 서사에 자유를 부여하는 힘, 보이드의 저력은 회화의 물성으로 더욱 가시화된다. 2019년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의 한국 첫 개인전을 찾은 관객들은 그림 표면을 뒤덮은 투명한 점에 매료되었다. 구체적인 작업 방식은 비밀에 부친 채 그는 투명한 풀로 표현한 각 점들이 자신이 세상을 보고, 이해하며, 시선을 표현하는 주효한 도구, 즉 일종의 ‘렌즈’라 설명했다. 무수한 렌즈는 단일한 시선이 아닌 다수의 서사로 세상을 읽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지만, 동시에 작품의 일부를 가림으로써 이면을 강조하는 은유적 장치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인 렌즈의 개념에 힘입어, 보이드의 회화는 ‘미술작품을 본다’는 행위의 온전한 경험을 선사한다. 점묘법을 상세히 관찰하고 렌즈의 존재를 실감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다가가야 한다. 반면 지나치게 가까이 서면 각각의 점만 눈에 들 뿐 외려 그림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최적의 거리를 찾아 몸을 계속 앞뒤로 옮겨야 했다.
 
관객이라는 이들은 자신과 작품, 부재한 작가와의 적정한 물리적, 심적인 거리감을 찾아내려 ‘적극적 주체’를 자처해야 하는데, 애초에 보이드는 이를 면밀히 의도한 것 같다. 빛을 반사, 굴절시키는 렌즈의 존재감은 이를 둘러싼 불투명한 공간 덕에 더 부각되고, 무의식적으로 음양의 대비와 차이를 인지하게 되면서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이 어둠의 공간은 긍정과 부정의 에너지가 응축된 미지의 대상이자, 기억이 손실 혹은 소실된 역사적 경험을 자각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녹아든 부분이다. 과거나 미래의 불가해성과 잘못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주류적 서사를 다르게 수용할 권리를 내포할 뿐 아니라 나를 과거와 지속적으로 (다시)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요동치는 역설의 공간이다.
 
다니엘 보이드의 이번 개인전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을 화두로 실제와 허구, 과거와 현재, 소설과 미술, 회화와 영상의 영역을 오갈 예정이다.

다니엘 보이드의 이번 개인전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을 화두로 실제와 허구, 과거와 현재, 소설과 미술, 회화와 영상의 영역을 오갈 예정이다.

 
역사를 다루는 예술은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에 압도되거나 교훈적 태도에 잠식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역사의 정당성을 묻고 있음에도 그의 작업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사색적으로 공명하는데, 이는 혼돈의 아름다움, 몰이해 속 이해, 다름의 미학, 타자에 대한 인정 등을 고유한 미술언어로 지지해온 작가의 노력이 만들어낸 다차원적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몸과 정신, 공동체와 땅의 오랜 기억을 자각하고 공유하며 창조한 복합적 내러티브는 특수한 역사를 초월해, 평소 우주와 관계 맺는 방식을 깊이 숙고해온 그의 작업에 보편성을 더한다. 호주 역사와 무관한 이들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우리의 서사’ 말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삶의 일부를, 시간 속 순간을, 내 안의 나를, 사실 속 진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부지불식간에 잊거나 잃어가는 거대한 상실의 시대에, 보이드는 각자가 대면한 심연의 안팎에 가 닿도록 독려한다.
 
“원주민의 대지에 살고 있는 사진작가로서, 그가 식민지의 역사를 대면하기 시작한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 생각해요. 독창적이고, 지적인 방식으로 난해한 주제를 다루지만 이를 개인적, 보편적인 시각으로 풀어내며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회화 속 여백은 작업이 품은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오랜 시간을 보내길 원하게 만들어요.” 현지 촬영을 진행한 린달 아이언스(Lyndal Irons)는 이런 후기를 전했다. 보이드는 마치 의식처럼 끊임없이 음악을 틀어둔다고 했는데, 사진가는 정말 버닝 스피어, 원포, 유-로이의 노래를 종일 들었다고 증언했다.
 
