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는 왜 수영장을 그렸을까? 사랑과 반항, 그리고 60년의 그림 이야기
영국의 소년에서 현대미술의 거장이 되기까지. 수영장, 퀴어 사랑, 사진 실험, 아이패드 드로잉까지 데이비드 호크니의 삶과 예술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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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영장과 캘리포니아의 빛을 자신만의 언어로 만든 현대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
- 퀴어 정체성, 사랑, 반항적 시선은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축이었다.
- 회화부터 사진, 아이패드 드로잉까지 그는 평생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탐구했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항상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아주 꼬마일 때부터 언제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이야말로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60년 동안 계속했다.
지금도 변함없다. 나는 이 일이 아직도 흥미롭다.
- 데이비드 호크니 -
사진/ Getty Images
데이비드 호크니는 누구 1937년 영국 요크셔의 산업도시 브래드퍼드에서 오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회계사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고,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는 엄격한 채식주의자였다. 급진적이고도 검소한 가정 배경은 훗날 반권위적 태도와 날카로운 감각을 설명해준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호크니는 열한 살 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천재적 재능을 보인 그는 1959년 런던 왕립미술학교(RoyalCollege of Art)에 진학했다. 다음해 테이트 갤러리(현 테이트 브리튼)에서 열린 피카소 전시에서 큰 충격을 받고, 그해 월트 휘트먼의 영향 하에 ‘사랑’ 연작을 시작했다. 1964년 로스앤젤레스로 옮긴 뒤 수영장, 팜트리, 캘리포니아의 빛을 자신의 시그너처로 만들었다. 호크니의 대표적인 그림은 대부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났다. 강한 햇빛, 넓은 하늘, 수영장이 있는 집들. 그 풍경이 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캔버스에는 런던의 회색빛깔 대신 강렬한 파란색 물과 분홍색 벽, 노란 햇빛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단순하지만 또렷한 색의 조합은 그를 대표하는 스타일이 되었고 점점 지평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세상에 나온 <A Bigger Splash>(1967)는 호크니의 이름을 들으면 바로 떠올리는 대표작이 되었다. 화폭 속에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파란 수영장, 반듯한 모던 하우스, 야자수 두 그루, 스프리울러, 파란 하늘, 텅 빈 다이빙 보드 위 의자, 거대한 물보라. 그런데 누군가 방금 뛰어든 것 같은 순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사진/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삶과 예술이 중첩한 자리 호크니의 그림은 단지 예쁜 그림이 아니라, 시대마다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에 반항했는지를 드러낸다. 호크니는 기본적으로 의심하고 반골 기질을 숨기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퀴어성이다. 영국에서 남성 동성애가 범죄로 취급되던 시기에도 그는 자신의 욕망과 사랑에 대한 믿음을 화면 안으로 적극 끌어들였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색채와 시선으로. 'We Two Boys Together Clinging'(1961)과 같은 초기 작품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매우 대담한 표현으로 사랑을 받았다. 1966년 UCLA에서 호크니의 수업을 듣던 미술학도 피터 슐레징어를 운명처럼 만나며 연인이자 뮤즈를 얻었고, 1971년 두 사람의 이별은 《‘예술가의 초상(Pool with Two Figures)》와 같은 걸작의 정서적 배경이 되었다. 작품 속 수영장 가장자리에 서서 헤엄치는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 바로 슐레진저다. 호크니의 캔버스 위 그림은 낙서처럼 거칠고, 사랑은 명확한 고백보다 구애의 암호처럼 나타난다. 검열을 피해 가는 방식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정체성을 숨기지 않겠다는 태도이기도 했다. 호크니의 퀴어성은 선언문처럼 무겁지 않았다. 밝은 색이 주는 해방감과 두 사람을 배치하는 방식에서 위트와 유머가 드러난다. 사생활과 예술이 더욱 가까이 결부된 결과물은 1973년 잭 하잔 감독의 다큐멘터리 <A Bigger Splash>다. 전 연인 피터 슐레진저와의 관계, 이별 후 아픔, 친구들과 퀴어 커뮤니티의 사적 장면을 밀착하여 담고 화가의 삶을 따라간다. 이처럼 모든 작품은 삶의 매 순간과 서사와 깊게 연루되어 있었다. 1974년부터는 그레고리 에번스와 오랜 관계를 이어 갔다 (훗날 스튜디오 운영 파트너로도 함께했다.) 호크니 재단은 그가 대략 203권의 스케치북과 1961년부터 1990년까지 ‘green albums’이라고 이름 불린 사진 일기를 남겼다고 밝힌다. 특히 1987년 스탠리, 1989년 부지를 차례로 입양한 닥스훈트 두 마리는 후기 작업에서 의외로 중요한 모델이었다.
