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024 봄/여름 레디-투-웨어 컬렉션은 자유와 움직임에 대한 찬사로 빌라 노아유의 정원에 뿌리를 둔 이야기를 전합니다. -버지니 비아르
패션은 사람들의 이상과 취향을 가장 쉽게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다. 패션 하우스들이 저마다의 뮤즈를 만들고, 그들의 세계관을 패션 속에 녹이는 건 패션이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패션 하우스는 단순히 원단을 재단하고 재봉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상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입체적으로 녹여내 하나의 컬렉션을 완성한다. 그 속에 담긴 맥락이 사람들에게 이해될 때, 패션은 소비되고 유행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시즌의 컬렉션을 살펴보는 일은 하나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즐겁다. 이제 막 막을 내린 2024 S/S 샤넬 컬렉션에는 아티스틱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가 써 내려간 스토리가 담겨있다. 이번 컬렉션을 한 편의 소설로 치환한다면 그 배경은 1923년에 설계된 프랑스 최초의 모더니스트 주택인 빌라 노아유(Villa Noailles)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유로이 휴가를 즐기는 여인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빌라 노아유는 샤를 드 노아유(Charles de Noailles)와 마리-로르 드 노아유(Marie-Laure de Noailles) 부부가 자신들의 이름을 따 지은 모더니즘 스타일의 빌라다. 1923년 로베르 말레-스테뱅스(Robert Mallet-Stevens)가 설계한 것으로 바다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에르(Hyeres)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젊은 부부는 코트다쥐르의 따뜻한 태양이 비추는 해변가에서 겨울을 보내고 싶어했고, 노아유 자작의 말을 빌리자면 ‘거주하기에 흥미로운 집’에서 정원을 가꾸며 삶을 즐기고 싶었다고 한다. 빌라는 자작의 어머니인 푸아 대공녀(Princess de Poix)가 부부에게 결혼 선물로 준 언덕 위의 광활한 대지 위에 1923년에서 1925년 사이에 지어졌다.


선구적인 건축가였던 로베르 말레-스테뱅스는 이미 패션 디자이너 폴 푸아레(Paul Poiret)를 위해 파리에 빌라를 짓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푸아레의 파산으로 중단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노아유 부부의 의뢰를 받고 이번에는 현대적인 삶의 예술(Art De Vivre)을 표방하는 모더니즘 양식의 빌라를 짓고자 했다. 빌라 노아유가 지어졌던 1920년대는 건축에 대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점이다. 당시 르 코르뷔지에는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라는 책에서 주택을 ‘살아가기 위한 기계’로 명명했다. 이를 위해 그는 비례를 통해 건축학적으로 인간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탐구하고 건축에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화려함을 강조하던 아르데코 양식 건축의 시대가 저물고 순수하고 좀 더 인간성을 강조한 집들이 지어지기 시작한 셈이다. 로베르 말레-스테뱅스는 고객의 바람에 따라 깔끔한 건축 라인, 이동과 사용에 완전한 자유를 선사하는 모듈식 공간, 햇빛이 충분히 들어오는 커다란 창 등에 초점을 맞춘 집을 설계했다. 내부는 금욕주의에 가까운 단순한 디자인에 순수하고 절제된 장식, 고도로 기능적인 가구로 꾸며졌다. 이러한 급진적인 건축양식은 20세기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로베르 말레-스테뱅스는 이 특별한 프로젝트를 통해 모더니즘 건축양식의 주요 원칙을 정립할 수 있었다. 이 원칙은 1929년부터 UAM(Union des Artistes Modernes, 현대예술가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원칙이기도 했다. 로베르 말레-스테뱅스는 장 프루베(Jean Prouve),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피에르 잔느레(Pierre Jeanneret),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 마텔(Martel) 형제와 함께 UAM의 창립자였다. 로베르 말레-스테뱅스를 포함한 이들 모더니즘 운동의 주창자들은 형태와 기능을 결합한 실용적인 건축과 디자인을 추구했다. 빌라 노아유는 콘크리트, 금속, 금속관 같은 산업 자재와 생고뱅의 공장에서 새롭게 개발한 유리판을 광범위하게 사용해, 건물 외벽에 대형 베이 윈도로 포인트를 줬다. 당시는 현대적인 편안함, 위생, 건강을 중시하면서도 가능한 많은 야외 공간을 확보하고 동시에 스포츠를 즐기던 시대였다. 이 빌라는 수영장, 헬스장, 스쿼시 코트까지 갖추고 있어 쾌락주의와 실용주의를 오가는 모더니티의 개념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이처럼 빌라 노아유는 집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건 마치 1920년대에 등장한 가브리엘 샤넬의 옷과도 유사하다. 기능성, 선의 순수성, 소재의 단순성이라는 스타일 지침으로 만들어진 그 시절 샤넬의 옷은 빌라 노아유의 정신과도 동일하다. 실제로 샤를과 마리-로르 드 노아유 부부, 그리고 가브리엘 샤넬은 파블로 피카소, 만 레이(Man Ray), 크리스티앙 베라르(Christian Berard), 장 콕토,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등 동일한 부류의 예술가들과 자주 어울렸다. 자작 부인이었던 마리-로르 역시 가브리엘 샤넬의 오트 쿠튀르 의상을 자주 입었다. 그 인연은 칼 라거펠트에게도 이어졌다. 1995년 여름 칼 라거펠트는 빌라 노아유의 아방가르드한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2010년 샤넬은 빌라 노아유에서 열린 상설 전시 «샤를과 마리-로르 드 노아유, 후원자의 삶(Charles Et Marie-Laure De Noailles, Une Vie De Mecenes)»의 주요 후원사로 참여하며 역사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 전시는 노아유 부부와 1923년부터 1970년까지 이어진 이들의 한결같았던 예술 후원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최초의 전시였다.


