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국현미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리는, '미술계 어른' 이강소를 만나다

도시의 유령이 되어 허연 갈대밭 사이를 거니는 일, 누군가 있었고 또 아무도 없었던 선술집 테이블에 앉아보는 일, 적막이 깔린 골목길에서 흩날리는 먼지에 대고 셔터를 누르는 일. 이강소에겐 사라지고 없어지고 다시 생겨나는 것들의 잔영을 감각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했다. 오는 11월 이 원로 작가의 51년 궤적을 좇는 대규모 전시가 열린다. 막이 오르기 전, 이제는 낡아 버린 테이블에서 그를 만났다. 어쩌면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4.11.01
먼저 축하드립니다. 지난 51년간의 화업을 정리하는 대규모 전시가 오는 11월 1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립니다. 과거엔 전시 기획도 여러 차례 해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번 전시는 전적으로 큐레이터에게 해석을 맡겼다고요. 고맙습니다.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왔네요. 나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웃음) 이번 전시는 기획하는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서 방향이 정해져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은 타자가 나의 작업 세계를 재해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기성세대들은 작가 자신이 주체이고 다른 외부 세계는 객체라고 보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아주 강했죠. 그런 시대를 근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구절은 근대 문명을 지탱하는 논리였어요. 그런데 지난 세기부터 ‘나’라는 주체가 상당히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어요. 현대는 주체와 객체가 모두 같은 세계 속에서 함께하고 있는 시대예요. 미술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작가가 주인공이 되어 감성을 표현하고 제3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식의 세계였다면 지금은 큐레이터의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전시를 또 다르게 전개시키는 것, 이것이 또 다른 창작 행위이고 저는 이런 협력의 방향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어떤 비판적인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고요. 저는 제가 약한 걸 잘 알아요. 작업이라는 게 쉽지가 않아서 제 작품 중에는 성공적이다 싶은 게 잘 없습니다.
겸손의 말씀을 하셨지만 51년 화업 전체가 실험의 연속이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가능하면 했던 짓거리를 피해서 막무가내라도 작업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관성에 대한 저항은 인간 본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현대미술은 숙련 같은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방법론을 구체화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각은 전통적으로 2만 년 넘는 시간 동안 사람 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손을 떠난 조각도 가능하지 않나, 그러니 나는 허공에 던져보련다, 이게 방법론의 전개라고 할 수 있죠. 도자기 반죽을 허공에 던져보니까 참 신비하대요. 회화도 그렇게 계속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작가 자신이 노력해야 해요. 저는 제 작업을 외부에 내놓을 때 항상 시원찮다고 느껴요. 계속 꺾여야 한다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제 작업을 변화시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작가가 되고 난 뒤에는 사진도 하고 조각도 하고 퍼포먼스도 하고 그랬죠. 비록 세련되지는 않지만 시도는 계속하고 있으니까 그런대로 봐줄 만하지 않나 싶어요. 숙련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보다 새로운 인식에 걸맞은 방법론을 제안하는 것이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대라는 체계에 걸맞은 형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어요.