사진/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의심하고 새롭게 보라 호크니가 사진을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끝내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작업을 관통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그는 평생 반항적 시선을 견지했다. 런던 왕립예술학교(RCA) 졸업을 앞두고, 그는 필수로 해야 하는 글 과제 제출을 거부했다. "화가는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학교는 졸업장을 보류했지만 결국 회화 부문 금메달과 졸업장을 함께 받았다. 이미지가 언어보다 열등하다는 낡은 질서에 대한 저항의 시작이었다. 설명보다 이미지, 규칙보다 시선, 제도보다 자기 방식을 믿으며 꾸준하게 작업을 이어왔다. 1990년 기사 작위를 거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란 떠는 걸 좋아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상이든 좀 의심스럽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호크니는 폴라로이드와 35mm 사진 수백 장을 이어 붙이는 '조이너(Joiner)' 작업을 본격 시작했다. 거창한 이론이 있던 것은 아니다. 자택의 거실과 테라스, 정원을 찍고, 사진을 이어붙이는 과정에서 우연히 기법을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카메라는 한 지점, 한순간, 하나의 원근법으로 세계를 고정한다. 실제로 우리 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고, 가까이 다가가고, 멈칫하고, 기억을 덧붙인다. 조이너는 시선의 지도였고, 인간이 눈을 통해 보는 방식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였다. 사진을 조각처럼 다뤄 화면을 구축한 실험은 ‘페어블로섬 하이웨이’(1986)라는 작품에 700장이 넘는 사진을 조합해낸다. 사막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앞좌석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시선을 한 폭의 화면에 담아낸 것. 꾸준한 탐구를 통해 쌓아 올린 의심의 실천이었다.
사진/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이 모든 과정에서 영감을 받은 아티스트가 바로 피카소다. 호크니는 평생 피카소를 영웅으로 여겼으며 작업 세계에 깊이 연루된 존재다. 피카소를 통해 한 양식에 머물지 않는 자유를 배웠고, 큐비즘에서 단일 시점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서구 원근법의 한계를 의심하게 됐다고 말해왔다. 급기야 2001년에는 자신의 저서 『Secret Knowledge』 에서 얀 반 에이크, 카라바조, 베르메르 같은 옛 거장들이 카메라 옵스큐라와 렌즈 같은 광학 장치를 활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해 또다른 논쟁을 일으켰다. 주장이 전면 수용됐는지와 별개로, 꾸준한 탐구와 의심은 회화를 사랑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사진/ GettyImages
회화에 대한 꾸준한 사랑 호크니는 회화가 끝났다는 말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이다. 사진이, 비디오가, 디지털이 등장해도 회화가 낡았다고 말하는 대신에 꾸준하게 질문해왔다. “지금, 회화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사진이 순간을 붙잡는다면, 회화는 시간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는가. 디지털 화면이 빠르게 이미지를 생산한다면, 화가는 천천히 볼 수 있는가.”
