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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디바, 새 앨범 <75>를 낸 가수 정미조

“운명은 디자인한다고 해서 그대로 가는 게 아니에요.” 삶이란 그런 거라고, 정미조가 말했다.

프로필 by 안서경 2024.08.24
드레스는 Ports 1961. 선글라스는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베레, 펌프스는 Roger Vivier.

느닷없이 정미조가 등장했다. 추억 속 가수들이 그렇듯 슈가맨을 찾아나서는 프로그램에서도 아니고, 흥행 영화 OST로 나타난 것도 아니다. 8년 전 정미조는 정규 앨범 <37년>을 냈다. 말 그대로 37년 만에 낸 컴백 앨범에는 오직 자신의 목소리로 13곡을 가득 담았다. 리메이크 한 곡 없이, ‘개여울’과 ‘휘파람을 부세요’ 단 2곡을 빼면 모두 신곡으로. 재즈, 보사노바 등 다양한 스타일의 곡을 담은 앨범은 대중음악평론가와 EBS 스페이스 공감이 선정한 ‘2000년대 대중음악 명반 100’에 꼽히기도 했다. 최근 정미조는 숫자 두 개가 쓰인 새 앨범을 발표했다. <75>. 그의 나이만 간결히 쓰인 신보를 만들며 유독 처음 해본 것이 많다고 했다. 최백호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피처링을 한 적 없던 그는 이효리, 존박, 하림 등 후배 가수 여럿과 함께 녹음을 마쳤다. 누구보다 시간의 흐름에 초연한 채 노래하는 그에게 문득 삶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하퍼스 바자 대기실에선 차분히 계시다 카메라 앞에 서면 생생한 에너지를 내더라고요. 포토그래퍼의 요청에 즐겁게 응하면서요.
정미조 패션 매거진 촬영은 처음이에요. 일흔 넘어 이런 제의를 받는 게 선물 같은 일이죠. 저에겐 도전이었는데 원체 새로운 거 해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서른 살에 파리로 유학갔던 것처럼요. 화보 촬영도 사진예술이잖아요. 포즈를 취할 땐 무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앵글을 보고 있으면 그림 그릴 때 구도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드레스는 Leey.Leey. 케이프는 Ermanno Scervino. 선글라스는 Highcollar. 롱 부츠는 Miu Miu. 장갑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LP를 들고 와달라 요청드렸는데, 앨범을 든 컷에서 음반 제작자 분이 “50년이 한 컷에 담겨 있네요” 하고 말하더라고요. 1973년 ‘미조의 파도’가 실린 앨범은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아요.
정미조 그때는 그때만의 느낌을 내려고 한 거죠. 내추럴한 아름다움이 없던 시대였지만요.(웃음)
하퍼스 바자 새 앨범 <75>를 위해 7명의 후배 가수들이 처음 피처링에 참여했어요. 선공개 곡 ‘엄마의 봄’은 <이효리의 레드카펫>에서 이효리 씨와 함께 무대에 섰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미조 마지막 앨범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제작자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어요. 효리 씨와 서로 1절, 2절을 나누어 불러선지 딸이 부르고, 엄마가 부른 것 같았죠. 화음도 넣어야 하고, 혼자 부르는 게 아니니 어떻게 맞춰야 할까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죠. 후배들 덕분에 에너지를 얻어서인지 목소리가 젊어진 것 같아요. 오히려 더 노래하고 싶어졌죠.
하퍼스 바자 개인적으로는 존박과 함께 부른 ‘너의 눈망울’이라는 곡이 신선했어요. 요즘 인디 포크 노래 같은 멜로디에 얹혀진 두 사람의 목소리가 관능적으로 들리더라고요. 녹음실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정미조 한 명 한 명 다 기억에 남아요. ‘너의 눈망울’이라는 곡은 저도 모르던 숨어 있는 목소리를 찾아준 곡이에요. 존박 씨의 젠틀하고 근사한 목소리에 맞춰 제 목소리도 좀 달라졌던 것 같아요. 하림 씨는 천재적인 싱어송라이터라 생각했는데, ‘살아있는가’라는 곡에서 얼마나 가창력이 좋은지 깜짝 놀랐어요.
재킷은 Daily Mirror. 선글라스는 Bottega Veneta by Kering Eyewear. 귀고리는 Zara.


하퍼스 바자 2016년 <37년> 앨범을 낸 이후 꾸준히 무대에 섰습니다. 홍대 공연장 벨로주에서도 쇼케이스를 했죠. 다시 오른 무대는 어땠나요?
정미조 음악과는 거리를 두고 미술대학 강단에 서고 있었죠. 너무 바빠서 정년 퇴임을 하면 여행을 다녀야지, 생각하던 때에 최백호 씨가 찾아왔어요. 왜 노래는 안 하냐고 묻더군요. 그렇게 지금 제작사 대표를 만나고 이끌리듯 선 무대가 너무 좋더라고요. 몇 년 전 눈이 나빠졌는데,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지니 노래가 찾아온 걸까 싶고요.
하퍼스 바자 이화여대 서양학과 재학 시절 축제에서 가수 패티 김의 눈에 띌 만큼 노래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다죠.
정미조 당시만 해도 여대생이 외부 활동을 못했던 시대예요. 학교 행사에서만 노래를 불렀는데, 초대 가수 패티 김 선생님이 끝나자마자 절 부르더군요. ‘패티김쇼’에 불러주셨지만 학칙 때문에 졸업하고 나서야 1972년에 TBC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에 첫 출연을 했어요. 그때 ‘My Way’를 불렀는데 갑자기 MBC, KBS 방송사에서 서로 노래를 불러달라더군요. 제대로 된 시스템에서 실컷 노래나 좀 불러볼까, 하는 마음이었어요. ‘가요계 신데렐라’ 같은 타이틀이 붙었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을 보내다 야마하 국제가요제 가창상을 받고 나니 미련이 안 남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가요계 데뷔 8년 차에 돌연 파리행 유학을 택했죠. 파리7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13년 동안 미술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무대가 그립진 않았나요?
정미조 그때 처음 고독의 감각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 같아요. 직접 천을 사다가 캔버스 틀을 짜고 그림을 그렸죠. 학교 갔다 오면 녹음한 프랑스어 강의를 다시 사전 찾아가며 듣고. 유학생들과 어울리는 일도 그다지 즐기지 못 했어요. 너무 외로운 날에는 꼭대기 방에서 야경을 내내 보고, 이브 몽탕의 ‘고엽’을 혼자 불렀어요. 내가 나를 쓰다듬는 기분이 드는 곡이거든요.
하퍼스 바자 서른 살에 그런 결정을 한 게 초연하게 느껴져요.
정미조 쉽게 얻어진 유명세이니 쉽게 버리고 갈 수 있었던 거예요. 예술을 하기 위해선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재킷은 Daily Mirror. 귀고리는 Zara.