당연히 1970년대 AG그룹 운동도 그런 방법론의 일환이었고요.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났는데, 연합군이 상륙하고 한국에 주둔하면서 서구 서적들이 PX를 통해 시내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는 일본을 통해 서구 미술 서적 같은 것을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세대예요. 그러면서 근대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한국인이면서도 서구의 미술, 심지어 당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던 서구의 현대미술까지 민감하게 반응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한국인으로서 우리 정서에 맞는 예술 형식이 가능하지 않을까 고민했죠. 서예나 동양화 같은 형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서구 미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키네틱아트나 팝아트를 따라 하고 있는 현실을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게 현대미술 운동이었어요. 1970년대 전후로 많은 젊은이들의 그룹이 그렇게 탄생하게 된 거죠. 젊은 세대 모두가 동료로서 이 고민을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의 물결이 강하게 일었던 겁니다.
당시 사진들만 봐도 시대적 열기가 느껴진달까요. 젊었을 때는 어떠셨어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잠도 잘 안 주무셨을 것 같아요. 정말 그랬어요. 그렇게 그룹 활동을 하다 보니 조그마한 그룹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겠더라고요. 사이즈를 키우려고 하니까 파벌이 있어서 방해를 받고요.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현대미술 하는 친구 몇몇과 근대미술 하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서 술을 마시고 대화했죠. 다들 열정이 대단했어요. 그렇게 열흘, 한 달 만나니까 근대미술 하던 친구들도 현대적인 사고로 전환이 되고 숫자가 점점 불어났죠. 학교도, 지방도, 파벌도 없이 그냥 밤새도록 으쌰으쌰! 하며 “현대미술로!” 외치곤 했어요.(웃음) 젊음이고, 순수함이고, 선의의 교류였죠. 같은 세대 안에서 공통의 문제를 인식하고 공유하고 소통하는 일. 여기에는 솔직함과 열정 그리고 자기 인생을 바치겠다는 각오 같은 게 없으면 안 돼요. 이것들이 어우러져서 우리나라 미술이 10년 내로 현대미술로 전환이 된 거예요. 중국은 1980년대, 일본은 1960년대 말에 그렇게 바뀌었는데 우리나라만큼 거세고 급격하진 않아요. 개인적으로 저는 지금의 서구 미술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요. 작년에도 전시회 때문에 뉴욕에 갔는데, 옛날의 경험과 별 차이가 없었어요. 서구 젊은이들의 사고가 아직도 관습에 젖어 있다,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관습을 깨부순 경험이 있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역사와 전통이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 작가들은 상당히 좋은 조건 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앞으로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방법론을 전개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강소, <소멸>, 1973,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t Myung-Dong Gallery.

이강소, <소멸>, 1973,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t Myung-Dong Gallery.

관습적 사고를 타파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지요? 아까 데카르트를 예로 들며 내가 주인공이 되는 서구의 근대 사상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동양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내가 중심이 되지 않고 자연과 함께하는 정신이 있어요. 왕희지의 유상곡수(삼짇날 정원에서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으로 떠내려오면 시를 읊던 연회)가 AD 300년대의 일이에요.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가 난정이라는 정자 옆 구불구불한 개울에 술잔을 띄워놓고 문인들과 한 잔씩 마시면서 돌아가며 시를 한 수 썼어요. 그 시들을 모아 철을 하고 왕희지가 서문을 붙인 게 바로 <난정서>예요. 동아시아 정신의 한 예시이죠.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유상곡수 유적이 우리나라 경주의 포석정이고요.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만 가도 바위에 반원형으로 홈을 파서 물줄기가 돌아가게끔 만들어놓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요. 일본에서는 요즘도 매년 봄에 유상곡수의 형식을 빌려 술 한 잔씩 하고 시를 한 수 짓는 이벤트가 열린다더군요. 동양에서는 이걸 ‘풍류’라고 해요. 거의 2천여 년 동안 동아시아 전반에 흐르고 있는 정신이죠.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새롭게 재해석한 <소멸>이 서울박스에 먼저 공개되었습니다. <소멸>은 1973년 단골 선술집에서 실제 사용하던 탁자와 의자를 전시장으로 옮겨와 일주일간 선술집의 일상을 조성한 획기적인 작품이었어요. 어느 날 선배가 작업실로 놀러 와서 포장마차에서 점심을 대접했는데, 문득 ‘이것 봐라, 난 선배를 볼 수 있고 선배도 나를 볼 수 있는데 나 자신은 나를 볼 수 없구나’ 싶었어요. 고개를 돌려도 나의 등은 볼 수 없잖아요. 선배는 선배의 경험을 갖고 있고, 나도 선배의 것과 다른 경험을 갖고 여기 앉아 있는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둘 다 같은 현실 속에 존재한다고 믿어요. 정말 그럴까. 주변의 담배꽁초, 막걸리 그릇, 냄비 태운 자국…. 그걸 보니까 마치 손님들이 저녁에 담배 피우고 막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같이 있다, 본다, 존재한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죠. 그래서 그날 거기 의자를 하나 사 가지고 작업실에 가져다 놓았어요. 며칠 후에는 전부 다 달라고 했고요. 그렇게 모든 기물을 명동화랑으로 가져가 일주일 동안 막걸릿집으로 운영했죠. 실재라는 건 참 허망하고 가상적이구나, 현실은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풍래수면시» 전시 전경. 작가가 1973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소멸>을 2024년 버전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공개했다.