인터뷰를 준비하던 중 〈우리 시대의 화가〉를 다시 읽다가 그를 위해 밑줄을 그었다. “좋아하는 작품을 보는 건 그 정신을 흠모하기 때문이고,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래, 멋진 창작이야. 그러나 나중에 자신이 흠모했던 그림의 기원이었을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 어떤 풍경, 어떤 사물을 보게 되면, 그 작품의 기초가 된 건 창작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은 늘, 아무튼 내 경우에는 대단히 감동적이다. 창작해낸 것처럼 보이는 그 진실을 제시하는 것 뒤에 놓인 모든 독창성, 용기, 노력을 역설해주기 때문이다.” 고백 같은 나의 질문에, 보이드가 이런 답을 보냈다. “네, 진실이라 여기는 나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위해서 엄청난 용기를 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더욱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며 활동했던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s) 작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들에게 정말 감사해요. 언젠간 나도 누군가에게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도록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을까? 
내가 처한 상황이 나를 예술가의 길로 자연스레 인도했다. 예술가로서 회화를 매개체로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예술세계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대상이자 필수적인 소통방식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회화 자체가 개념과 역사가 공존하는 공간을 창조한다는 발견과 이론, 그리고 경험에 기반하여, 나의 직업 자체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집약체인 셈이다.
 
어떤 생각이 지금 머릿속에서 출몰하고 있나? 
가족, 보물섬, 바운티호의 반란, 빵나무, 평등, 전자기 스펙트럼, 황혼과 새벽, 기준치, 타이티, 대영제국, 농업, 게슈탈트 심리학, 자메이카 등에 대한 생각들. 이번 전시가 부산 전시와 다른 점은 영상 작업을 통해 공간적으로 확장한다는 것, 컬러 작품이 전시된다는 사실이다. 컬러 작업을 할 땐 특정한 색이 불러내는 감정이 무엇인지 주효하게 고려하고, 영상 작업에서는 회화와는 다른 관점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번 전시의 가제는 ‘보물섬(Treasure Island)’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이 천진난만한 제목은 작품 주제인 풍경과 허상, 유럽의 계몽주의가 호주에 남긴 영향과 당신이 큰 영감을 받았다던 스티븐슨의 접시가 어떻게 녹아들지 더욱 기대하게 한다. 
나는 특히 세상의 특정 환경을 바라보는 개인의 시각에 끼칠 수 있는 문학의 영향력에 관심이 많다. 보물섬이라는 소재는 지금까지 내 작업에서 중요한 축으로 작용해왔다. 맨 처음 나는 퍼스트 네이션어를 사용하는 호주 지역을 표시한 작품을 그리고는 그 위에 ‘Treasure Island’라는 문구를 직접 썼다. 이를 통해 언어지도를 둘러싼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와 이야기를 이끌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의 지배 아래 많은 언어들이 잊혀져온 시점에서, 스티븐슨의 접시는 하나의 오브제로서 이와 관련된 관계들이 가진 의미를 확장시키고, 이어 보물섬이라는 주제와 연관성을 갖게 된다.
 
스티븐슨의 펜이나 책, 양복이 아니라 왜 하필 접시였을까? 
나도 얼마 전 시드니대학교 전시를 준비하다 차우착윙 박물관의 소장품인 접시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 접시는, 내가 좋아하는 다른 오브제들처럼 시공간을 초월한 느낌을 선사할 뿐 아니라 무언가를 연상하게끔 했다. 접시야말로 계몽주의로부터 비롯된 제도적 환경을 제시하는 동시에 매우 일상적인 오브제다. 이 접시가 사용된 저녁식사 자리에서 오갔을 수많은 대화, 이 접시를 설거지하던 이들의 머릿속을 맴돌았을 수많은 생각, 이 접시에 대해 큐레이터와 작가가 나눴을 수많은 사유에 어떤 이야기들이 담겼을지 상상이 가나? 다양한 콘텍스트 속에서 접시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같은 접시라도, 예컨대 사모아의 가정집에 있을 때와 시드니의 미술관에 놓일 때, 의미하는 바가 다르지 않겠나.
 
