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런던 패션 위크 40주년, 아이코닉 모먼트
런던 패션 위크가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창조해 온 런던은 어떻게 세계 패션계를 이끌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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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87번의 패션 위크. 네 번의 강산이 바뀌는 동안 런던은 끊임없는 변화와 함께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 산업에서, 적응과 혁신은 필수적이었다. 런던은 그 흐름을 누구보다 빠르게 읽었고, 거침없이 새로움을 선도했다. 뉴욕이 글로벌 메가 브랜드의 중심이라면 밀란과 파리는 럭셔리 파워하우스의 집합소. 그렇다면 런던은? '크리에이티브 허브(Creative Hub)'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속가능성과 창의성으로 무장한 젊은 디자이너부터 유서 깊은 헤리티지 브랜드까지, 런던의 패션 DNA는 그 어느 곳도 예외 없이 창의적이다.
그 창의적 에너지는 영국 경제 전반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패션 위크 창립 이래 영국 패션 산업은 약 44조 원을 경제에 기여했고, 산업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영국 패션 협회는 젊은 창작자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지난해 학사와 석사 과정에 있는 30명의 학생들에게 4억 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한 것도 그 연장선. 패션계의 새로운 세대가 앞으로 어떤 혁신을 일으킬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런던 패션 위크는 단순한 패션 이벤트를 넘어, 영국 패션 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핵심적인 축으로 자리 잡았다. 패션의 전진기지로서 그 창의적 유산을 구축해 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코닉한 순간들이 탄생했다. 런던 패션 위크의 40주년을 맞아, 시대별 키워드와 함께 패션의 역사 속에 남은 주요 모먼트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각 시대를 관통한 트렌드와 혁신 그리고 그 이면에서 영국 패션 협회가 어떻게 이 모든 발전을 뒷받침해 왔는지 살펴볼 시간이다.
"이번 시즌은 런던 패션 위크 40주년 기념의 대미를 장식하며 전례 없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180 더 스트랜드에서는 BFC 앰배서더 사라 모워(Sarah Mower)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로빈 데릭(Robin Derrick)이 기획한 회고전이 열렸고, '시티 와이드 셀러브레이션(City Wide Celebration)'을 통해 영국 전역의 대중과 소통할 기회를 마련했죠. 런던의 본질을 기리며 버버리, 1664 블랑, 헌터 부츠와 함께한 에픽 파티로 축하를 마무리했습니다. 경제적 도전에도 불구하고 업계에는 변함없는 낙관주의가 존재하며, 앞으로의 40년이 더욱 기대됩니다."
– 영국 패션 협회 최고경영자(CBE), 캐롤라인 러쉬(Caroline Rush)
- 1984년, 첫 런던 패션 위크 리셉션에서 디자이너 캐서린 햄넷(Katharine Hamnett)은 “국민의 58%가 퍼싱 미사일을 원하지 않는다. (58% DON’T WANT PERSHING)”라는 반핵 시위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를 만났다. 사회적 메시지를 거침없이 표현했던 디자이너들은 억압에 맞서며 자유를 향유하는 낭만적 정신을 품고 있었다.
- 런던 패션 위크 첫 번째 시즌에 데뷔한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역사적인 디자이너가 세상에 등장한 순간.
- 80년대 런던 패션의 상징적인 브랜드, 보디맵(Body Map). ‘패션은 몸을 위한 것’이라는 철학 아래 옷은 개성 표현의 수단이라고 여기며 다양한 체형과 문화(LQBTQ+)를 반영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포스트 펑크와 뉴 로맨틱 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연결된 혁신을 선도했다고 평가받는다.
1986년, 재스퍼 콘랜(Jasper Conran)의 FW86 컬렉션 쇼에서 런웨이 데뷔를 한 나오미 캠벨(Naomi Campbell)과 1987년 존 갈리아노의 쇼에서 첫 데뷔전을 치른 모델 케이트 모스도 주목할 만한 모먼트 중 하나다.
- 1993년, 영국 패션 협회(BFC)는 “New Generation” 프로젝트(오늘날의 NEWGEN)를 시작하며 신진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새로운 플랫폼을 마련했다.
- 1995년, 스텔라 매카트니(Stella McCartney)의 졸업 쇼에는 나오미 캠벨, 케이트 모스, 야스민 르본 등 당대 최고의 모델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후 단 두 컬렉션 만에 끌로에(Chloé)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
