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가 박찬경의 낮은 목소리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시공간의 역사적 맥락을 꾸준히 통찰해온 자만의 날 선 문제의식으로, 현대미술가 박찬경은 동시대 미술과 그 너머 삶에 관한 유의미한 질문과 답, ‘모임’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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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5전시실 중앙, 일종의 ‘마당’인 <해인>(2019)에 앉은 박찬경 작가. 16개의 시멘트에 물결 무늬를 새긴 작업으로, 세계의 만물이 도장으로 찍은 듯 바닷물에 뚜렷하게 비쳐 보인다는 불교 개념을 육중하고 단단한 시멘트 덩어리로 표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초입에서 관객을 반기는 <작은 미술관>(2019)은 ‘미술’과 ‘우리’의 가교 격인 ‘미술관’의 무의식적 이상향을 의식적으로 환기시키며 미술관의 역할을 고민하게 한다. 오랫동안 한국미술의 자생적 방법론에 골몰하며 “미술사 자체가 결국 상상의 제도에 불과한 것”이라 의심해온 박찬경이 쓴, 엉뚱하고 엉성하며 주관적인 미술관 역사. 일당 1원에 산신도를 그려주었다는 이응노의 일화, 산신당 사진, 한복 차림 학생들이 작품을 ‘올려다보는’ 1920년대 사료, 조선의 생활용품을 민예품이라 ‘올려 부르며’ 작품처럼 다룬 야나기 무네요시의 초상 등을 거쳐 전선택, 박이소, 정서영, 김범, 백승우 등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가 닿을 무렵, 전작 <작은 미술사>에서 표현한 바 “식민적 맥락 없음과 단절하는 ‘연결의 제스처’”가 미술사에서 미술제도로 구체화되었음이 확연해진다.
“미술관이 절이나 교회처럼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어쨌든 근대식 미술관이 형성되기 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그림 등의 작품이 절이나 사당 같은 데만 있었던 건 사실이죠. 당시 산신당은 공적인 장소이면서도 사적인 기원이 모이는 공간이었고, 그림은 개인과 공동체, 성과 속의 세계를 결속했어요. 지금의 미술관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했을 때, 사당 안에 있던 그림들을 현대적으로 보여줄 수 있지 않겠나 한 겁니다. 이건 종교적 메시지가 아니라 유대의 이야기예요. 유대를 형성하는 매개이기도 하고, 초점이기도 하죠.”

22점의 이미지와 1점의 유화작품으로 구성된 <작은 미술관>(2019)은 작가가 주관적으로 재해석한 미술관의 역사다. 특히 낮은 담, 창, 회랑, 병풍 등 전통 건축의 요소를 추상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 작업을 완성한다.
아무 이익도, 목적도 없는 모임이라니, 당최 낯설 수밖에 없다. 목적 없는 유대가 곧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공존하는 거라면, 이를 알고는 있되 경험한 적 없는 기형적인 상황에서 온 무지다. 강력하게 관리되는 사회, 치열해지는 삶, 존재보다 생존에 목숨 거는 사회에서 이런 유대란 형성되기 곤란할 뿐 아니라 필요조차 없을지 모른다. 55분짜리 영상 <늦게 온 보살>(2019)과 그 ‘확장이자 출처’인 설치작 <모임> <맨발>(2019) 등이 모두 석가모니의 열반으로 상징되는 ‘누군가의 죽음’에서 출발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격변의 근현대사에서 희생된 이름 없는 이들을 기리는 사진 <세 개의 묘지>(2009)나 이들을 원귀로든, 원혼으로든 숲으로 불러내 함께 행진하는 영상 <시민의 숲>(2016) 등 그의 작업은 늘 애도의 정서를 전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누군가의 죽음조차 애도할 수 없는 ‘애도의 상실의 시대에 대한 애도’에 가깝다.


<늦게 온 보살>에는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산을 다니는 가혜, 무슨 이유인지 산행을 계속하는 중년 여성 보살, 그림을 그리거나 부처의 두 발을 기계로 만드는 청년들 등이 등장한다. 대사라곤 “피할 곳이 어디입니까?” 뿐인데, 그마저도 선문답이라 의중을 파악하긴 쉽지 않다. 다만 작가는 일본 원자로의 이름이 하나같이 보살 이름을 땄다는 점을 일러바치고, 신의 권능을 과학으로 모방하려는 현대인류의 욕망이 내재되었음을 일깨우며,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위풍당당한 컨테이너를 등장시킴으로써, 이 이야기가 결국 후쿠시마 쓰나미, 세월호 참사 등 국경을 초월한 재난의 시대를 사는 이들을 향해 있음을 암시한다. 네거티브 필름으로 찍은 영상이라 어두운 곳은 밝게, 밝은 곳은 어둡게 보이는데, 반전의 효과는 꽤 신선할 뿐 아니라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개연성이 없음에도 모두 연결되는 이 이상한 여정에 동행하도록 독려한다.

후쿠시마 지역에서 채취한 다양한 생물 및 사물을 ‘오토래디오그래피’로 만든 이미지 작업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2019)와 세트장, 촬영소 등의 풍경을 찍은 사진 작업 <세트>(2000)가 제각각의 리듬으로 연속상영되며 묘한 대구를 이룬다.
이번 전시에서 박찬경은 전과 달리 “공간 구성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했다. <작은 미술관>을 구성한 낮은 담, 회랑, 벽에 창을 내서 차경을 가져오는 등의 시도는 ‘셀프 오리엔탈리즘’을 피해 전통건축을 추상화한 결과다. 특히 <작은 미술관>과 <늦게 온 보살> 사이에는 일종의 ‘마당’이 있는데, 전시 기간 다양한 토크 프로그램이 모임처럼 열릴 곳이다. 그 중심에는 16개의 시멘트 판에 다양한 무늬의 물결을 그려 넣은 작업 <해인>(2019)이 미동 없는 연못처럼 놓여 있다. 바다에 삼라만상을 담고자 한 불교 개념을 시멘트의 육중하고도 단절된 상태로 표현한 작품인데, 웃길 것 없는 이 풍경이 지독한 풍자로 다가온다.




“미술관이 완성되기 전, <플랫폼>이라는 전시가 열렸어요. 그때 어느 노년의 남자가 와서는 한참을 울었다는 거예요. 고문 받았던 기억이 나서 그런다고.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요? 여기서 전시를 하는데 과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죠. 군사시설이 단 몇 년 만에 미술관으로 바뀐다는 것, 구금과 취조의 장소가 정신적 자유의 장소로 정변되는 데에 우리는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걸까요? 물론 이곳이 기여하는 바는 커요. 하지만 이토록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변화인가에 대한 질문은 누구도 하지 않아요. 어쩌면 그걸 이해하는 게 내 작업을 걸어두는 것보다 백배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작가 뒤편에 자리한 이응노의 역작 <군상>(1982)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표현하는 ‘유대’와 ‘모임’의 원형인 셈이다.
Credit
- 글/ 윤혜정(칼럼리스트)
- 에디터/ 손안나
- 사진/ 신선혜(인물),홍철기(전경),국립현대미술관 제공(전경)
- 웹디자이너/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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