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인문학관 강인숙 선생의 <글로 지은 집>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영인문학관 강인숙 선생의 <글로 지은 집>

이어령 선생이 떠난 지 일년, 그가 글 쓰던 순간을 볼 수 있는 서재가 곧 개방된다.

BAZAAR BY BAZAAR 2023.03.06
촬영을 하며 이어령 선생님의 글 중 가장 공명한 글이 무엇이냐는 제 물음에 이런 구절을 써주셨어요. “풍선이 날아간 하늘을 향하여 목놓아 울던 소년이 있었다.” 
우리는 항상 상실하면서 살아가잖아요. 풍선이 날아간 하늘을 보며 우는 소년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젊은 시절 처음 상실을 경험하게 되면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슬픔을 알게 되죠. 삶과 죽음을 오롯이 표현한 말 같아 공감해요.
〈글로 지은 집〉은 스물여섯 살의 부부가 삼선동 방 한 칸에서 시작해 김승옥, 최인호 등 여러 문인들이 드나 들던 전셋집을 거쳐 1970년대 허허벌판이던 평창동에 지금의 영인문학관 터를 잡기까지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2020년 내 나이 미수(米壽)가 되던 해, 지난 세월을 정리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어요. 그랬더니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집이었어요. 크기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집은 자기만의 성이지요. 유목 민족이 아니라, 정착이 필요한 농경사회를 거친 한국인들은 더욱 집을 중요하게 여겨요. 남편과 나는 둘 다 교수이자 평론가이기에 각자의 서재가 있는 집이 꼭 필요했어요. 10여 년 넘는 셋집살이를 마치고, 무리해서 문학관을 짓고 나서는 글 쓰고 받은 고료로 빚을 갚기 바빴어요. 말 그대로 이곳은 이 선생이 ‘글로 지은 집’이죠.
“세상에 나서 내가 가장 기뻤던 때는 그에게 원하는 서재를 만들어주던 때였다. 이어령 씨는 내게 좋은 것을 다 주고 싶은 그런 남편이었다.” 담담한 문체로 희랍 신전 같은 서재를 남편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하셨죠. 정작 선생님의 서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요. 
아래층 한편의 내 서재는 필요한 것만 남겼어요. 아주 소박해요. 읽고 싶은 책은 이곳에 와서 몰래 보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시 꽂아두곤 했죠.(웃음) 세 아이가 떠나간 뒤 둘만 남자, 우리는 둘이 살기에 너무 커진 집을 2001년 주거 공간을 포함한 문학관으로 만들었어요. 해마다 전시관에서 문인들의 소장품과 작업을 소개하는 기획 전시를 열고 있어요.
오는 9월 이어령 선생님의 바람대로, 글 쓰던 순간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그의 서재를 개방하시기로 했죠. 
여러 기관들과 6천여 권의 방대한 서적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국립중앙도서관 직원이 와서 6개월간 ‘이어령 자료 아카이빙’을 진행하기도 했고요. 컴퓨터 7대에 각 나라의 언어로 정리된 자료는 아직 건드리지 못했죠. 출판사와 어록집 출간도 계획하고 있고요. 내가 떠나기 전, 할 일이 많아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동기로 만나 1958년 결혼식을 한 이어령, 강인숙 선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동기로 만나 1958년 결혼식을 한 이어령, 강인숙 선생.

책을 읽으며 1950년대에 셋방살이를 하며 사기를 당한 일화처럼,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반세기가 지나도 평론가의 기억력이란 그토록 세밀한 것임에 놀랐고요.  
그때 인간에 대한 불신을 배웠어요.(웃음) 어제 읽은 책의 내용은 곧잘 잃어버려도 지난 시절 입력된 기억은 잘 생각나요. 나이가 든다고 뇌의 전체가 한 번에 늙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기억하고 싶은 부분은 망각의 속도가 늦춰지는 거죠. 이 선생도 마지막 날에 누워있다가 인터뷰를 하거나 밖에서 스피치를 할 때면 논리적으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잘하곤 했어요.
이 에세이를 쓸 때 이어령 선생님은 어떤 반응이셨나요? 
젊을 때부터 서로의 글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어요. 집에만 오면 아이 셋이 달려들어 ‘내 얘기 좀 들어 달라’고 아우성치니까. 선생은 기호학과 수학을 바탕으로 쓰고, 저는 리얼리즘을 쓰니 전공 분야도 다르고요. 이 책은 본인의 얘기가 들어있으니 보여드렸는데, 아무 말 없더군요. 그건 마음에 든다는 뜻이에요. 문제가 있으면 바로 말할 분이니.(웃음)
글 쓰는 여성의 삶을 말한다는 점 때문일까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떠올랐습니다.  결혼 전 쓴 에세이 집 〈어느 고양이의 꿈〉에서 처음 내 방을 갖게 된 경험을 쓴 적이 있어요. 울프의 방은 처녀 시절 내가 원했던 세계에 가까워요. 하지만 결혼을 하고, 세 아이의 어머니라는 삶을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더 복잡한 길을 걸어왔죠. 우선 방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있을 시간이 전혀 없었거든요.(웃음)
“우리는 둘 다 남편이나 아내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방에서 떠들다 헤어지는 관계가 훨씬 애틋하고 간결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폐백과 함, 신혼 여행을 생략한 결혼식을 치르셨죠. 동갑내기 부부인 두 분의 젊은 시절을 짐작해볼 수 있는 점도 이 책의 묘미입니다. 요즘처럼 1인 가구가 많은 시대에 이런 기록이 더욱 생경하기도 해요.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혼자 남았잖아요. 이 집에서 죽음을 앞두고 외로움의 의미를 조용히 생각해보게 돼요. 나이가 들면 외로운 척을 안 해야 해요. 옆의 사람들에게 폐가 되기 쉽거든요. 오래 산다는 건 곁에서 지켜볼 누군가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요즘 혼자의 삶을 택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유와 고독의 관계를 생각하게 돼요. ‘freedom in exile’. 자유는 고독을 수반하고, 둘은 떼놓을 수가 없는 관계죠. 그러니 자유롭게 살려면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까지 이어령 선생이 읽은 책들.