⁃ 1998년, 전직 발레리나 출신 모델 샬롬 할로우(Shalom Harlow)는 흰색 드레스를 입고 회전하는 플랫폼 위에서 산업용 로봇이 뿌리는 검은색과 노란색 페인트를 맞으며 우아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패션, 문화, 기술이 얽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의SS99 컬렉션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 2000년, 예술과 패션은 한 끗 차이라고 하지 않던가. 후세인 샬라얀(Hussein Chalayan) 은 가구에서 영감을 받은 독창적인 의상을 선보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조각 작품에 가까운 커피 테이블 드레스는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피스.
- 2008년, 매튜 윌리암슨(Matthew Williamson) 쇼에서 공연을 펼친 프린스.
- 2009년, 런던 패션 위크에서 처음으로 라이브 스트리밍을 시도한 버버리(Burberry). 시어링 애비에이터 재킷은 런웨이가 끝난 바로 직후 구매할 수 있었다.
- 2012년, 런던 올림픽 개최와 동시에 런칭된 ‘런던 컬렉션: 맨즈’.
- 2018년, 프론트 로우에 리차드 퀸의 쇼를 관람한 엘리자베스 여왕 2세.
- 같은 해, 런던은 4대 패션 위크 도시 중 처음으로 ‘Fur-free’를 선언했다.
- 버버리는 자연을 배경으로 진행된 런웨이를 생중계로 전달했다.
- JW 앤더슨(JW Anderson)은 직접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패키지를 인플루언서와 프레스에게 전달했으며 디지털 런웨이를 펼쳐낸 시몬 로샤(Simone Rocha). ‘집’이라는 주제로 모델들이 각자의 집에서 촬영한 영상을 편집해 컬렉션을 소개한 것도 중요한 부분.
그 창의적 에너지는 영국 경제 전반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패션 위크 창립 이래 영국 패션 산업은 약 44조 원을 경제에 기여했고, 산업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영국 패션 협회는 젊은 창작자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지난해 학사와 석사 과정에 있는 30명의 학생들에게 4억 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한 것도 그 연장선. 패션계의 새로운 세대가 앞으로 어떤 혁신을 일으킬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런던 패션 위크는 단순한 패션 이벤트를 넘어, 영국 패션 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핵심적인 축으로 자리 잡았다. 패션의 전진기지로서 그 창의적 유산을 구축해 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코닉한 순간들이 탄생했다. 런던 패션 위크의 40주년을 맞아, 시대별 키워드와 함께 패션의 역사 속에 남은 주요 모먼트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각 시대를 관통한 트렌드와 혁신 그리고 그 이면에서 영국 패션 협회가 어떻게 이 모든 발전을 뒷받침해 왔는지 살펴볼 시간이다.
"이번 시즌은 런던 패션 위크 40주년 기념의 대미를 장식하며 전례 없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180 더 스트랜드에서는 BFC 앰배서더 사라 모워(Sarah Mower)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로빈 데릭(Robin Derrick)이 기획한 회고전이 열렸고, '시티 와이드 셀러브레이션(City Wide Celebration)'을 통해 영국 전역의 대중과 소통할 기회를 마련했죠. 런던의 본질을 기리며 버버리, 1664 블랑, 헌터 부츠와 함께한 에픽 파티로 축하를 마무리했습니다. 경제적 도전에도 불구하고 업계에는 변함없는 낙관주의가 존재하며, 앞으로의 40년이 더욱 기대됩니다."
– 영국 패션 협회 최고경영자(CBE), 캐롤라인 러쉬(Caroline Rush)
1980’s — 개방과 창조
패션쇼에 셀럽, 인플루언서,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을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사진과 영상 대신 비밀스러운 노트에 자신의 의견을 써 내려갔던, 그것이 곧 브랜드의 평판을 좌지우지했던 과거의 패션쇼는 오직 업계인들에게만 열린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였다. 1983년 영국 패션 협회(British Fashion Council, 이하 BFC) 창립 이후, 이듬해 열린 런던 패션 위크는 기존의 장벽을 과감히 허물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더 많은 대중, 특히 미디어에 문을 열며 패션쇼의 접근성이 확대되었고, 패션 PR과 커뮤니케이션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미디어의 역할은 신진 디자이너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자신을 알릴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러한 개방성 덕분에 런던 패션 위크는 가장 포용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행사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렇게 런던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창의적 에너지가 넘치는 패션의 중심지가 되었다. - 1984년, 첫 런던 패션 위크 리셉션에서 디자이너 캐서린 햄넷(Katharine Hamnett)은 “국민의 58%가 퍼싱 미사일을 원하지 않는다. (58% DON’T WANT PERSHING)”라는 반핵 시위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를 만났다. 사회적 메시지를 거침없이 표현했던 디자이너들은 억압에 맞서며 자유를 향유하는 낭만적 정신을 품고 있었다.