올해는 빌라 노아유의 건립 1백 주년이 되는 해다. 가브리엘 샤넬 시절부터 지금까지 빌라 노아유는 하나의 사상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또한 그 사상에 동조하는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만나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던 영감의 살롱 같은 곳이었다. 샤를과 마리-로르 드 노아유 부부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예술 후원자이자 수집가로, 시·문학·영화·시각예술·건축·장식예술·무용·음악 등 모든 분야의 미적 혁명에 함께했다.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발튀스(Balthus), 크리스티앙 베라르,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 알베르토 자코메티, 자크 립시츠(Jacques Lipchitz), 파블로 피카소, 프란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 만 레이, 쿠르트 바일(Kurt Weill) 등이 이토록 끝없는 영감을 주는 창의적인 빌라를 자주 찾았다. 이곳에서의 삶은 스포츠, 오락, 파티와 연회, 창작 활동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공간 덕분에 손님들에게 빌라는 마치 빈 캔버스와 같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이뤄진 수많은 화학작용은 시대를 이끄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버지니 비아르가 빌라 노아유를 배경으로 한 편의 이야기, 즉 2024 S/S 컬렉션을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것 역시 그곳이 단순한 집 그 이상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빌라 노아유가 품고 있던 큐비즘 양식의 정원은 이번 샤넬 컬렉션에 다양한 패턴으로 재해석됐다. “세련미와 캐주얼, 컬렉션 전체에 사용된 트위드 소재, 스포츠웨어, 레이스 등 반대의 것들을 가져다 가능한 한 멋지게 결합하고자 했어요. 빌라 노아유의 정원과 수영장이라는 이 멋진 배경이 여기에 큰 도움이 되었죠.” 풍성한 기하학적 패턴, 대조적인 비대칭, 패치워크, 라인, 체크, 스트라이프 등 다양한 패턴들이 버지니 비아르식 우아함과 무심함을 표현했다. 물론 빌라 노아유 수영장에 딱 어울리는 수영복과 로브, 플립플롭도 눈길을 끈다. 블랙핑크의 제니가 반했다는 블랙 오간자 미니 드레스와 테리 소재의 재킷, 네오프렌 수트, 레이스 팬츠 등 여유롭고 풍성한 소재의 사용도 이번 컬렉션의 재미 중 하나. 느슨한 소재들은 유연한 실루엣과 어우러져 마치 빌라 노아유의 공기를 패션으로 표현한 듯했다. 옷은 하나같이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이다. 허리는 낮고, 슈즈는 납작한 플랫이 주를 이뤘다. 수트 역시 어깨 장식과 라이닝을 제거해 가볍고 매우 유연하다. 베스트, 자유롭게 드레스처럼 입은 카디건, 포켓 장식 팬츠, 블루머, 플리츠 등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에 어울리는 옷들이 가득했다. 물론 이 평화로운 컬렉션 속에도 샤넬식 관능미는 곳곳에서 은은하게 풍겨나왔다. 블랙 오간자로 만들어진 드레스, 셔츠, 페티코트, 브라 톱은 무한한 레이어링이 가능하게 했다. 강한 개성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의 우정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마리-로르 드 노아유와 가브리엘 샤넬에 대한 레퍼런스는 골드 체인 장식의 블랙 선글라스로 표현됐다. 카메라 모양의 가방 역시 우리가 이 옷을 입고 떠날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아리따운 꽃을 배경으로 이뤄진 이번 컬렉션은 보는 것 자체로 빌라 노아유의 공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하나의 컬렉션을 통해 우리는 1920년대를 휩쓴 모더니스트 건축과 패션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고 그 옷들은 우리에게 인생을 좀 더 단순하게 살아도 된다고, 보다 더 여유로워져도 된다고 끝없이 이야기한다. 집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안식처이고, 옷은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제1의 집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