하퍼스 바자 예술을 하고 싶었던 건 언제부터였나요?
정미조 그림과 음악이 항상 제 곁에 있었어요. 외가 쪽이 미술을 전공해서 그림 그리는 건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사생대회에서 상 받고, 만화를 그려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아이였죠.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셜 댄스’를 추시던 기억이 나요. 슬로, 슬로, 퀵, 퀵 하면서. 블루스, 맘보 춤을 추시는 걸 방 아랫목에 가만히 앉아서 보다가 혼자 그걸 기억하고 추곤 했어요. 전공을 선택해야 할 때쯤 입시 교육을 받았는데, 성악은 발성 공부하는 게 너무 지루해 미술을 택했죠.
하퍼스 바자 재능과 끼가 넘쳤던 거네요.
정미조 저는 노력형이에요. 무언가 주어지면 그냥 몰입해요. 단순해요. 삶 자체가 그런 식이었어요. 그림을 그릴 때도 문득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도 그걸 직접 그려보지 않으면 몽상에 그치는 거죠. 반복하고 시도하고 노력하다 보면 의도치 않았던 무언가가 만들어지기도 해요. 그래서 제 그림은 드로잉만 수백 수천 장이에요. 노래를 부를 때 입술이 부을 만큼 연습하다 보면 새로운 창법이 찾아져요. 이번에 ‘너의 눈망울’도 그렇게 부른 곡이죠. 그냥 직관으로는 알 수 없어요. 반복 안에 새로운 발견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순간이 매번 새로워서 예술을 계속 하고 싶었는 건지도 몰라요.
하퍼스 바자 김소월의 시를 가사로 삼은 ‘개여울’처럼 문학적인 정서를 생생히 살리는 점도 대중에게 정미조가 오래도록 각인된 이유죠. 좋은 노래가 주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미조 곡 하나가 소설 한 편처럼 문학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각자가 느끼는 감흥은 다를 테지만, 무대에서 곡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관객들을 보면 여전히 경이로워요. 지난 벨로주 공연에서도 어느 젊은 관객이 공연을 시작한 처음부터 끝까지 울더라고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찾을 수도 없고.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그렇게 순수한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것이 음악이, 예술이 주는 힘이라 아닐까, 생각해요.
재킷은 Daily Mirror. 실크 스커트, 귀고리는 Zara. 선글라스는 Bottega Veneta by Kering Eyewear. 메리제인 힐은 Prada. 스타킹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유독 각별하게 느끼는 가사를 지닌 곡을 꼽아본다면요?
정미조 ‘개여울’을 가장 좋아하지만, 이번 앨범의 ‘엄마의 봄’은 저를 제일 힘들게 한 곡이에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이후에 ‘엄마’라는 단어를 쉽게 입 밖에 낼 수조차 없었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인터뷰에서든 상처를 드러내기 싫어서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부르면서 엄마라는 말을 되찾게 해준, 음악으로라도 엄마를 만날 수 있게 한 곡이라 생각해요.
하퍼스 바자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우리, 집> OST를 특히 즐겨 들었어요. 샹송인 ‘La Vie Est’를 부른 감회가 어땠을지 궁금해요. 한 시절을 보낸 나라의 언어로 부르시는 거니까요.
정미조 처음엔 너무 생소했어요. 발음과 단어 하나하나 다시 곱씹으면서 불렀죠. 소화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13년의 세월은 무시 못 하나봐요. ‘1시간 전곡 듣기’ 유튜브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죠.(웃음)
하퍼스 바자 “La vie est une aventure sans fin, Le bonheur est special, cache dans les petits moments. La vie est un cadeau, un tresor a cherir.(인생은 끝없는 모험이며, 행복은 특별하고 작은 순간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인생은 선물이자 소중한 보물입니다.)” 가사가 기억에 남더라고요. 정미조가 생각하는 ‘la vie(인생)’는 무엇인지도 궁금해요.
정미조 삶이란 각자 다른 거죠. 아무리 미래를 생각하면서 지내도 계획대로 안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운명은 자기가 디자인한다고 해서 그대로 가는 게 아니에요. 제게 인생은 여태까지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선물이 한 번에 터지는 느낌이에요

Credit

  • 사진/ 박배
  • 헤어/ 한지선
  • 메이크업/ 이아영
  • 스타일리스트/ 박이화
  • 어시스턴트/ 정지윤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