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패션계를 장악한 엄마와 딸

패션계 딸들에게 패션은 오랜 놀이터였다. 그리고 이제 차세대 딸들이 이 업계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프로필 by 윤혜영 2024.06.13
2007년 커스티 흄과 딸 바이올렛.

2007년 커스티 흄과 딸 바이올렛.

지난 7년간 피비 파일로는 런웨이에서 종적을 감췄지만, 2월 런던 패션위크 버버리 쇼에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그녀의 10대 딸이 등장하면서 다시 화제가 됐다. <WWD>는 ‘버버리 쇼의 피날레를 장식한 피비 파일로의 딸 마야 위그램을 소개한다’를 메인 기사로 파일로(클로에와 셀린느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난 10월 웹사이트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딴 컬렉션을 영국 아티스트이자 아트 갤러리, 펍 오너인 맥스 위그램과 함께 론칭했다)의 18세 자녀를 소개했다. 많은 매체가 기사 제목을 이런 식으로 뽑았는데, 예를 들면 <데이즈드> 디지털의 경우는 다음과 같았다. ‘어젯밤, 버버리의 피날레를 장식한 피비 파일로의 딸은 신비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 바이올렛 흄이 구찌 2024 S/S 컬렉션 런웨이의 피날레에 등장했을 때는 그리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미 우리가 지난 6년여 동안 런웨이를 휩쓸고 광고 캠페인을 찍는 등 세간의 이목을 끌 만한 모델들, 그리고 할리우드 유명인 자녀들의 활동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1990년대 슈퍼모델 커스티 흄의 20살 딸은 카이아 거버(신디 크로퍼드의 딸), 지지와 벨라 하디드(욜란다 하디드의 딸들), 클레멘타인 번(클라우디아 시퍼의 딸), 레니 클룸(하이디 클룸의 딸), 릴라 모스(케이트 모스의 딸), 그리고 안나 클리브랜드(팻 클리브랜드의 딸)에 뒤이어 ‘네포-베이비(Nepo-Baby)’ 리스트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건 좀 흥미롭지만, 2023년 7월 케이트 모스의 전 남자친구였던 제퍼슨 핵이 결혼을 하면서 안나 클리브랜드는 릴라 모스의 의붓어머니가 됐다. 그리고 릴리 로즈 뎁(바네사 파라디와 조니 뎁의 딸), 데바 카셀(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의 딸), 조지아 메이 재거(제리 홀과 믹 재거의 딸), 아멜리아 그레이 햄린(리사 리나와 해리 햄린의 딸)처럼 부모 모두가 유명한 경우도 있다.

2024 F/W 버버리 쇼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마야 위그램. 2024 S/S 구찌 광고 캠페인 속 바이올렛 흄. 2024 S/S 디올 오트 쿠튀르 쇼에 선 데바 카셀. 2024 F/W 스텔라 매카트니 컬렉션에 선 릴라 모스.
“패션 업계에서 인지도는 항상 긍정적인 작용을 하죠.” 시드니에 위치한 채드윅 모델 인터내셔널 담당 매니저 조세프 테니는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델의 스케줄을 잡을 때, 몇몇 고객의 경우 유명인 부모가 있는지에 대해 신경을 쓴다고 말한다. 레니 클룸이나 마거릿 퀄리(미국 배우 앤디 맥도웰의 딸)와 같은 좀 더 어린 친구들은 현재 모델보다는 ‘패션 아이콘’으로 정의 내리는 것이 맞다고. 그런 그도 카이아 거버에 대해서는 유명인 부모가 있든 없든 간에 반드시 캐스팅되었을 인재라고 설명한다. “저는 그녀가 어쨌거나 매우 훌륭한 모델이 되었을 거라 생각해요. 얼굴, 몸, 카리스마, 워킹… 다 갖췄으니까요.” 물론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분명히 어머니 덕분에 유리한 시작을 하긴 했죠.”
슈퍼모델의 자녀가 상대적으로 최근 두드러지는 양상이기는 하나, 패션계 딸들은 결코 새롭게 대두된 현상은 아니다. 예를 들면 소니아 리키엘의 전 회장이자 디렉터인 나탈리 리키엘은 ‘니트의 여왕’으로 불린 그녀의 엄마 소니아와 1975년부터 이미 모델로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 1954년 에두아르도 펜디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내이자 공동 창업자인 아델은 5명의 자녀(파올라, 프랑카, 카를라, 알다, 안나)와 함께 회사를 운영했다. 안나의 딸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현재 펜디 맨즈웨어와 액세서리의 아티스틱 디렉터이며 그녀의 딸 델피나 델레트레즈 펜디는 2020년 주얼리 컬렉션의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그런가 하면 미소니의 창업자 로지타와 오타비오 미소니의 딸 안젤라 미소니는 1997년부터 2021년까지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다. 그녀의 딸인 마르게리타 마카파니 미소니의 경우 여러 미소니 컬렉션을 지휘하기 전, 어머니 안젤라의 어시스턴트로 일한 바 있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그녀는 자신의 성을 딴 ‘마카파니’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했다. 디올은 또 어떤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딸 라켈레 레지니(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미술사로 학사를, 젠더사회학으로 석사를 받았다)는 2019년 브랜드의 문화 관련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2023년에는 디올 레이디 95.22 백 광고 캠페인에 등장하기도.

