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디자이너 김영나의 발견된 디자인

디자이너 김영나는 “디자인이란 98%의 상식과 2%의 신비한 요소, 즉 우리가 흔히 예술 혹은 미학이라 지칭하는 무엇으로 이뤄져 있다”라는 오래된 정의를 바꾼다. 구조와 형식의 실험을 예술로 변주하는 ‘디자인 개념주의자’는 내 머릿속 디자인이라는 현상을 재구성한다.

BYBAZAAR2020.05.0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어린이전시장 2 공간. 체험을 위한 이 공간에서 책 〈SET〉(2015)의 요소들이 아이들의 놀잇감으로 구체화되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어린이전시장 2 공간. 체험을 위한 이 공간에서 책 〈SET〉(2015)의 요소들이 아이들의 놀잇감으로 구체화되었다.

〈곰 사냥을 떠나자〉라는 동화책이 있다. 어느 4인 가족이 곰을 잡으러 산 넘고 물 건너 갔는데, 막상 곰을 마주하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도망친다는 단출한 줄거리다. 맨 끝에 풀 죽은 곰의 뒷모습이 등장하는데, 인간들을 놓쳐서인지, 친구가 되고픈 진심을 외면당해서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이 책엔 자연보호, 동물사랑, 인간-동물의 우정 따위에 관한 어떤 메시지도, 교훈도 없다. 흥미로운 건 형식이다. “곰 사냥을 떠나자, 큰 곰 잡으러 떠나자, 정말 날씨가 좋구나, 우린 하나도 안 무서워”가 반복되는 가운데, 의성어(사각사각, 휘잉휘잉 등)의 운율이 더해져, 읽다 보면 노래가 된다. 나는 (보통의 동화책 어법과 다르다는 이유로) 낯설었지만, 아이들은 (그래서) 즐거워했다. 이 고전이 교육 이론서에 종종 등장한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나는 개념과 메시지, 교훈과 의미를 더 중시하는 경향에 젖어 있음을 번번이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일상 낱낱에서 느낀 바 내용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져야 리듬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공교롭게도 김영나의 디자인 앞에서 재발견한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김영나의 어린이 전시 «물체주머니»에 가기 전, 책 〈SET〉를 챙겼다. 이 책은, 김영나의 2006년부터 2015년까지의 커미션 프로젝트, 개인 작업, 전시 출품작 등 다른 시기와 목적, 형태와 스토리로 탄생한 결과물들을 정리했다는 점만 보면 여느 도록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메시지 대신 형식의 묘미를 살린 동화책처럼, 작업들의 맥락을 삭제한 채 도출한 도형, 패턴 등의 이미지가 표지부터 내지까지 배열되어 있는 ‘추상적 샘플북’이자, 작업의 경험과 기억이 담긴 포트레이트다. “기계적으로 정리했다”는 표현은 2015년 뉴욕 두산갤러리 개인전을 앞둔 김영나가 베르크플라츠 티포흐라피의 동문인 벨기에 디자이너 요리스 크리티스(Joris Kritis)에게 책의 디자인을 일임했고, 그가 주관적으로 아카이브를 ‘해체’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김영나의 영역 곳곳에 이정표처럼 위치한 디자인적 요소들은 사연과 의미를 함구한 채 작업을 ‘서술’하기보다는 ‘기술’한다.

2-1 

태생적으로 ‘자기 (역사) 참조적’인 〈SET〉의 남다른 가능성은 책 바깥에서 발현된다. 애초 김영나에게 책이 가장 편안한 도구였다는 건, 책의 본질을 전복할 가능성에 가까웠다는 얘기다. 책을 기록 수단이 아니라 작업으로 여긴 그녀는 ‘책의 구조’가 전시가 되고, ‘전시 구조’가 책에서 파생하는 관계를 상상했다. 그리고 〈SET〉 몇 페이지를 전시장에 벽화로 재현하거나 설치작업으로 선보이는 등 책을 변주한 동명의 개인전을 치렀다. 자신의 아카이브 격인 책의 형식 및 구조가 전시라는 공간 및 경험으로 확장되는 풍경을 ‘의도치 않게’ 목격한 김영나는 이 책을 지침서로 삼기로 한다. 이후 각 페이지의 이미지는 전시장에서는 물론, 지산밸리록뮤직앤아트페스티벌의 구조물(SET v.5, 2016), 지하철역 내부(SET v.9, 2017), 침구 세트(SET v.10), 호텔 인테리어(SET v.11)로 표현되거나, 벨기에의 한 페스티벌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SET v.17, 2019). 김영나의 방법론이자 플랫폼이 된 책 〈SET〉의 매 페이지에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기억과 망각이 각주로 달려 있다.
포틀랜드 FISK 갤러리 전시에서 선보인 우표 ‘Perforated SET v.16’(2019).