사진/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노년기에 접어든 그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매일 꽃, 나무, 계절의 변화, 비 온 뒤의 정원을 그렸다. 2008년 말, 그는 출시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폰으로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2010년 아이패드가 출시되자마자 호크니는 아이패드라는 새 스케치북을 곧장 마련했다. 종이에 잉크로 점을 찍고 선을 겹쳐 그리거나,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쌓아 올리던 그는 태블릿을 통해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직관적인 작업 방식을 시도할 수 있었다. 이를 '디지털 수채화'로 정의하며, 전통 회화의 감각과 디지털 기기의 속도를 결합하여 색다른 작업 세계를 열었다. 2023년 7월, 호크니는 프랑스 노르망디 시골을 떠나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몸이 쇠약해진 탓에 응급 상황에 대비해 병원과 가까운 곳에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일 3시간 남짓 기력을 모아 그림을 그린것으로 알려졌다. 노르망디 자택에서만 그린 그림이 200점을 넘었다고 알려져 있다. 매일 보고, 매일 그리고, 빛이 바뀌기 전에 손을 움직이는 일을 놓지 않았다. 2025년 4월 9일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에서 개막한 생애 최대 규모의 회고전 <데이비드 호크니 25>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작가들이 회화와 사진, 디지털 이미지, 설치, 무대, 영상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배경에는 호크니가 활짝 열어둔 문이 있어서다.
사진/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호크니가 긴 세월 동안 꾸준히 해온 작업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정말 세계를 제대로 보고 있는가. <A Bigger Splash>에서 튀기는 경쾌한 물보라는 우리 마음 속에서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사라진 뒤에도 오래 반짝이는 색, 방금 지나간 사람의 기척, 한 장의 이미지로는 담을 수 없는 시간을 포착해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주변을 한 번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다시 볼 것. 더 오래 볼 것. 유심히 마음을 다해 볼 때마다 또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사실을 믿을 것. 2017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회고전의 말미에 그가 직접 써놓은 두 단어인 ‘love life.’ 이 두 단어는 끊임없는 관찰에서 매일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에 대한 열정이 데이비드 호크니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아니었을까.
사진/ The David Hockney Foundation
데이비드 호크니 TMI
1. 40년 넘게 청력이 점점 약해져 강력한 보청기를 착용. 색깔별로 여러 개를 갖고 있었다. 청력 손실은 아버지 케네스로부터 유전된 것으로,"청력을 잃으면서 공간을 더 명확하게 보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2. 공감각(synesthesia)을 갖고 태어나, 음악을 들으면 색이 보이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능력은 참여한 1975년 작 《난봉꾼의 행각(The Rake's Progress)》, 1978년 작 《마술피리(The Magic Flute)》 등 오페라·발레의 무대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3. 2025년 프랑스 정부가 호크니 전시 포스터를 파리 지하철에 걸지 못하게 했다. 포스터에 담배를 들고 있는 호크니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 호크니는 이 조치를 “완전한 광기”라고 날 세워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 호크니는 담배 없이 못 사는 유명한 애연가였다.)
4. 해리 스타일스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정작 호크니는 해리 스타일스가 유명인인 줄 모르고 작업에 임했다 한다. 그림이 완성된 후에야 해리 스타일스의 뮤직비디오를 찾아봤다고.
5. 20대 중반부터 화가로서 유명세를 얻은 호크니는 어두운 머리카락을 금발로 염색하고, 알이 크고 둥근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줄무늬 의상을 즐겨 입고 밝은 색 양말을 신되 늘 짝짝이로 신었다. 입가엔 담배를 물고서. 그가 즐겨쓴 안경은 엘에이 아이웍스의 ‘big time’ 이라는 모델로 알려져 있다.
6. 화려한 인맥을 자랑했다. 소설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영화감독 빌리 와일더와 절친한 사이였고, 앤디 워홀, 칼 라거펠트, 피카소의 딸 팔로마 피카소, 영화계의 토니 리처드슨이나 데니스 호퍼, 시인 스티븐 스펜더 등과도 친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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