2010년 비앙카 스펜더와 카를라 잠파티. 2017년 라켈레 레지니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패션 브랜드를 책임지는 엄마와 딸 듀오가 늘고 있는 추세다. 엄마와 함께 일하거나 엄마의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해서 딸들에게 압박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편 컨템퍼러리 패션 브랜드를 책임지는 엄마와 딸 듀오도 늘고 있는 추세다. 샤를로트와 베르나데트 데 게이터가 디자인하고 있는 벨기에의 베르나데트, 이탈리아의 루이자 베카리아(베카리아와 그녀의 딸 루실라 보나코시가 디자인한다), 미국의 하우스 오브 아마(레베카 헨리와 아쿠아 샤바카), 영국의 TDS(샐리와 레티 패틴슨), 벨라+프랭크(한나 피치 태커와 레슬리 굿맨 피치), 프랑스의 메종 클레오(클레오와 마리 듀엣) 등이 있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 일하거나 엄마의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해서 딸들에게 압박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비앙카 스펜더는 설명한다. “저는 패션 업계에서 일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오스트레일리아 패션 디자이너 카를라 잠파티의 세 명의 자녀 중 하나인 그녀는 10살 때부터 엄마의 작업실에서 놀며 다양한 분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훗날 다른 두 명의 형제자매도 가족 사업에 들어왔는데, 그녀의 오빠 알렉스 슈만은 현재 카를라 잠파티의 CEO이고, 연방의회 의원으로 일하고 있는 막내 동생 알레그라는 회사의 매니징 디렉터로 잠시 일한 바 있다.) 18살 때부터 디자인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스펜더는 “엄마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두려웠어요. 저는 경쟁하고 싶지 않았거든요”라고 고백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정말 굉장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죠. 그 공간에 들어설 때면 ‘그래 나는 무조건 잘해야 해. 이 특권을 모두 누리고 있잖아’라고 생각했어요. 책임감도 많이 느꼈고, 제가 누리는 기회를 최대한 살리는 게 저의 의무라고 느꼈어요.” 그녀는 NSW대학교에서 무역 관련 학위를 땄고, 이후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TAFE NSW(국립교육기관)의 패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학업을 마친다. 그리고는 1999년 졸업 후 유럽으로 떠났다. “저는 ‘호주에서는 도저히 일을 찾을 수 없어. 내 힘으로 찾았다고 절대 여기지 않을 테니까’라고 생각했지만, 뭐 그래도 나름 괜찮았어요.” 스펜더가 말한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프리랜스 패턴메이커로 잠시 일한 뒤 파리로 건너가 마틴 싯봉에서 디자이너로 3년간 일했다. 싯봉이 9·11테러에 연이어 (당시 많은 브랜드가 그랬듯이) 파산 신청을 하자, 스펜더는 파리와 런던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인터뷰를 하러 다녔다. “어느 날 엄마가 오시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넌 나 말고 다른 사람들 하고만 일하려고 하는 거야?’ 당시 엄마는 함께 일하는 3명의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일이 순조롭지 않았더라고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자, 딱 3개월, 25착장, 한 시즌 컬렉션이야. 잘되면 남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데로 떠나도 좋아.’” 물론 처음 시작부터 그들은 정반대의 미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브랜드는 잘 굴러갔다. 잠파티는 날카로운 재단과 구조적인 디자인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스펜더는 몸을 편안하게 감싸는 느슨한 실루엣을 선호했다. “컬러 팔레트, 느낌, 재단… 사실 모든 것이 달랐어요.” 2004년 컬렉션에서 엄마의 브랜드를 위해 디자인을 시작한 그녀가 말한다. 결국 2006년 봄, 새로운 서브 브랜드를 론칭하기로 결정한다. 비앙카 스펜더 포 카를라 잠파티가 바로 그것이다.

2007년 나탈리와 소니아 리키엘

2007년 나탈리와 소니아 리키엘

저는 앞으로도 영원히 패션계의 딸일 거예요. 하지만 제 비전과 제가 만든 세계를 진정으로 믿기까지는 긴 여정이었어요 - 비앙카 스펜더

2008년 카를라 잠파티 그룹 산하에서 비앙카 스펜더 라인을 론칭했지만, 2018년에는 자신이 직접 인수하기에 이른다. “제가 제 브랜드를 사게 됐을 때, 엄마는 정말 자랑스러워 했어요. 이후에는 저 혼자서 꾸려나갔죠.” 스펜더의 말이다. 덧붙여, 호주에서는 가족 경영 체계의 패션 비즈니스를 다소 유럽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설명한다. “호주는 유럽과는 조금 다른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게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어요. ‘그러니까 족벌 경영인 거네요?’” 엄마의 브랜드에서 일할 때, 실제 주변의 반응이었다.
“저는 앞으로도 영원히 패션계의 딸일 거예요. 하지만 제 비전과 제가 만든 세계를 진정으로 믿기까지 긴 여정을 보냈고, 이제는 제가 만든 공간을 믿고 동시에 엄마의 멋진 재능과 유산이 있다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만약 파리에서 계속 있었다면 제 삶에 이런 이야기를 절대 담아내지 못했을 거예요. 이 여정은 진심으로 엄마를 존경하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존중하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했죠. 하지만 동시에 저만의 목소리와 스타일, 방향성, 방식을 찾는 데도 중요했어요.”

Credit

  • 글/ Patty Hungtington
  • 번역/ 이민경
  • 사진/ GettyImages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