포틀랜드 FISK 갤러리 전시에서 선보인 우표 ‘Perforated SET v.16’(2019).

전시 «물체주머니»는 〈SET〉의 20번째 연작이다. 이곳 어린이전시장이 전형적인 화이트큐브가 아닌 데다, ‘체험’ 요소 덕분에 〈SET〉의 변주는 더욱 드라마틱해졌다. 전시장 입구 천장에 매달린 큰 흑백 풍선을 비롯, 흰색 원기둥, 검은색 지그재그 입체물, 녹색 정육면체, 무지개 평면 등 〈SET〉의 표지에 등장한 도형들이 입체 구조물이 되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온통 화이트로 비워진 탓에 SF적인 두 번째 전시장, 아이들이 직접 페인트칠을 하며 스텐실 툴처럼 사용될 구조물들도 책 〈SET〉에서 빌려왔다. 두 전시장을 잇는 복도 벽에는 책 〈SET〉의 내지를 그려 넣은 거대한 벽화가 있는데, 뉴욕 전시(2-1)이자 〈SET〉 연작의 첫 번째 벽화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벽화의 존재는 또 다른 작품, 김영나가 처음으로 시도한 캔버스 작업과 연동되어 수집과 예술의 상관성을 질문한다.

3-1 

“지난 5년 동안 〈SET〉를 다른 방식과 매체로 변주해왔는데, 이번에는 과거에 설치한 이미지의 일부를 떼어내어 캔버스에 그려봤어요(〈Piece〉). 일종의 기념품이나 스냅샷처럼 전시 결과물을 수집해볼까 생각하기도 했고, 미술계에서 신성시되는 캔버스를 활용하는 행위가 과연 어떻게 보여질까 궁금하기도 했거든요. 무엇보다 내가 어떤 명분으로 〈SET〉 작업을 더 지속하거나 확장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번 캔버스 작업이 하나의 단서가 될 것 같아요.”
장기하와 얼굴들 5번째 앨범 〈모노〉(2018).

장기하와 얼굴들 5번째 앨범 〈모노〉(2018).

3-2 

전시를 볼 때 반드시 책 〈SET〉를 지참할 필요는 없다. 특유의 디자인은 아파트 천지인 이 일대에 스타카토의 생동감을 선사하고, 그것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이 책이 김영나의 작업 세계 및 전시장 곳곳에 숨은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문, 즉 웜홀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이다. 보편타당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한편 구조와 형식의 논리를 집요하게 실험하는 김영나 디자인의 상반된 면모를 다르게 읽고, 깊숙이 도사리는 작가의 기억에 가 닿을 수 있게 하는 열쇠. 웜홀은 전시장은 물론, 상업공간 에이랜드, 혁오나 장기하의 앨범, 아트선재센터의 홈페이지 등 모든 작업에 숨어 있다. 김영나의 작업이 ‘환상적’이라면 색과 면, 컬러와 도형의 향연 때문만이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의 너비와 깊이가 달라질 정도로 다면적이기 때문이다. 공간 문제로 인식되는 웜홀이 시간여행과 관련이 있다는 점도 꽤 흥미롭다. 웜홀의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자기 과거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과학 이론은 그녀의 작업들을 은유한다.

1-1 

“형태나 컬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형식의 탐구를 작업 내용의 출발점으로 삼거나, 그 자체로 기능하게 하는 입장에서는 어려운 질문이에요. 좋아하는 작가도 다니엘 뷔랑이나 제로그룹처럼 방식과 구조를 실험해온 이들이고, 그 자체에서 오는 환희나 즐거움이 분명 있을 거라는 말이죠. 디자인 작업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도 비슷한데, 말하자면 디자인이란 콘텍스트와 의뢰 상황에 맞춰 디자이너가 제시한 최적의 해결책이에요. 거기에 특정 메시지가 있진 않죠. 궁여지책으로 답을 찾기보다는 무엇을 원동력 삼아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디자이너로서 어떤 상황에 해답을 제시하고, 흥미로운 신을 얘기하는 작업을 지속하면서요.”  
오스카 슐레머의 영상 〈바우하우스 댄스〉 중 〈스페이스 댄스〉를 재해석한 움직임 악보 ‘2분13초, 35프레임’(2014)과 이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조각 ‘2분13초, 4.6미터’(2020).

