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을 맞은 ‘바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될 때, 작가 우다영
화병의 시든 꽃잎을 바라보다가 새 출발을 위해 물건들을 정리하기로 마음 먹는 바자라는 여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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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MAN’S STORY
서른 살을 맞은 <바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여성 소설가 5인이 쓴 ‘바자’라는 여자의 이야기.
화병
바자는 화병에 든 꽃이 다 시든 것을 발견했다. 한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물방울 모양의 화병은 책장 남은 공간에 끼워 맞추듯 놓여 있었고, 버석하게 말라버린 겹겹의 라넌큘러스 꽃잎이 책머리와 카펫 위에 실수로 쏟아진 잉크 얼룩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바자는 자신이 언제 이 꽃을 꽂아두었는지, 오래전 축하받은 좋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손을 댈수록 가루가 되어 부스러지는 흑갈색 꽃잎을 쓸어 모으니 풍성해 보였던 꽃송이는 채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문득 바자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곧 서른여섯 살이 된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난 것이다. 내가 어디만큼 온 거지? 꿈에 가까워진 건가? 지난 시간이 가치가 있었나? 하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바자가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는 건 지금이야말로 새출발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바자는 화병을 품에 끼고 손에 잡히는 향초와 무드등도 집어 들었다. 이런 물건들을 모두 정리할 생각이었다. 본격적으로 옷장과 신발장, 보석함과 화장대를 차례로 열어 자신을 지나쳐 간 모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끄집어냈다. 스무 살에 처음 신은 레몬색 하이힐, 더운 휴양지에서 입었던 과감한 에스닉 원피스, 함께 들던 블랙&화이트 라탄 토트백, 실크를 도톰하게 덧댄 헤어밴드와 레이스 초크와 무정형하게 빚어진 실버 링들, 조약돌처럼 반짝거리는 매니큐어들, 열고 닫을 때 내장된 자석이 찰칵 소리를 내는 완벽한 립스틱들이 방 한구석에 모였다. 바자는 이 모든 물건들이 정말 필요했는지, 단지 세월을 낭비한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차근차근 높은 탑을 쌓아왔다고 믿었는데, 이제 쓸모를 다한 저 물건들은 한 더미의 무덤이 되어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동차 도로 사이에 마련된 길쭉한 거리 공원은 한낮에 비교적 한적했다.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 정자에서 장기를 두는 노인들, 부채를 들고 구경하는 노인들, 나란히 트랙을 돌며 쉼 없이 말하는 여자들, 돌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분수 물줄기를 조그만 손으로 어루만지는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다. 바자는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공원으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비어 있는 벤치 한쪽에 물건들을 늘어놓고, ‘나누어드립니다’라고 직접 적은 골판지 박스를 평평하게 접어 세워 두었다. 그리고 물건 오른편에 동행처럼 앉아 어딘가로 걸어가고 또 걸어가는 행인들을 구경했다.
처음 다가온 손님은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학생들이었다. 학교에 있을 시간이 아니냐고 묻자 그 애들은 단축수업의 이유를 설명해주었는데, 바자는 바뀐 교육 과정이 낯설어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한 여자애는 투명한 선파우더를 골랐고, 한 남자애는 경량형 양산을 골랐다. 고양이 무늬가 마음에 들어요. 정말 그냥 주시나요? 그럼. 언니는 어릴 때 선크림 발랐어요? 바자는 솔직히 아니라고 대답했다. 저런…… 그 애들은 탄식하며 자신들이 아는 동안 비법들을 털어놓았다. 바자는 그 애들이 떠난 후에도 속성으로 배운 페이스요가를 따라했다. 다음에 차례로 다가온 손님은 반려견들이었다. 목줄을 팽팽히 당기며 반려인을 끌고 와 꼬리를 흔들었다. 만지세요, 아니 만져보셔도 돼요. 다급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바자도 물건들을 구경하라고 착용해보셔도 된다고 말했다. 바자가 개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보고 축축한 혀에 손을 대보는 사이, 그들은 레인부츠를 신어보고 겨울 코트를 입어보았다. 바자가 한 리트리버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주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예쁘다고 귀엽다고 칭찬했다. 리트리버는 스카프 두건을 쓴 채 주인을 따라 산책로 트랙을 세 번 돌았고 바자에게 세 번 인사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장기를 두던 노인들은 물건을 받아가진 않았지만 다가와 오래 구경한 뒤 물과 부채를 선물하고 떠났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어린 엄마는 바자의 벤치에 함께 앉아 매니큐어를 발라보았다. 다섯 손톱에 모두 다른 색을 칠하고 손으로 하늘을 가리며 알록달록한 색깔을 기분 좋게 바라봤다. 어린 엄마가 말했다. 이번 한 주 중에 오늘이 제일 새로워요. 매일 매일이 똑같은 사건들뿐이었거든요. 바자도 자기 역시 마찬가지라고 맞장구쳤다. 물건을 나누어주러 나왔는데 뜻밖에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말했다. 여자는 바자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아주 용감한 사람인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물건들이 말해주잖아요. 틀림없이 무언가에 미쳐 있었겠죠?
바자는 생각해보았고 자신에게 분명 그런 시기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놀라운 기쁨을 주었다. 어린 엄마가 떠나고 더 많은 손님들에게 물건을 나누어주는 동안 바자는 자신이 가진 기쁨에 대해 생각했다. 석양이 질 즈음 벤치에는 바자와 화병만이 남았고 바자는 그것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언제든 찾아올 새로운 기쁨을 위해, 화병만큼 작은 공간을 비워둘 생각이었다.
우다영
2014년 등단해 <밤의 징조와 연인들>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 등을 펴냈다.
Credit
- 에디터/ 고영진
- 일러스트/ 진주희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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