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에디 마티네즈가 걸어온 그리는 길

에디 마티네즈는 미술에 관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그리는 길을 걷는다.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회화를 탐구해온 그의 걸음걸음.

프로필 by 안서경 2024.05.02
<BH Stack #32>, 2019, Oil, spray paint, collage and push pins on canvas, 101.6x76.2cm.

<BH Stack #32>, 2019, Oil, spray paint, collage and push pins on canvas, 101.6x76.2cm.

«투 비 컨티뉴드(To Be Continued)»전은 지난 20여 년 동안의 작품 세계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주제라는 분류 외에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보여주고자 했나요? 각 작업 스타일의 강력한 예시를 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작품들을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부분도 있었고요. 사람들이 항상 기꺼이 작품을 빌려주지는 않으니까요. 주제별로 골고루 선정하는 데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흐름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스케일도 맘에 듭니다. 특히 40×30인치의 다섯 작품을 일렬로 나란히 두었는데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가장 큰 회화작품 하나는 이번 전시를 위해 작업했습니다.
험프티 덤프티 같은 캐릭터와 북유럽 추상표현인 코브라(CoBrA)의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린 질감, 자유로운 도식에서 받은 영향이 작품에 한데 섞여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우표, 동전, 만화를 수집했다는 일화 또한 지금의 예술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일종의 노스탤지어를 다루는 방법이죠. 저는 어릴 때부터 항상 시각매체로 생각이나 소통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표를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모았죠. 전반적으로 예술품, 미니어처, 특정한 시계 등 정말 온갖 것을 수집합니다. 이제 좀 그만해야 될 정도로요.(웃음) 대중문화는 우리 삶에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죠. 세상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저는 제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릴 뿐입니다. 아까는 닥터페퍼 캔을 그렸는데요. 이것도 문화적인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업실에서 벽에 걸린 캔버스에 지체 없이 그리는 모습이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사용하는 점이 그래피티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 앉아 있는 이 방에도 벽에 그린 그림이 있어요. 평소 애용하는 샤피펜으로 그린 듯한 검은 형상에 보라색 스프레이가 뿌려져 있네요. 그렇게 볼 수 있겠어요. 저는 그림 그릴 때 감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가능한 한 빠르게 그리려고 합니다. 스프레이 페인트는 제가 원하는 대로, 가능한 대로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도구 중 하나고요. 유화로 바로 작업하기 꺼려지는 넓은 영역에 색을 테스트해보고 싶을 때 스프레이 페인트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오래 써왔던 도구이기도 해요. 집에 있는 라디에이터 같은 데를 이 스프레이로 칠해버리기도 하거든요.
항상 종이와 펜을 들고 다니며 스케치를 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님을 확인했어요. 지금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요. 처음 그렸던 것들을 기억하나요? 드로잉은 제가 하는 모든 작업의 원동력입니다. (그는 작은 메모지에 검은색 샤피펜으로 자신의 죽은 반려견 프랜시스를 그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카툰 캐릭터인 지기(Ziggy), 가필드, 스머프 같은 걸 따라 그렸어요. 그림이 원본과 가까워질수록 더 신이 났고요. 저에게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드로잉 사이에서 ‘살아남았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죠. 나비, 화분, 테니스공 같은, 일상에서 영감 받은 모티프가 수년에 걸쳐 그림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자연스럽게 남는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이 그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지금 그린 이 조그만 프랜시스는 꽤 잘 그려졌으니 여기서 변형하고 수정해가면서 다음 작품에 영향을 미칠 때까지 무언가를 계속할 것입니다. 기준은 없습니다. 제가 믿지 않는 뭔가를 그리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다라>의 경우 2005년 그렸던 드로잉을 어시스턴트가 우연히 발견하면서 새롭게 대형 회화로 그리게 된 시리즈이죠. 동양 철학과 종교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티베트 불교의 모래 만다라 수행을 좋아했습니다. 3주나 한 달 동안 모래 만다라를 만들고는 작업이 끝나면 바로 지워버리는데 그 수행은 덧없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죠. 모양 자체가 여러 가지 색을 넣을 수 있는 구조물 같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만다라의 기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저에게 어떤 그릇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반복하고 다시 그리는 동안 시간의 간극에서 새롭게 발생하고 발동되는 것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저는 과거를 자주 돌아보는 편입니다. 제 스튜디오에는 수년 동안 그린 드로잉을 모아둔 파일철이 있어요. 어떤 때는 파일철을 둘러보고 2005년도부터 그린 드로잉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을 골라내곤 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드로잉을 모아 발간한 책 <Drawings>를 가리키며) 이 책이 저에게 아주 유용한데 여기에 2005년부터 2011년까지의 드로잉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보다가 맘에 드는 그림을 발견하면 다시 그리곤 합니다. 설령 제가 수백만 번을 그린 똑같은 그림이라도요. 따라서 이미 그려졌다 하더라도 끝난 것이 아니고, 항상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아마 저는 어떤 것이든 항상 똑같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같을 수 없는 이유는 저의 계속되는 삶을 투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무리 노력해도 15년 전에 그렸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릴 수는 없으니까요.
<Emartllc No.4 (Sound Bath II)>, 2023, Oil, acrylic and silkscreen ink on linen, 182.9x274.3cm.