«풍래수면시» 전시 전경. 작가가 1973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소멸>을 2024년 버전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공개했다.

저는 여기에 거울이 추가된 것이 흥미롭더라고요. 거울은 내가 못 보는 나의 뒷모습을 비춰줄 수 있는 사물이니까요. 탁자 위에 설치된 수십 개의 백열등은 주점 특유의 분위기를 재현한 것 같으면서도 꼭 우주의 별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아까 우리는 상대방의 앞모습은 볼 수 있지만 자기의 뒷모습은 볼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대해 큐레이터와 디자이너가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특해요. 덕분에 전시를 준비하면서 저도 많이 배우고 있어요. 거울을 걸겠다고 하길래 그거 너무 괜찮은 생각이네 싶더군요. 내가 못 보는 것을 거울이 비춰주기도 하니까요. 조명을 달자는 의견엔 그 음침한 공간에 빛을 비추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환상을 불러일으킬지라도 빛은 의미가 있죠.
이보다 2년 전인 1971년 선보인 <여백>은 낙동강의 갈대를 한 트럭 가득 베어 흰 페인트를 뿌린 뒤 전시장에 심어 관객들이 거닐게 한 관객참여형 작품의 효시입니다. 저에겐 <소멸>과 <여백>이 양자물리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엔 새로운 과학 이론이 물밀듯 발표되던 시기이지 않습니까. 이런 과학 사상이 작업에 영향을 주기도 했는지요? 서적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런데 세상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구나’ 하는 것들을 발전시킨 거였어요. 어릴 적 시골집에 차를 타고 오갈 때 낙동강 변에 갈대밭이 보이곤 했죠. 여름에는 어린아이들이 거기서 막 새카맣게 멱을 감고 싱싱했는데, 가을에는 늪이 없어지니 갈대가 다 말라서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고 그러더라고요. 전에 본 갈대와 지금 보는 갈대, 내가 생각하는 갈대가 전혀 달랐죠. ‘이 갈대 전부 헛것이었구나.’ 그때 AG그룹이 국립현대미술관의 공간을 빌려서 각자 방을 하나 반 개씩 쓰게 됐는데, 뭘 가져다 채울까 하다가 용기를 낸 거죠. 실제로 낙동강에서 트럭에 갈대를 싣고 와서 허연 갈대밭을 만들었어요. 아주 조용한 상태로요. 이건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저는 갈대밭이 흔들리면 그 사이로 영혼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웃음)

이강소

이강소

전시 제목 «풍래수면시»는 ‘바람이 수면으로 불어온 시간’을 뜻합니다. 바람은 확정된 모양이 없고 어느 방향에서 어떤 세기로 부는지에 따라 완전히 그 성격이 달라집니다. 경험과 기억에 따라 모든 것의 본질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선생님의 통찰과 비슷하달까요? ‘풍래수면시’는 소옹이라는 사람이 쓴 시 ‘청야음’에서 발견한 문구예요. 성리학자들이 깨달음을 얻은 상태를 표현한 시죠. 저는 성리학보다는 풍류를 더 좋아하지만 이 시는 굉장히 함축적이라서 재미있더군요. 마침 최근 작품의 제목이 <바람이 분다>이기도 하고요. 바람이 불면 수증기가 날아오고, 비도 내리고, 생물이 생기고, 만물이 생성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제목을 즐겁게 사용하고 있어요.
바람은 기운을 상징하기도 하죠. <청명>처럼 일필휘지의 역동적인 붓질로 작업하는 회화 작업에서는 특히 기운을 중히 여기신다고요. 아이에게 연필과 크레용을 쥐여주면 마음대로 그리는데 거기엔 성인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순수함이 있어요. 옛날 국전에서도 기술적으로 아주 잘 그린 사군자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보단 덜해도 아주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이 있었죠. 그 사람을 형성하는 기운이나 지적인 여러 요소들이 작가 자신도 모르게 그림에 나타나는 거예요. 저는 서양의 액션 페인팅도 좋아하는데, 거기에도 주관적인 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물리학적으로는 증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전통은 동아시아에서 강하게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를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단지 그것만으로 유효한 결과를 얻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회화로서 증명이 되면 좋겠지요.