 
계몽주의로 점철된 박물관은 ‘사실’을 ‘진실’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당신은 인류학 소장품을 다른 시각으로 대하는 작업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혼란은 없었나? 
운이 좋게도, 다양한 콘텍스트에서 작업하며 박물관과 계몽주의 사상을 둘러싼 담론을 형성할 수 있었다. 또 정말 운이 좋게도, 박물관 역시 시대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과 일할 기회가 많았다. 유물을 송환하는 추세만 봐도, 소장품을 대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고. 어쨌든 어떤 작품을 전시한다는 건, 이것이 상반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거나 다름없다. 박물관에서의 작업과 전시는 내게 작업을 색다른 내러티브에 노출시키는 행위다.
 
그림 표면의 투명한 점들은 개개인이 시공간과 맺는 관계성을 시각화하고, 점과 점 사이의 검은 공간은 비정보를 의미한다. 특히 관객으로 하여금 비정보와 정보의 간극을 메우려는 행위를 야기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예술가로 사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각각의 점들은 하나의 시각을 상징하고, 이들이 모여 다양한 시각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환경을 형성한다. 점 사이의 검은 공간은 비정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점들 간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검은 공간을 통해 점들 서로 간의 관계와 구분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나는 다름이 지닌 아름다움을 전달하고, 작품 속 소재를 다양한 것과 연관 짓고 확장해가고 싶다. 이론가 에두아르 글리상(Edouard Glissant)은 이를 ‘트렘블멍(Tremblement)’ 즉 ‘파장 혹은 동요’라 표현했다. 그는 이런 개념을 바다의 표면에 시각적으로 빗대어 묘사했는데, 내 작품의 표면 역시 빛에 노출되는 순간, 이러한 면이 활성화되고 빛과 어둠의 상관관계가 형성된다. 이어 이러한 현상이 어둠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발단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명한 초기작 〈We Call Pirates out Here〉(2006)는 식민주의 아이콘, 풍자적 면모, 역사를 재고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지만, 현재의 예술언어가 확립되기 전의 작업이다. 어떤 계기가 지금의 방식으로 이끌었나? 
기존의 시각언어와 개념적 접근이 식민주의 및 대영제국과의 연관성이 덜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2006년 어느 날, 펀치로 종이에 구멍을 뚫은 후 떨어진 조각들을 구멍의 위치에 맞게 배열하여 다른 종이에 옮겨 붙이는 작업을 시도해봤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중성을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전환은 꽤 신속하고 부드러웠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확장 가능성을 접한 기분이었다고 할까.
 
예술의 제1의 목적은 ‘잊히지 않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내게 당신의 작품은 ‘기억’에 관한 작업으로 남아 있다. 실제의 기억과 경험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내 몸과 땅에 부지불식간에 남은 모든 기억에 대한 작업이랄까. 
좋은 질문이다. 내 작업에서 기억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어떻게 보면 내 작품 자체가 기억을 불러올 수 있는 트리거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게 ‘기억’이란, 특정한 시공간에 연계되어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지구상 가장 역사가 깊은 문화에서 내려왔다(descend from)”라고 표현했다. 
‘태어났다’보다 훨씬 생득적, 근원적으로 자신을 사유한다는 증거이자, 본인 뿌리에 대한 자부심으로 읽힌다. 사실 이게 굉장히 특별한 건데, 호주는 이런 점을 아직 충분히 기념하고 있지 못하는 편이다. 이 대지와 형성해온 지속가능한 관계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은 아주 많다. 무려 4만 년 전에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도구인 브레와리나(Brewarrina) 지역의 물고기 통발 역시 이 땅에 묻혀 있지 않은가. 정말이지 절로 감탄하게 된다!
 
이뤄지든 그렇지 않든, 궁극적인 판타지가 있다면? 
시간여행.
 
※ 다니엘 보이드의 개인전은 오는 6월 17일부터 7월 31일까지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윤혜정은 국제갤러리의 이사로, 예술에 관한 다양한 결의 글과 인터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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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윤혜정
  • 글/ 윤혜정
  • 사진/ Lyndal Irons
  • 웹디자이너/ 한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