오스카 슐레머의 영상 〈바우하우스 댄스〉 중 〈스페이스 댄스〉를 재해석한 움직임 악보 ‘2분13초, 35프레임’(2014)과 이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조각 ‘2분13초, 4.6미터’(2020).

전시 제목 «물체주머니»는 예전 문방구에서 팔던, 다양한 학습 도구를 담은 주머니에서 따왔다. 공간 전체가 김영나에게는 일종의 ‘물체주머니’이고, 즉 “전시장에서 보이는 이미지들이 주머니 속 물건들처럼 기억을 연결함과 동시에 디자이너의 실험 도구로 표현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집과 아카이브를 통해 사물들이 연결하는 시간과 기억’은 김영나 디자인의 비가시적 테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당시 많은 ‘국민학생’들이 물체주머니 속 물체들을 본래 기능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갖고 놀았듯, 김영나도 세상의 규칙이 아니라 자기만의 그것으로 대상을 다룬다.

4-1 

초입에 걸린 평면작업 〈발견된 구성〉(2009~)은 김영나에게 수집이 곧 디자인적 태도임을 선언한다. 그녀는 대량생산된 사물들을 일상적으로 수집, 재배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스티커를 뜯어 배열하고, 다양하게 커팅해 이리저리 조합한다. 훈련이기도, 의뢰 프로젝트의 스케치이기도, 완결된 작업이기도 한데, 모두 액자화함으로써 작업들의 맥락을 지우고 평준화했다. 이때 재료로서의 사물은 스티커, 슈퍼마켓 쿠폰, 패키지, 색종이 같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흔한 물건들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수집은 사물의 형태(색, 모양)와 구조(본질)에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가치(값이 아니라)와 관계(쓸모나 기능)를 재정의하는 행위다. ‘모으다’의 괄호 안에는 ‘주어진 것을 활용하다’, ‘창조하다’ 뒤에는 ‘발견하다’가 있다. 이는 작업의 구성요소와 방식으로 채운 공간을 촬영한 사진을 ‘자화상’이라 명명하는 행위와도 일맥상통한다.
〈Connected Body and The Specific Places〉라는 제목 아래 지하철 성신여대역에 설치된 ‘SET v.9: patterns’(2017).

〈Connected Body and The Specific Places〉라는 제목 아래 지하철 성신여대역에 설치된 ‘SET v.9: patterns’(2017).

4-2 

“뭘 잘 버리지 못해요. 언제, 어떻게 얘가 촉매로 쓰일지 모르니까요. 같은 노란색 스티커라도, 나라마다 정의하는 색이 다 달라요. 선명한 노란색이 있는 반면 20~30년 된 빛바랜 색도 있고요. 또 피셔맨스 패키지는 네덜란드에서 산 거, 이 스트라이프 종이는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주워온 거 등 어느 정도 제 기억 속에는 사물에 관한 순간들이 있어요. 정색하고서는 ‘이것들로 작업해봐야겠다’가 아니라 어느 날 섞어놓고 보면 일종의 레이어가 나타나고, 겹쳐지고, 또 다른 스토리가 생겨요. 다른 시점의 다른 물건들, 그러니까 어떤 사물과 어떤 시간이 연결된다는 게 놀라워요.”

세상은 표준화된 수치, 즉 규격으로 재단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인류적으로 현대화된 기호 혹은 국경을 관통하는 구조다. ‘합의된 규칙’은 너무나 견고한 나머지, 예컨대 로마 시대의 석조 건축물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할지 모른다는 착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당대의 화가가 돌을 조각하는 것과 오늘날의 디자이너가 국전지 ‘크기’로 작업하는 게 다를 바 없다는 전제도 가능하지 않을까. 〈가변판형〉(2017)은 ‘주어진 것에서 고유한 규칙을 발견하는’ 김영나의 전매특허 실험법을 직관적으로 내세운 작업이다. 한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국전 사이즈’, 가로 636mm, 세로 939mm의 종이 열 장을 여분 없이 2절부터 128절까지 나누어 잘라 책을 만들 때 얻을 수 있는 판형들이 놓여 있다. 옆에는 판형에 따라 달라지는 책 두께를 망라하는 책꽂이 형태의 조각(〈가변판형: 책꽂이〉(2020))을 뒀다. 면적과 두께가 반비례라는 건 당연한 이치지만, 이렇게 어여쁜 그러데이션으로 시각화하지 않았다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낯선 문제다.