<여백>, 1971, Reed, paint, plaster,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t The 2nd AG Exhibition.

<여백>, 1971, Reed, paint, plaster,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t The 2nd AG Exhibition.

사진 작업도 그런 맥락의 실험입니까? 사진사를 쭉 훑어봤는데, 대부분 대상을 찍어왔더군요. 렌즈라는 것 자체가 생물체의 눈과 다른 제3의 눈이잖아요. 우리 눈동자가 아닌 기계의 눈동자로 보는 세상이고 그렇게 찍힌 사진은 우리가 보는 것과 전혀 다르죠.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사진에 찍힌 건 대상이 아니라 빛이나 먼지일 수도 있는데 왜 대상에 집착할까, 렌즈의 역할을 더 활용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촬영을 할 때 노출을 잘 못 맞춰요. 언제나 기본 노출로 두고 찍습니다. 오래된 한옥도 좋고, 골목도 좋고. 으슥하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공간에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그렇게 볼 순 없지만 느끼는 것을 렌즈를 통해 촬영합니다. 농담으로 귀신을 찍고 싶다고 말하곤 합니다.(웃음)
“우주는 출렁이는 환상의 세계이며 삼라만상이 고유한 물질이 아닌 홀로그램과 같은 허상이라는 것, 불교의 공즉시색의 사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확장하는 여러 가능성 속에 있을 뿐, 어떤 것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수백 수천의 에너지, 빛, 전기가 이 3차원의 상상의 물질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상의 산물이다.” 2015년 작가노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가끔 장자님의 말씀이나 우주의 법칙에 대해 공부하다가 허무주의에 빠지곤 합니다. 선생님은 아무 계산도 의도도 감정이입도 없이 그저 그려질 때까지 아주 많은 획을 연습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허상이라면 이런 미술 행위는 왜 중요하다고 보시나요?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나 자기의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렇고요. 저도 나이 여든이 넘어서야 이렇게 전시 하지 않습니까? 기쁘기도 하지만 서글픔도 있어요. 제가 현대미술 운동을 하다가 시골 대학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의 작업장에서 30년을 보냈어요. 내가 뭐 하려고 이런 짓을 할까 싶을 때도 있었죠. 화가도 욕망의 덩어리인 직업이지만 작업하는 순간만큼은 상당히 열정적이잖아요. 만사를 제쳐놓고 작업하는 과정에서 오는 긴장감 같은 게 여전히 즐겁습니다. 작업장이 있는 조그마한 언덕 위에 제가 십여 년을 먹고 자고 한 단칸방이 있어요. 최근에 수리를 시작했는데, 지금 가장 바라는 건 빨리 거기서 소나무를 바라보며 차 한 잔 하는 거예요. 여전히 그런 희망이 있으니 이만하면 괜찮다 싶어요. 단칸방에서 차 한 잔 마실 수 있으면, 그러면 됐지요.
※ «이강소: 風來水面時 풍래수면시»는 2024년 11월 1일부터 2025년 4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손안나는 <바자>의 피처 디렉터이자 <바자 아트>의 편집장이다. 여전히 미술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는 노년의 작가를 마주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Credit

  • 글/ 손안나
  • 사진/ 김형상(인물, 전시 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