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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심판 홍선희를 만나다

두꺼운 유리 장벽을 깨고 묵묵히 자기 일을 일궈온 사람들의 이야기. 부드럽게 질기고, 뜨겁게 용감했던 언니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BYBAZAAR2021.01.14
 

여자의 일

농구 심판 홍선희
내가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누군가는 내가 거쳐온 길을 처음부터 다시 가야 한다.
 
오늘 경기장 내에서 뛰어다니는 유일한 여자였다. 여자가 거의 없는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 같은데.
기존에 있었던 이들과는 다른 ‘여자’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이 무대는 그렇지 않더라. 아무래도 디폴트가 남성이다 보니 그들이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그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남들 입장을 생각 못하고 내 생각만 했다.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오면 어려움이 있는 건데, ‘내가 여자라서 나한테 이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테면 선수들은 그저 내 판정에 의문이 생겨 항의를 한 건데 ‘내가 여자 심판이라서 나한테 이러는 건가.’ 싶었다.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선수들이 나를 여느 심판들과 다르지 않게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스스로의 한계를 단정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붙는 ‘여자’라는 타이틀은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여자라서 그렇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심판이니까, 내 일이니까 그렇게 대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즘 경기에 나갈 때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서 오는 긴장감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리그에서 판정을 한다는 사실에 대한 긴장감이 더 크다.
KBL에 처음 들어갈 당시 여자 심판이 오랫동안 없었다고. 이에 따른 부담감은 없었나?
지금은 트라이아웃을 통해 KBL로 온 것이지만, 사실 그전에 한 번 KBL에 지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만 35세 이하의 나이 제한이 있었다. 그 나이를 넘기면 안 되지 않나? 후회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지원을 했다. 결국 낙방했지만. 한번쯤은 큰 무대에서 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지금은 여성 후배 한 명과 같이 활동한다. 서로 좋은 자극제이자 동료가 될 것 같다.
후배가 생겨 든든하고 고맙다. 우리끼리 얘기하곤 한다. 여자라서 그렇다는 얘기를 안 듣게끔 남성 동료들과 똑같이 하자고. 그래야 우리를 받아주니까. 내가 있어서 후배가 들어왔듯, 그 후배를 보고 누군가 또 들어왔으면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 책임감도 생기더라. 내가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누군가는 내가 거쳐온 길을 처음부터 다시 가야 하지 않나. 지금 힘든 걸 넘어가면 다른 사람이 따라오는 게 한결 쉬워질 텐데. 오랫동안 심판 일을 잘해내면 인식이 바뀌고 환경이 점점 좋아질 것이란 생각을 하니 버티는 것도 나의 역할이라고 느꼈다. KBL엔 나 포함 두 명이 있지만 WKBL엔 여자 심판들이 더 많다. 그들에겐 어떤 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회가 되면 도전해서 나보다 더 잘됐으면 좋겠다.
경기 내내 선수들을 따라 뛰어다녀야 하는데, 체력적인 한계를 느낄 때는 없었나?
농구라는 운동이 순발력을 요하는 순간이 많다 보니 주변에서도 우려를 많이 했다. 나 스스로도 그런 걸 깨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체력 관리도 많이 한다. 경기가 없는 날엔 다 같이 두 시간 이상씩 운동하고, 비시즌 때도 몸 관리를 쉬지 않는다. 체력 관리가 1순위인 셈이다. 그걸 못 하면 아무리 내가 다른 걸 잘해도 소용없다.
처음 KBL에 투입된 순간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많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KBL에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때 경기를 복기해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우리 심판들은 계속 복기하고 리뷰한다. 잘한 경기보다는 오심 때문에 판정인의 어필을 받은 기억이 오래 남는다. 대부분의 심판들이 그럴 거다. 내가 잘한 경기는 없다.
그럴 때 마인드컨트롤은 어떻게 하나?
내가 본 게 맞다고 생각해서 판정을 내린 건데, 리뷰해 보면 틀렸을 때가 있다.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받아들이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렇게 보면 안 되는데 화면을 봐도 자꾸 내 시각에서 보게 되더라. 지금은 자책하는 대신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심판의 매력은 무엇인가?
가끔 그런 질문을 들을 때면 처음엔 재미있다는 뻔한 대답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객관성’을 띤다는 것이 큰 매력인 것 같다. 농구를 포함한 모든 스포츠가 주관적이지 않나. 선수, 팀, 감독, 관계자들, 심지어 팬까지. 속한 팀과 응원하는 팀을 위해서 게임을 즐기는데, 심판은 경기에서 주관적이면 안 된다. 그게 매력이다.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남들과는 다른 방식과 기준으로 농구를 즐기는 것이다.
큰 리그를 꿈꾸고, 여성이라는 벽에 무너지지 않았다. 자신의 한계를 규정 짓지 않는 편인가?
거창하게 그런 것은 아니고, 일을 하다 보니 자꾸 길이 열리더라. 처음에는 자잘한 목표를 세운다. 그래야 내 길을 갈 수 있으니까. 아이들에게 농구도 가르치고 심판도 해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아무리 작은 목표라도 정해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목표까진 못 가더라도 그 근처는 간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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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안나
  • 컨트리뷰팅 에디터/ 문혜준
  • 사진/ 김진용
  • 어시스턴트/ 김형욱
  • 웹디자이너/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