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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이진숙은 오늘도 살인범을 만나러 간다

두꺼운 유리 장벽을 깨고 묵묵히 자기 일을 일궈온 사람들의 이야기.

BYBAZAAR2021.01.13
 

여자의 일

프로파일러 이진숙
심리학 이론 중에 ‘선택이론’을 좋아한다.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다. 심지어 자살까지도. 단, 그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도 내가 진다.’가 이 이론의 핵심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 일을 하라고 등 떠민 건 아니니까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행복하게 잘 책임져야겠다고. 힘이 들 땐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지난 11월 2일 연쇄살인범 이춘재가 법정에서 “프로파일러가 진실을 말해달라고 해서 자백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백을 이끌어내기까지의 과정이 어땠나?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거기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이춘재살인사건’이라 부른다. 보통은 화이트보드를 사용해서 사건을 분석하는데 이번엔 사건의 양이 워낙 많아서 방 벽 전체를 전지로 붙여도 모자랄 정도였다. 수법은 어떠한지, 시그너처라고 할 만한 흔적이 있는지 등등 사건을 분석하는 데 한 달가량 걸렸다. 사실 얼핏 봤을 때 이춘재는 꽤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사이코패스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살인범들은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고, 그걸 들어주는 일이 아주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이춘재의 경우에는 그의 말을 참고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비위를 맞추면서 이야기를 이끌어내야 하니까.
이춘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쉽사리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들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첫만남에서 우리가 왜 왔는지 취지를 잘 설명한다. “너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 조사 과정에서 못 다한 말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너의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단,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사람에게 말이다. 프로파일러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서면 그 후로는 어렵지 않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를 잘 캐치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증거재판주의라서 증거가 없거나 결정적인 자백이 없으면 공소유지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자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백을 하는 순간이나 면담을 통해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을 때는 쾌감을 느낀다.
일에서 가장 괴로웠던 점은 무엇인가.
사건 현장을 못 견디고 떠나는 동료들이 많았다. 피가 흥건한, 시체가 있는 현장을 보면서 칼날은 어느 방향인지 구더기의 크기는 어떤지 확인해야 한다. 자꾸 피해자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엔 다른 게 더 힘들었다. 조직의 지휘 체계와 계급 문제였다. 그 당시에는 박사 학위까지 받은 경찰이 별로 없었고, 지휘관이 나를 불러서 “경찰이 연구하는 집단이냐?” 하고 말하며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내 여성 1호’ 프로파일러라는 수식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프로파일러가 남성이 하는 일이라는 편견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현재 국내 프로파일러의 성비는 여성이 70%, 남성이 30%다. 당시 나와 함께 특채로 들어간 동기들이 사실상 모두 1호 프로파일러다. 특채 이전엔 기존 인력에서 프로파일러를 선발했는데 당시 권일용 선배가 1호라는 수식어를 받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여성이라는 두 글자를 첨가한 것 같고.
조직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느낀 적 있나?
지휘관들에게서 그런 벽을 느낀 적은 있다. 나는 프로파일러뿐만 아니라 위기협상가로도 활동한다. 예를 들어 자살 소동을 벌이는 현장에 나가는데 그 대상자가 와이프 때문에 소동을 벌이고 있는 남자라면 “여자가 가서 협상이 되겠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얘기를 뒤로하고 난 가스를 폭파시킨다는 남자의 협박에도 문 열고 들어가서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여기까지 오는 데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성별을 가를 건 아니지만 감성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피해자들 중에는 여성이 많고 그들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는 것도 여성이다 보니 범죄자의 이야기를 듣고 어느 부분을 더 면담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데도 유리하다. 특히 연쇄살인범의 경우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갈급하던 모성애와 비슷한 따뜻함을 느껴서 접근 장벽이 낮아지는 면이 분명히 있다.
15년간 프로파일러로 일하면서 힘이 되는 여자 선배가 있었나?
처음 일 년,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같이 일하던 여경 선배들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 여경은 소수였고 그래서 그분들이 본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위안이 됐다. 각계각층 자리자리마다 여성들이 일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 모습 자체로 다른 여성들에게 힘이 되기 때문에.
그간의 경험을 담은 책 〈오늘도 살인범을 만나러 갑니다〉를 펴냈다. 당신이 오늘도 살인범을 만나러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파일러가 투입되는 건 보통 단서가 없거나 피의자가 말을 하지 않으려 할 때, 혹은 사건에서 무언가 문제가 발생한 경우다. 그런 사건들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희생된 피해자들의 억울한 부분을 풀기 위해서도, 그리고 이후 일어날지도 모를 범죄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나는 심리학 이론 중에 ‘선택이론’을 좋아한다. 선택이론의 핵심은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다. 심지어 자살까지도. 단, 그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도 내가 진다.’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 일을 하라고 등 떠민 건 아니니까.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행복하게 잘 책임져야겠다고. 힘이 들 땐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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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안나
  • 컨트리뷰팅 에디터/ 문혜준
  • 사진/ 김진용
  • 어시스턴트/ 김형욱
  • 웹디자이너/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