<Emartllc No.4 (Sound Bath II)>, 2023, Oil, acrylic and silkscreen ink on linen, 182.9x274.3cm.

껌이나 물티슈 같은 일상적인 물건을 캔버스에 콜라주하거나 캔버스 천 조각, 그림을 찍은 사진 등을 사용해 독특한 질감의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성격이었어요. 그게 평생 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웃음) 그래도 점점 강박관념이 줄어들어 무엇을 그리게 될지 정하지 않게 되었죠. 다양한 완성 단계에 있는 캔버스를 50개 정도 두고 그 중에서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어떤 것은 잘라서 다른 캔버스에 붙이곤 합니다. 정해진 형식은 없습니다. 물티슈는 손에 묻은 물감을 닦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너무 많은 쓰레기가 발생하는 걸 신경 쓰게 되면서 패널에 붙이기 시작했어요. 저는 심지어 색을 어떻게 쓸지도 계획하지 않아요. 가지고 있는 물감을 그냥 사용하다 나중에 맘에 안 들면 지워버립니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작은 도전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선호하거나 의미를 부여한 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색채 이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색을 선택하게 되고요. 처음부터 사용할 수 있는 범위의 색들을 늘어놓을 때도 있지만 크게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색깔끼리 만나 기괴하게 보일 때 굉장히 좋기도 하니까요. 오히려 빨강이나 노란색을 너무 자주 써서 이제는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두 색에 손이 갔어요. 자꾸 찾게 되는 맥도날드처럼요.
실크스크린 기법을 캔버스에 적용해 같은 드로잉을 바탕으로 다른 작품들을 만들어왔습니다. 여러 변주 중에서도 검은 윤곽선을 그대로 살리거나 지우는 방식이 눈에 띄는데요. 저 선들은 샤피펜에서 비롯되었군요. 무의식적으로 샤피의 냄새를 맡을 정도라 아내에게 혼이 나곤 합니다. 제 아들도 똑같이 따라 하고 있더라고요. 샤피를 멀리 둬야겠어요.
멀리 둔다고 농담을 했습니다만 진짜 단종이 된다면. 이런,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정말 최악일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만들어야 될 것 같아요.
드로잉 과정에서도 수정액으로 그림을 덮어버리네요. 마치 베일을 드리우듯 흰 페인트로 그림의 일부를 지우는 ‘화이트 아웃(Whiteout)’ 시리즈가 떠오릅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그린 <은하계 같은 풍경 ‐ 로지아(Loggia)에서 바라보다>도 같은 기법으로 만든 작품이지요. ‘화이트아웃’은 선에 집중하는 작업입니다. 단순히 무언가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무엇이 나올 수 있는지 보려는 것이죠. 선을 억제하거나 더하는 것으로 그림의 DNA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이미지이지만 재해석된 다른 회화가 되는 것입니다. 신작은 프랜시스가 죽은 후 시작한 그림인데요. 먼저 프랜시스를 그려 놓고 다양한 색을 더하고 싶었어요. 흰색으로 덮고 여러 그림을 덧그렸지만 프랜시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작업량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요? 드로잉은 저에게 일상이니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고요. 그 외에 일을 정말 많이 하는 편입니다. 워커홀릭이에요. 마감일을 정하고 작업을 하는 작가는 아니라 그냥 그립니다. 베니스비엔날레에 산마리노 공화국 작가로 출전하면서 두 달 반이라는 마감 기한이 생겼을 때는 정말 심하게 일했어요. 작업에는 게으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테니스공이 두루 등장하는 이유가 테니스를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즐기기 때문이라죠. 앞으로 그림에 등장할 만큼 또다른 열렬한 취미가 있을까요? 저는 안티 소셜적이진 않지만 잘 나가지 않고 술도 안 해요. 전시 오프닝에 꼭 참석해야 하는 게 아니면 잘 안 나가지요. 그래서 현재 시점에 새로운 취미는 없는 것 같습니다. 친구가 많이 필요하지도 않고 소수의 인원과 만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작업하고 가족이랑 시간을 보내고 테니스 치고. 이게 다예요. 이거면 됩니다.
기자간담회에서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는 물음에 “그림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미술관 밖에서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무언가를 찾길 바란다고 했는데요. 어렸을 때 저는 극도로 불안정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제 자신을 그곳으로부터 분리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방법이 그림이었고 어느새 그림은 저에게 너무나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건 그림밖에 없어요. 운이 좋았고 축복받았지만 성공하지 않았더라도 저는 아마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림으로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도 제 작품을 공유하는 일은 무척 좋아합니다.
스스로에게 앞으로 계속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스스로 항상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요. 확실한 건 더 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렇죠. 인생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투 비 컨티뉴드(To Be Continued)»전은 스페이스K에서 6월 16일까지 열린다.

박의령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에디 마티네즈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 펜 한자루와 종이 뭉치를 통해 작품의 미래를 엿본 기분이다.

Credit

  • 글/ 박의령
  • 사진/ 표기식,스페이스K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