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뭔가 있어보여! 책 읽고 글쓰는 텍스트 힙의 시대

이미지의 세상을 지나 텍스트의 세상이 도래하는 기운이 느껴진다. 요즘 가장 ‘힙’한 건 글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

프로필 by 고영진 2024.08.08
인스타그램에서 생소한 알람이 울린다. “○○님이 회원님이 좋아할 만한 스레드를 게시했습니다.” 작년부터 ‘스레드’ 기능이 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사용하진 않았다. 나는 이미 구 ‘트위터’ 현 ‘X’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스레드를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에 일으킨 분란의 나비효과로 생겨난 메타의 아류작이라고 삐딱하게 바라보았으니까. 스레드가 출시 1년 만에 제법 몸집을 불렸다. 부속 기능 중에 하나였는데 별도의 앱까지 출시했다. 그런데 ‘글’이라니? 24시간이 지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스토리 기능과 온갖 유행과 센스를 꾹꾹 눌러 담은 사진(그것도 10장)으로 승부하는 인스타그램과 글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데. 뜬구름 잡는 사진 한 장 올려놓고 애매모호한 이모지나 영단어 하나만 홀연히 써놓는 포스팅이 미덕이던 때가 전생처럼 느껴진다. 물론 나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 열 장을 꽉 채워 올리는 것도 모자라 번호를 달고 하나하나 설명하는 글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그런 포스팅마다 “선배 지금 캡션 써? 직업병이다. 병이야”라는 댓글이 달렸다) 본격적인 텍스트 서비스가 널리 퍼지고 있다는 건 어떤 기류를 감지하게 한다.
이른바 ‘텍스트힙’은 자극적인 숏폼과 이미지 콘텐츠에 지겨움을 느낀 젊은 세대들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던 트렌드의 반대 급부인 글과 독서에 관심을 쏟는 현상으로 설명된다. 힙한 취미로 떠오르기 전까지 독서는 자기소개서의 취미란에 쓰는 궁색한 변명 같았다. “집에서 마냥 굴러다니지는 않고요. 책을 읽곤 해요.” 정말 책을 많이 읽는 사람에게도 독서라는 취미는 대수롭지도 않고 자랑할 만한 거리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독서 트렌드는 자랑을 동반한다. ‘#독서인증 #독서기록 #지적욕구 #뭔가힙해 #뭔가있어보여’라는 해시태그만 봐도 욕구를 숨기지 않는다.
이미 해외에서는 다양한 독서 패턴이 여러 방향의 선을 그리고 있었다. 배우 케이티 홈즈가 뉴욕 지하철 구석에 구겨지듯 앉아 책에 몰두한 모습부터 파리 지하철의 독서하는 미남들 모음 사진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모델들이 오랜 대기 시간을 이겨내는 해결책으로 책을 선택한 순간, 비키니 입은 미녀들이 모래사장이나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 모습은 개인에 대한 선망에서 트렌드로 번져나갔다. 얼마 전 Z세대를 대표하는 모델 카이아 거버를 통해 재확인된 선언 ‘Reading is Sexy!’처럼 지식은 섹시하다는 인식이 먹히기 시작한 것도 한몫한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카이아 거버의 엄마는 전설의 모델 신디 크로퍼드고 아빠는 거부다)이 독서 클럽을 만들며 섹시한 독서를 하자고 말하는데 누가 마다할까. 우리나라에서 이런 화력을 불어넣은 건 걸그룹 르세라핌의 멤버 허윤진이다. 스타들의 리얼한 일상을 좇는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허윤진은 헤어&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휴대폰 대신 책을 들었다. 영문 원서에 줄을 긋고 메모까지 하는 모습은 우리나라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장면이었고 이는 독서의 유혹으로 이어졌다.
틱톡에서는 1분 내외의 독서 감상을 영상으로 업로드하는 ‘북톡(BookTok)’이라는 콘텐츠가 유행하고 인스타그램과 X에서는 ‘왓츠인마이책장’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이 가진 책을 마음껏 전시한다. 디지털 세대에서 생겨난 인스타그램 매거진(글과 사진을 통해 축약된 정보나 사적인 시선으로 큐레이팅한 포스팅을 올리는 계정)이 실물 책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간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폭발적인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얼마 전 열린 국제도서전. 정부가 바뀌고 도서 예산이 충격적으로 삭감되는 와중에 출판인들이 고군분투해 연 첫 도서전이었다. 더 이상 책이 자리할 곳이 없을 거라는 두려움을 깨고 닷새 동안 15만 명이라는 역대급 인파가 몰렸다. 더욱 놀라운 건 방문자의 대부분이 20~30대였다는 것. 이 결과치는 텍스트힙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한 독립서점이 젊은 세대들이 서점을 찾아 인증샷만 찍고 간다는 토로하는 일도 있었지만 도서전의 분위기는 전투적일 정도로 책을 구입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판매율과 인스타그램 포스팅으로 이어졌다. 책을 읽지 않고 이미지만 소비한다며 ‘패션 독서’라는 말에 조롱을 싣는 이들도 보이는데 책을 사는 것만으로 출판 시장을 살리고 지식도 얻고 인증샷을 남길 수 있으니 이만큼 좋은 취미도 드물지 않은가.
활자의 힘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도 발현된다. 아티스트와 팬이 직접 소통하는 느낌을 주는 소셜네트워킹.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하니가 아이유 콘서트 게스트로 무대에 선 뒤 전용 소통 앱인 ‘포닝’을 통해 쓴 장문의 글은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큰 여운을 남겼다. 팬사인회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맞잡는 것도 기쁨이 넘치는 소통이지만 찰나가 아닌 정제된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호흡을 고르고 진솔한 언어를 선택하는 과정은 사진과 영상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이기에. 텍스트힙이라는 트렌드가 어떻게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활자를 통해 뻗어나가는 현상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우천시가 어느 동네인가요?’ ‘지금 저한테 심심한 사과를 하시는 건가요?’ 같은 기가 막힌 문해력이 통용되는 이 시대에 사는 한자세대 사람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Credit

  • 글/ 박의령(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김래영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