존 갈리아노 1985 가을 레디 투 웨어 패션쇼

보디맵 1985 봄 레디 투 웨어 런웨이 쇼
1986년, 재스퍼 콘랜(Jasper Conran)의 FW86 컬렉션 쇼에서 런웨이 데뷔를 한 나오미 캠벨(Naomi Campbell)과 1987년 존 갈리아노의 쇼에서 첫 데뷔전을 치른 모델 케이트 모스도 주목할 만한 모먼트 중 하나다.
1990’s — 반항과 실험
런던이라는 도시는 반항과 자유라는 양분에서 자라났기 때문일까.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세계적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런던 패션 위크는 예술과 혁신의 중심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알렉산더 맥퀸과 스텔라 매카트니의 데뷔는 런던을 글로벌 패션의 무대로 끌어올렸고, BFC의 주도 아래 젊은 인재를 지원하는 뉴젠(NEWGEN) 프로그램은 신진 디자이너들이 주목받을 기회를 제공하여 도시의 명성을 더욱 강화했다. 젊은이들로부터 빠르게 퍼져나간 펑크, 그런지,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영향으로 파격적이고 반항적인 디자인을 선보인 런던 패션 위크. 전통적인 패션 규범을 깨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며 실험적인 무대로 자리 잡았다. - 1993년, 영국 패션 협회(BFC)는 “New Generation” 프로젝트(오늘날의 NEWGEN)를 시작하며 신진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새로운 플랫폼을 마련했다.
- 1995년, 스텔라 매카트니(Stella McCartney)의 졸업 쇼에는 나오미 캠벨, 케이트 모스, 야스민 르본 등 당대 최고의 모델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후 단 두 컬렉션 만에 끌로에(Chloé)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

알렉산더 맥퀸 SS99 컬렉션의 샬롬 할로우
2000’s — 디지털 전환
실험과 혁신은 멈추지 않았다. 밀레니엄 이후, 영국 패션 협회는 뉴젠(NEWGEN) 디자이너 지원 프로그램을 확장했다. 그 일환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패션 포워드(Fashion Forward) 프로그램이 탄생했으며, 이를 통해 후세인 샬라얀(Hussein Chalayan), 크리스토퍼 케인(Christopher Kane), 에르뎀(ERDEM), 록산다(ROKSANDA) 등이 주목받았다. 한편, 본고장 영국을 떠나 밀란에서 활동하던 버버리는 크리스토퍼 베일리(Christopher Bailey)의 지휘 아래 런던 패션위크로 돌아오며 2000년대 런던 패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베일리는 패션계 최초로 라이브 스트리밍을 도입해 'See Now, Buy Now' 시대를 열었으며, 디지털 시대에 맞춘 패션쇼 형식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적인 방식에 도전했다. 
후세인 샬라얀의 커피 테이블 드레스

