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비통 2026 크루즈 컬렉션, 중세와 미래를 잇는 여성의 갑옷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아비뇽에서 펼친 ‘패션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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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HE WORLD’S A STAGE
셰익스피어가 말했듯 세상은 하나의 무대다.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우리는 어떤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설 것인가. 중세 기사의 갑옷에서 현대 여성의 일상복까지 모든 옷은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무언의 대사이다. 프랑스 아비뇽의 고딕 성곽 안에서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이 영원한 명제를 패션이라는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갔다.







“온 세상이 무대이고 모든 남녀는 배우일 뿐이다. 그들은 퇴장하고 또 등장하며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여러 역할을 맡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에서 주인공 자크의 입을 통해 남긴 이 명제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다. 그리고 프랑스 아비뇽의 고딕 성곽 안에서 루이 비통의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이 철학적 명제를 패션이라는 언어로 재해석했다.
14세기 교황청(Palais Des Papes)의 중앙 안뜰 ‘쿠르 도뇌르(Cour D’Honneur)’.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이 신성한 공간에서 루이 비통이 브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2026 크루즈 여성 컬렉션 패션쇼 무대를 열었다. 700년의 침묵을 깨고 울려 퍼진 것은 기도가 아닌 패션의 선언이었다. 세트 디자이너 에스 데블린이 설계한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적 성찰이었다. 붉은 벨벳으로 된 계단식 극장 좌석은 텅 빈 채로 층층이 솟아올랐고 관객들은 오히려 무대 쪽에 배치되어 교회 벤치를 연상시키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관객과 무대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이 거대한 연극의 일부가 되었다.
“옷을 입는 건 모두가 참여하는 하나의 공연이에요. 그게 패션의 매력이고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요.” 제스키에르의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끊임없는 정체성의 연출에 대한 예리한 관찰이다.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인 어빙 고프먼이 <자아 연출의 사회학>이란 저서에서 다룬 개념처럼 우리는 매 순간 ‘연극으로서의 사회적 삶’을 수행한다. 이때 우리가 선택하는 패션은 단순한 옷이 아닌 캐릭터를 구현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즉, 패션은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는 가장 직관적인 언어이며 동시에 타인과 소통하는 비언어적 메시지인 것이다.
“일상은 물론 특별한 순간에도 의상은 기분, 외모, 그리고 분위기까지 변화시키며(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 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번 컬렉션은 패션이 지닌 이러한 전환의 힘에 경의를 표하며, 마치 무대 위 배우처럼 삶의 다양한 순간에서 얼마나 인상적인 조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컬렉션 노트에는 패션에 관한 가장 시적인 정의가 적혀 있었다. 루이 비통은, 그리고 제스키에르는 이제 트렌디한 패션이 아니라 더 깊고 짙은 패션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다. 모델 줄리아 노비스가 기사복을 입고 무대 위에 첫 발걸음을 내디딜 때, 그녀는 단순히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를 체현했다. 복잡한 중세식 튜닉에서 시작해 메탈릭 저지로 제작된 잔 다르크풍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룩은 시대를 초월한 여성성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냈다. “여성들을 위한 일상의 갑옷이죠.” 제스키에르가 미소 지으며 한 이 말 속에는 현대 여성이 마주하는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컬렉션은 시간의 층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화려한 브로케이드 재킷은 시어링 장식으로 마무리되어 중세의 웅장함과 현대적 세련미를 동시에 품었고, 레그오브머튼 슬리브와 풍성한 셔츠는 과거의 형태를 빌려 미래적 실루엣을 그려냈다. 특히 표면 질감에 대한 실험은 촉각적 경험을 시각적 스펙터클로 승화시켰다. 발가락 부분이 절개된 보석 장식 부츠는 수많은 거울과 귀한 소재로 빛났고 블라우스는 섬세한 은빛 체인 실로 짜여 빛의 움직임에 따라 살아 숨 쉬었다.








1930년대에 처음 선보인 루이 비통의 클래식 아이콘 ‘알마’ 백 역시 이번 2026 크루즈 컬렉션에서는 전혀 새로운 얼굴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희귀 고서의 표지에서 볼 법한 황금빛 3D 장식이 가미된 알마 백은 ‘필사본 장식(Manuscript Illumination)’을 연상시키며, 단순한 액세서리를 넘어 지식과 예술, 그리고 시간의 축적에 대한 오마주가 되었다. “역사를 바라보지만, 역사적이진 않아요.” 제스키에르의 이 말은 이번 쇼의 알마 백에 고스란히 담긴 철학을 압축한다. 그는 아서왕 전설에서 글램 록의 아이콘 데이비드 보위, 그리고 하임 자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런스를 엮어내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의 연속체로 직조했다.
“무대 의상에 큰 관심이 있었어요. 음악가, 배우, 무용수를 통해 패션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이니까요. 그것은 매우 집단적이고 동시에 굉장한 영감을 줍니다.”
제스키에르의 이 관찰은 패션이 단순히 개인적 표현을 넘어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는 힘에 대한 인식이다. 패션은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동시에 집단적 무의식을 반영하고 형성한다. 케이트 블란쳇, 엠마 스톤, 시어셔 로넌, 정호연 같은 배우들이 전열에서 이를 지켜보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그들 역시 각자의 무대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며 시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등장한 간결한 피코트와 니트웨어, 저지 아이템들은 일상이라는 무대의 현실성을 환기시켰다. 우리는 매일 아침 옷장 앞에서 그날의 역할을 선택한다. 회의실에서의 전문가, 카페에서의 연인, 집에서의 가족 구성원. 각각의 역할은 다른 의상을 요구하고 우리는 그 요구에 응답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클래식을 만들고 싶다면 먼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스키에르의 이러한 철학은 패션을 넘어 삶 전반에 적용되는 지혜다. 진정한 고전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시대만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야 한다. 이번 컬렉션이 중세의 형태를 빌려 미래적 감성을 표현한 것처럼 우리 또한 과거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새로운 내일을 창조해 나간다. 14세기 교황청의 고딕 아치 사이로 스며든 남프랑스의 황금빛 석양은 이 모든 철학적 사유에 서정적 마침표를 찍었다. 교황들이 기도했던 이 성스러운 공간에서 우리는 다른 형태의 경배를 목격했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창조에 대한,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경배였다.
결국 인생이란 거대한 무대에서 우리는 배우이자 동시에 관객이다. 우리가 고르는 옷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날 어떤 배역으로 존재할지를 암시하는 무언의 대사다. 제스키에르가 말했듯 패션은 ‘지금을 위한 갑옷’이자 감정을 드러내고 장면을 바꾸는 힘이다.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일생을 일곱 막의 연극으로 나누었다면 패션은 그 순간마다 다른 결로 스며들며 우리를 새롭게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배역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는가다. 그리고 옷을 통해 발견되는 아름다움과 의미야말로 우리가 이 무대 위에 선 진짜 이유일 것이다.
Credit
- 글/ 김민정(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 Louis Vuitton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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