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대다수의 결과물이 무척이나 ‘우아’하고, 또 ‘쿨’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흑백사진 속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헐렁한 티셔츠에 버클 장식의 조거 팬츠, 무심하게 벨트를 더한 그녀의 모습은 전형적인 펑크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 영혼에 담긴 펑크 스피릿을 느낄 수 있기에. 이처럼 2023년 가을엔 대놓고 반항심이나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다채로운 영감과 어우러져 보다 정제된 방식으로 표현된 펑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타일링에 있어서도 컬러풀한 염색 머리나 짙은 화장보다는 자연스러운 스킨헤드나 포인트만 살린 메이크업을 지향했고, 안전핀과 같은 터프한 액세서리를 내려놓은 채 각진 형태의 볼드한 주얼리와 스터드, 하네스 장식을 모티프로 한 피스로 힘을 보탰다. 대표적인 컬렉션으로는 발렌티노, 블루마린, 버버리, 펜디, 시몬 로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동반자이자 현 브랜드의 메인 라인을 이끌고 있는 안드레아스 크론탈러의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있다.
먼저 ‘블랙 타이(Black Tie)’를 주제로 한 컬렉션을 선보인 피에르파올로 피촐리의 발렌티노를 살펴보자. 남성 권위의 상징이던 셔츠와 수트를 해체하고 재구성해 완성한 룩들은 화려한 펑크 스타일과 만나 비로소 ‘젊음’을 얻었다. 셔츠 깃이 달린 블랙 미니 드레스가 펑크 스타일링과 어우러져 MZ세대들이 클럽에 갈 때 입을 법한 이브닝 룩으로 변신한 것이 그 예다. 한편 불타오르는 ‘B’로고가 런웨이를 장식한 블루마린 쇼에서는 펑크 전사로 거듭난 잔 다르크 군단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버클 장식으로 코르셋과 같은 느낌을 준 뷔스티에 톱, 스터드가 장식된 초커와 뱅글, 벨트가 눈길을 끌었고, 이 모든 것은 특유의 Y2K 감성과 어우러져 인상적인 컬렉션을 완성했다. 그렇다면 다니엘 리의 첫 번째 버버리 쇼에서 펑크는 어떤 방식으로 구현됐을까? 버버리 고유의 헤리티지(영국 그 자체인!)에 집중한 다니엘은 영국 특유의 펑크적인 요소들도 컬렉션에 주입했다. 리카르도 티시 시절엔 찾아볼 수 없었던 생생한 컬러 팔레트의 타탄체크, ‘장미가 항상 빨간색인 것은 아니다(Roses Aren’t Always Red)’라는 문구가 담긴 그래픽 티셔츠 등이 컬렉션에 활기를 더하는 데 감초 같은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고. 반면 펜디의 킴 존스와 시몬 로샤는 기존의 스타일에 펑크 스피릿을 불어넣음으로써 은근한 변화를 꾀했다. 펜디 특유의 이탤리언 시크와 어우러진 펑크적인 요소(하네스 디테일이 가미된 사이하이 부츠, 플리츠 스커트와 팬츠의 레이어드), 시몬 로샤 스타일로 로맨틱하게 변주된 펑크 드레스에서 이를 느낄 수 있을 것. 여기에 비비안 웨스트우드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와도 같았던 안드레아스 크론탈러의 웨스트우드 쇼 역시 그녀가 남긴 유산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펑크 패션의 탄생 배경에는 1970년대 경제 불황으로 절망에 빠진 10대들이 있었다. 히피들이 유토피아를 떠올리며 현실 도피를 꿈꿨다면 펑크족들은 미래에 대한 포기, 기존 권위 체제에 대한 저항심을 공격적이고 때론 충격적인 옷차림으로 표현했던 것. 2023년의 MZ세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적 어려움이 야기한 불투명한 미래를 마주하며 포기하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고 있으니 말이다. 하이패션계에서 펑크의 약진은 어쩌면 시대를 투영한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적 통념을 깨고 미래를 제시하는 패션의 잠재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그러했듯, 이 시대의 디자이너들은 펑크 정신을 보다 우아하게 풀어냄으로써 젊은이들에게 보다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더 나아가 이 매력적인 피스들이 우리의 옷장을 풍요롭게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