4-3 

김영나는 스스로 주어진 구조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다고 시인한다. “주로 전자음악 분야에서 많이 사용하는 ‘aleatoricism’라는 단어가 새삼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비슷한 뜻을 가진 ‘improvising’이 구조 없이 즉흥적인 걸 일컫는다면, 이 단어는 주어진 구조가 분명 있고 그 안에서 어떤 이유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저는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의 입장이나 콘텐츠가 들어갈 수 있는 갖춰진 구조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논리적인 단단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2015년 뉴욕 두산갤러리 개인전에서 책 〈SET〉를 처음 벽화로 시도했다. 첫 번째 〈SET〉 연작을 20번째 〈SET〉 연작인 이번 전시에서 똑같이 구현함으로써 5년 간의 진화 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2015년 뉴욕 두산갤러리 개인전에서 책 〈SET〉를 처음 벽화로 시도했다. 첫 번째 〈SET〉 연작을 20번째 〈SET〉 연작인 이번 전시에서 똑같이 구현함으로써 5년 간의 진화 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5-1 

지난 2012년 김영나를 차세대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다루며 작품 〈테이블 A〉를 함께 소개한 적 있다. 이 작품은, 컴퓨터 모니터 상의 결과물을 기어이 출력해서 직접 보고 만져야 직성이 풀리는 이 유별난 그래픽 디자이너뿐 아니라 거의 모든 현대인들이 무념무상으로 수용하는 A4 시리즈의 종이 판형을 테이블로 물성화한 작업이었다. A4부터 A0 사이즈의 테이블을 각각 제작함으로써 김영나는 크기에 대한 인식을 입체적 사물로 변환시켰고, 테이블의 기능보다 ‘기능이라는 목적’이 사이즈에 따라 모호해지는 지점에 더 주목했다. 어쨌든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테이블은 물욕을 자극할 만큼 빼어났다. 여느 디자이너들처럼 세트로 만들어 판매했으면 하고 기웃거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김영나 본인이 그럴 이유를 찾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1-2 

형식에 대한 그녀의 남다른 애착은 대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Q) 어디서 절대적 아름다움을 느끼나요? A) 큰 거요.(웃음) 중공업 느낌을 좋아해요. 로렌스 와이너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 건 압도적인 스케일에 매료되는 경향 때문이에요. Q) 그러데이션은 장식적, 기능적이면서도 지나치게 상징적인데, 작업에 쓰는 이유가 있나요? A) 무지개색 그러데이션이 흑백과 같다고 봤어요. 흑백은 특정 색을 지정하기보다는 기본값이잖아요. 그러데이션도 모든 색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어떤 값도 갖고 있지 않아요. 검은 바탕에 흰색, 흰색에 검은 바탕처럼. 파란색을 좋아하는 것도 블루스크린, 블루프린트 등에 기본값으로 쓰이기 때문이에요.  
상징과 기능을 지우고 색의 본질에 주목하는, 김영나의 그러데이션 활용법.

상징과 기능을 지우고 색의 본질에 주목하는, 김영나의 그러데이션 활용법.

전시장 밖 외부 연결 공간에 설치된 ‘2분13초, 4.6미터’(2020)는 김영나가 즐겨 쓰는 세 가지 색과 오래전부터 매료된 ‘전이공간’ 나선형 계단 형태로 이뤄진 작품이다. 파랑은 17계단, 빨강은 34계단, 노랑은 68계단인데, 단 높이에 율동을 연상시키는 기호가 커팅되어 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바우하우스의 무대 실험 – 인간, 공간, 기계»전의 참가를 의뢰받은 김영나는 오스카 슐레머의 실험작 〈바우하우스 댄스〉 중 〈스페이스 댄스〉를 참조점으로 삼았다. 이 영상에서는 빨강, 노랑, 파랑 무용수들이 구획된 선 위에서 서로 다른 속도(보폭)로 움직이는데, 공간과 신체, 속도와 움직임을 최적화해 계산한 탓에 절대 부딪치지 않는다. 김영나는 이들의 움직임을 계산해 최적화된 시각적 악보를 완성했다. 악보는 국현의 36개 유리 통창을 오선지 삼아 색색의 도형으로 펼쳐졌고, 몇 년 후 이를 건축구조로 구현한 조각이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선보였다. 언뜻 이 작품은 김영나의 새로운 국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조각이 악보라는 평면작업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 인상은 틀렸다. 동시에 ‘궁극적 매체’를 인쇄물로 국한시킨 초창기와는 달리, 지금은 건축의 일부이건 조형물이건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일리 있다.

