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와인애호가

꽁비비알 인스타그램 캡춰 @convivialseoul
저온숙성한 저염 백명란을 찢는다. 백명란은 일반적인 양념 명란젓과 달리 고춧가루와 마늘 없이 소금물에 절여 숙성한 젓갈이다. 이 백명란 한 조각을 윤기가 흐르는 갓 지은 흰 쌀밥 위에 올린다. 껍질이 얇은 데다 알이 크고 가득한 상당히 좋은 명란이다.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밥을 떠서 입에 넣는다. 쌀밥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서 맛있는 밥 냄새와 잘 익은 명란의 냄새가 난다. 입에 침이 살짝 고인다. 역시 맛있는 건 입보다 코에서부터 온다. 따뜻한 밥의 윤기가 혀에 닿으면서 밥알의 익힌 정도와 점도가 느껴지고 입천장에 닿은 명란의 알갱이들이 부스러지며 밥알 사이사이로 흩어진다. 이때 명란의 비린 짠맛이 밥알과 뒤엉키며 담백하면서도 짭짜름한 맛, 신맛과 쓴맛, 옅은 단맛이 입안에서 폭발한다. 쌀밥을 씹을 때마다 명란이 톡톡 터지며 특유의 풍미가 혀와 볼, 천장을 타닥타닥 때린다. 뒤섞인 밥과 명란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조화가 씹을수록 더 강해진다. 꿀꺽 삼키고 나서도 길게 남는 그 비릿함과 짭짤한 여운은 쌀밥과 백명란이 주는 풍미의 마침표다. 그리고 한 입의 미학이다.
실력 있는 셰프일수록 고객이 요리를 보고, 맡고, 씹고, 맛보며, 여운을 즐기는 한 입의 구조를 연상하며 요리를 구상하고 조리한다. 곁들인 퓌레나 소스, 가니시도 결국 이 구조의 연장선상이다. 모든 음식이 그렇다. 다만 단순하고 단조로운 구조나 풍미냐, 복잡하고 다채로운 구조와 풍미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극적인 음식일수록 전자에 가깝고 건강하고 훌륭한 음식일수록 후자에 가깝다. 물론 선호하는 스타일은 사람마다 다르다.
기본적인 와인 테이스팅을 참고해보면 알 수 있다. 와인 테이스팅은 와인 잔에 레드와인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고 이 잔을 구성하며 채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와인을 맛있는 음식이라고 여긴다면 위의 두 과정을 거친 뒤에 마시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와인을 마실 때도 첫 모금은 조금만 마셔 입안을 살짝 축인 뒤 다시 적당한 양을 입에 머금고 혀로 와인을 이리저리 굴리고 공기를 조금 더 마셔 향을 더 돋운 뒤 삼킨다. 그리고 와인의 남은 여운을 즐기는 게 좋다.

다밀라노 와이너리의 다밀라노 바롤로 깐누비. 별이 다섯개!
최근에 마신 가장 인상적인 와인은 다밀라노 와이너리의 다밀라노 바롤로 깐누비다.
따르는 순간부터 딱 감이 왔다. 루비색 와인이 부드럽게 잔에 떨어지며 채워지자 가슴이 설렜다. ‘와, 굉장히 좋은데.’ 잔에 담긴 와인은 가운데는 잘 익은 체리 빛깔이었고 가장자리는 살짝 오렌지빛이 감돌았다. 잔을 몇 번 흔들자 풍성한 과일향이 올라왔고, 다시 맡으니 쓴 향도 스쳤다. 잔에 입을 대고 와인을 조금 마시자 입술 위로 붉고 엷은 실크가 찰랑거리며 지나갔다. 촉촉한 부드러움이다. 와인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듯한 풀바디의 무게감이 느껴지고, 혀 전체를 자극하는 복잡한 맛이 이어졌다. 호로록 공기를 들이마시자 비강을 채우는 여러 향의 향연, 와인을 삼킨 뒤 볼과 입천장을 조여오는 부드러운 탄닌의 흔적, 그리고 한없이 이어지는 긴 여운. 아주 세련되고 우아하며 복잡한, 균형 잡힌 와인이었다.
이런 코와 입술, 혀와 볼, 입천장의 모든 감각 세포가 살아나는 와인은 쉽게 접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한 병을 위해 언제나 기대감을 가지고 와인을 딴다. 그건 달림으로서 자신을 확인하거나 현대미술을 통해 낯설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며, 시를 통해 생경한 언어와 순간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한 모금을 통해 오감이 살아나는 와인의 미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