매튜 윌리암슨 SS08 쇼의 프린스 공연

버버리 AW10 런웨이
2010’s — 다양성의 융합
현재와 가까워지면서 런던 패션 위크의 정체성은 더 확고해졌다. 전통과 혁신, 상업과 예술은 더 이상 이분법으로 재단되지 않았고 디자이너는 젠더, 지속 가능성, 서브 컬처, 디지털 기술과 같은 시대적 주제에 귀를 기울였다. JW앤더슨(JW Anderson)은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를 넘나드는 디자인을 선보였고 찰스 제프리(Charles Jeffrey)의 “러버보이(Loverboy)”는 규범을 깨는 과감한 디자인으로 퀴어 컬처에 관해 이야기했다. 윤리적인 패션을 지향하는 스텔라 매카트니는 처음으로 비건 레더를 사용해 팔라벨라(Falabella) 백을 선보였으며 런던은 ‘빅4’ 도시 중 가장 먼저 라이브 스트리밍을 제공했다. 이 시기에는 로열패밀리의 적극적인 서포트도 주목해야 할 부분. 지금의 영국 국왕 3세는 ‘런던 컬렉션: 맨즈’(지금의 런던 패션 위크 맨즈)를 론칭하며 헌츠맨(Huntsman), 기브스 앤 호크스(Gieves & Hawkes)와 같은 새빌 로(Savile Row)의 터줏대감부터 웨일스 보너(Wales Bonner), 마틴 로즈(Martine Rose), 크레이그 그린(Craig Green) 등의 주목받는 남성복 브랜드까지 다양하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션 위크를 방문해 리처드 퀸(Richard Quinn)에게 최초의 엘리자베스 여왕상을 수여했고 패션쇼에 참석해 쇼를 관람했다. - 2012년, 런던 올림픽 개최와 동시에 런칭된 ‘런던 컬렉션: 맨즈’.

런던 패션 위크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여왕 2세

버버리 AW18 런웨이
2020’s — 하이브리드 시대
코로나19 팬데믹은 런던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폐쇄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외출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런던 패션 위크는 디지털 방식을 채택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이때를 두고 한 말일지도 모른다. 성별 구분 없는 플랫폼으로 전환되면서 디자이너들은 더욱 유연하게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영국 패션 협회는 BFC 파운데이션 패션 펀드를 설립해 약 24억 원의 기금을 마련, 위기에 처한 패션 산업을 지원했다.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신진 디자이너들도 디스커버리랩(Discovery LAB)과 같은 전시 프로그램을 통해 공식 일정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받았다. 팬데믹이 끝난 후 런던 패션 위크는 디지털과 오프라인 쇼가 결합한 하이브리드 형태로 발전했다. - 버버리는 자연을 배경으로 진행된 런웨이를 생중계로 전달했다.
- JW 앤더슨(JW Anderson)은 직접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패키지를 인플루언서와 프레스에게 전달했으며 디지털 런웨이를 펼쳐낸 시몬 로샤(Simone Rocha). ‘집’이라는 주제로 모델들이 각자의 집에서 촬영한 영상을 편집해 컬렉션을 소개한 것도 중요한 부분.
현재 그리고 미래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현재는 모든 과거를 담고, 그것은 다시 미래에 새겨진다.'고 말했다. 과거가 있어야 변화가 생기고, 변화가 있기에 미래도 가능하다. 만약 런던 패션 위크가 지난 40년 동안 정체되어 있었다면, 지금의 ‘빅4’ 타이틀은 결코 거머쥘 수 없었을 것이다. 런던의 젊은 창작자들은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면서도 표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오히려 비창의적인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그들의 오리지널리티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에 가깝다. 런던 패션 위크는 이 거침없는 창의력을 세상에 선보이며 패션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지속적인 혁신을 이야기하는 이 도시의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젊은 디자이너들의 열정과 그들을 지원하는 영국 패션 협회에 아낌없는 찬사와 응원을 보낸다. Credit
- 글/ 런던 통신원 한지연
- 사진/ gettyimages
Celeb's BIG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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