나는 김영나에게 그 무수한 프로젝트 중 특히 〈기억의 선언〉을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몇 년 전 그는 예정된 행사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5·18이나 이플럭스에 대한 내용)을 예고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곳곳에 붙이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작업은 과거를 가리키는 포스터가 존재할 수 있을지, ‘평면’과 ‘매체’, 그리고 ‘기능’ 모두를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더 나아가 포스터가 점유한 시공간의 대안적 질서를 제안하고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전복하려는 시도로 읽힌다는 점에서 대단히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위) A4 시리즈를 3D로 물성화한 작업 〈테이블 A〉(2013).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 또 다른 언어≫의 출품작(사진 LESS). (아래) 침구 세트 ‘SET v.10: nap in the show-room’(2017).

(위) A4 시리즈를 3D로 물성화한 작업 〈테이블 A〉(2013).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 또 다른 언어≫의 출품작(사진 LESS). (아래) 침구 세트 ‘SET v.10: nap in the show-room’(2017).

5-2 

처음 김영나가 그래픽 디자인계의 이른바 ‘앙팡테리블’로 주목받은 이유 역시 그녀의 평면작업이 평면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면의 반대말은 ‘입체’가 아니라 ‘평면 이상’이다. 그리고 평면을 넘어서는 힘은 대상의 본래 목적, 형태, 기능에 대한 선입견을 지운 상태의 순수한 에너지로부터 얻는다. 그간의 북 디자인, 매거진 디자인, 브랜드 아이덴티티, 공간 작업 등을 다룰 때도 그녀는 혹자가 원하는 비주얼적 이미지보다 대상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이미지적 캐릭터를 확립하고 변화가능성을 도모하는 데서 출발했다. 개인 작업 〈발견된 구성〉과 〈COS × SEOUL〉의 부클릿, ‘더 북 소사이어티’ 엽서와 〈GRAPHIC〉 매거진 표지, 커먼센터의 아이덴티티와 자기 명함 디자인 사이에 어떠한 경중도, 위계도, 우선순위도 없는 이유다. ‘김영나 디자인’의 에너지는 역설적으로 인간 중심적이지 않다는 데서 온다.

7-1 

지난해 김영나는 베를린으로 터전을 옮기고는 일종의 개인 프로젝트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빈 상태의 공간이자 유연한 덩어리”를 구상 중이다. 결백한 진공 공간에 자기 작업 혹은 다른 작가의 작업 등을 두고, 불특정 소수를 오롯이 머물게 할 생각이다. 타인의 경험이 어떤 요소로 작용하며 예측불가한 디자인적 사건들이 발생할 테고, 그래서 ‘에어비앤비’라는 현실 단어보다는 획기적인 게 필요해 보인다. 어쨌든 김영나는 스스로 이 공간의 클라이언트이자 아트 디렉터, 운영자를 자처하여 작업과 일상의 경계를 무화함으로써, 그간의 작업을 집대성하는 실험에 임하고자 한다.

0

적어도 내게 김영나는 디자인 개념주의자다. 그녀에게 개념이란 어떤 철학적인 주제가 아니라 실행의 과정이기도, 목적이기도, 의도이기도 한 논리와 규칙, 질서를 의미한다.  지난 20년 동안 그녀를 견인한 질문이 이 본질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디자이너의 일은 직업과 구분될 수 있을까, 디자이너의 작업은 작가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그러므로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단순한 일상에서 마주치는, 어쩌면 선택권 없이 주어지는 상황, 디자인에 국한될 리 없는 이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이를 재구성하는 행위, 주관적 언어로 해석하는 과정들의 끝없는 반복이 구축한 ‘김영나 디자인’. 그러니 내가 이 무명의 공간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듣고는, 그녀가 ‘구조와 형식에 대한 실험’의 다음 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건 당연하다.
 
※김영나의 전시 «물체주머니» 전의 공식 오픈 일시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홈페이지와 SNS 등을 통해 추후 공지될 예정이다.
 
윤혜정은 국제갤러리의 이사로 활동 중이며, 예술에 관한 다양한 결의 글과 인터뷰를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Keyword

Credit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 사진/ 김보성(인물),북서울시립미술관(전경),김영나(자료)
  • 웹디자이너/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