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프리즈 라이브에서 달밤의 공연을 선보이는 제시 천

아트 위크를 앞둔 네 작가들의 작업실에서, 완성에 도달해가는 작품을 앞에 두고서.

프로필 by 안서경 2024.09.04
지난 1년 사이 여러 전시에서 ‘제시 천'이라는 이름을 유독 자주 발견했다. 타데우스 로팍의 국내 작가 6인을 조명한 그룹전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에서, 아트선재의 극장형 전시 «혀 달린 비»에서. 프리즈 서울이 남긴 이득 중 하나는 해외로 이주한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무대를 한국으로 소환한 것도 있다. 제시 천은 지난해 6년 만에 서울을 방문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드로잉, 영상, 설치작품 등 다양한 매체로 언어를 탐구해온 그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것 역시 지도»에 참여하기 위해 수개월간 서울에 머물며 쉴 틈 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올해 초 제시 천은 MMCA 고양 레지던시에 입주해 서울과 미국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세 개의 영주권을 가진 사람으로 살며, 외국에 있으면서도 한국 전통 음악이나 춤은 제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주제였어요. 저도 모르게 원형적인 걸 찾아간 것 같아요. 할머니께서 전통 무용수이자 수도승이셨거든요. 한지라는 소재도 계속 다루고 싶었는데, 작년에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할아버지가 20년 동안 한지 공장을 했다고요.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어요.” 그렇게 탄생한 <시: Concrete Poem>은 직접 기술을 지닌 무당을 찾아가 종이오리기 기법(설위설경)을 전수받아 완성한 작업이다.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종이를 오리며 혼을 부르고 태우는 의식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아세믹(asemic)한 글자들을 한지 위에 흑연으로 채운 다음 글자를 하나씩 오려내는 수행적인 작업이다. “일종의 언어에 대한 ‘명상’이에요. 선을 긋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잘못 자르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고. 그럼에도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게 너무 좋아요. 언어가 다른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하면서, 이 작품은 내가 만든 ‘포털’이라 여기며 작업하죠.”
<시: concrete poem (no.042024)>, 2024, Graphite on hand-cut ottchil dyed hanji, aluminum frame, 75x37cm.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Commonwealth and Council.

<시: concrete poem (no.042024)>, 2024, Graphite on hand-cut ottchil dyed hanji, aluminum frame, 75x37cm.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Commonwealth and Council.

줄곧 제시 천의 시선은 ‘언어’에 붙들려왔다. “언어가 지닌 한계를 예술의 주요한 주제로 삼게 된 건 어떤 언어든 완벽히 번역될 수 없다는 걸 제 삶에서 체득해왔기 때문이죠. 언어의 여러 가능성을 내포한 ‘시학’에 이끌린 것도요. 다시 한국에 온 뒤로부터 그동안 제가 해온 시도들이 하나로 묶여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언어, 의미, 시간. 세 가지 축을 맴돌며 작업을 지속하고 있어요.” 작업실에는 대표적 연작들이 이제 막 과정에 있는 것도 있고 완성되어 배치된 것도 있다. 또 다른 시리즈 <탈언어화의 악보>는 언어의 가능성을 한계 없이 사유한 작품이다. 국제 공용어인 영어를 추상화해 로마자가 박힌 스텐실을 여러 겹 중첩한 다음 ‘악보’라 명명한 것. 단순히 프레임 속에만 드로잉을 남기지 않고, 뮤지션과 댄서들에게 악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독한 다음 퍼포먼스를 수행하게 만들었다. “언어와 그 안의 의미들이 비선형적인 통로로 나오는 ‘악보’인 셈이죠. 드로잉을 ‘활성화(activation)’시키고 싶었어요.”
한국에 머물며 제시 천의 관심사는 점점 우주적이고 원초적인 것으로 향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탈식민주의’라는 키워드를 오랜 시간 탐구해왔어요. 이 주제에 몰두해본 사람들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여기에서 나아가 요즘은 서양이 만든 타임라인이 존재하기 전, 이전의 시간은, 언어는 어떤 형태였을까? 시간이 날 때마다 절에 가서 스님들과 이야기하며 ‘순환’이라는 주제, 비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에 대해 대화하곤 해요. 얘기가 잘 통하거든요.(웃음)” 물·불·흙·나무·쇠로 이루어진 음양오행에 영향받아 작업의 재료 또한 점점 자연적이고 동양적인 것을 선호하고 있다고. 푸른색으로 옻칠 염색한 한지를 매만지고 그 위를 흑연으로 드로잉하고, 갖가지 생김새의 돌에 영상을 투사한다.
《Jesse Chun: 밤, 낮, 달, 비, Speaking in Tongues》 커먼웰스앤카운슬 로스앤젤레스 2024 전시 전경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Commonwealth and Council. , Jesse Chun with Yeonhee (Kim Hyangsooree, Ahn Yoohee),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Art Sonje Center.
제시 천의 가장 현재의 시선을 집약한 것들이 퍼포먼스로 구현된다. 9월 4일 삼청 나이트 기간 동안 프리즈 서울 라이브 프로그램으로 지난 아트선재에서 선보인 무대를 확장한 것. 김향수리, 안유희와 함께 상모돌리기와 전통 연희를 재해석한 몸짓과 움직임을 보여준다. “<탈언어화의 악보(천지문 그리고 우주, no.042823)>라는 퍼포먼스 앞에 ‘달마당’이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해요. 마당극은 관객과의 거리가 가깝고 위계나 층이 없잖아요. 달이 뜨는 밤 10시에 야외 마당에서 시작하려고 해요. 드로잉을 걸고, 영상을 바닥에 투사하고, 그 위로 전통 무용수들이 자유롭게 판을 여는 거죠. 제 식대로 한국 전통을 재해석하는 데 이끌려요. 원래의 것대로가 아니라 변주를 주는 게 재미있어요.”

Credit

  • 글/ 안서경
  • 사진/ 이구노
  • 헤어&메이크업/ 장하준(제시 천)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