마지막까지 이어령 선생이 읽은 책들.

그리움이 느껴져요. 
남편이 떠나기 몇 달 전까지도, 손님만 오면 앱으로 배달 음식을 주문하려 했던 게 기억나요. 둘이서 늘 집에서 만든 음식만 먹다가 터치 한 번으로 바로 배달되는 게 그렇게 신기하다면서, 누가 찾아오면 “배달시켜 먹자” 그랬죠.
세 아이를 키우면서 교수로 강단에 서는 와중에, 김동인과 염상섭의 자연주의를 구분해 분석하고,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을 포함해 6권의 문학평론집을 펴내기도 하셨죠. 가정을 일구며 글 쓰는 삶이 고단하지 않았나요? 
왜 고단하지 않았겠어요. 목욕탕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었고, 전화로 수다를 떨며 풀었어요.(웃음) 나는 야행성이어서 아이들을 재우고 밤 10시부터 2시까지 글을 썼어요. 글 쓸 시간이 간절하니, 아주 열심히 쓰게 됐죠. 낮에는 늘 잠이 부족해 졸렸고요. 자연주의를 연구하는 일은 일제시대를 겪은 우리 세대가 책임감을 지니고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남자들이 안 하니 내가 하는 수밖에 없다고 사명감을 가졌어요. 일종의 문학사의 설거지랄까.(웃음) 나중에 연구하는 이들이 모두 참고할 수 있도록 평론의 각주를 무척 상세하게 정리해두었죠. 우리 부부는 저녁에는 글을 써야 하기에 문인들의 모임에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오늘날 젊은 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82년생 김지영도, 33년생 김지영도 커리어 우먼들은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어요. 이화여대 국문과 박사과정 학생들은 마지막 학기에 기숙사에 머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시스템이라도 있어야 될 겁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괴력을 발휘해 살고 있죠. 저마다 선택한 삶이니 조언할 마음은 없어요. 다만 저는 누군가와 동행하기를 원했고, 아이를 낳고 생명에 대해 배우며 인간으로서 성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흔히 평론가는 까다로울 것이라 생각하는데, 비평을 쓸 때 가족들에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하셨다고요. 
원체 내 성격이 자기 말에 책임지는 것을 중시해요. 인간됨의 바탕에는 약속과 책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참 우직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이 나이까지 후회가 없어요. 둘째 아이가 아기일 때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때여서 조바심을 갖고 빨리 재우려 하니, 깊이 잠들지 못해 미안했어요. 날카로워진 신경은 아무리 자제해도 가족들에게 전달될 테니 더욱 조심했죠.
 
강인숙 선생의 글씨.

강인숙 선생의 글씨.

1970년대 발간된 동인지 〈신상〉에 28인의 여성들과 에세이를 연재하신 점도 흥미로워요. 
각자 전공과 관련된 지식을 얘기하고, 일상적인 얘기도 쓰고. 그 시절 참 대단한 여자들이 많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삶의 고단함을 털어낼 수 있었죠. 피아니스트 이숙훈 씨는 항상 무언가에 반하는 여성인데, 예술적인 감성이 풍부해 글도 참 재미있게 썼어요. 변덕이 없으면 예술가가 되기 어렵잖아요. 어제의 것을 잊어버려야 오늘의 창조를 시도하니까요. 매일 새로운 것에 반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와 나눈 대화가 참 즐거웠어요. 나이가 들어 가장 아쉬운 건, 어떤 얘기는 꼭 그 친구하고 해야만 말이 통하는 대화가 있는데, 친구들이 늙어서 그걸 충분히 나누지 못한다는 점이에요.
이어령 선생님께서는 ‘메멘토 모리’, 죽음과 삶, 그리고 탄생이 맞닿은 것이라 말하셨죠. 죽음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중국 문인 김성탄이 아이들의 돌잔치에 가면 어떤 덕담을 해야 할지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아이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는 인간의 운명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죠. 장관감이 될지, 시인감이 될지 예측하는 건 누가 알 수 있겠어요? 차마 아이에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우물쭈물하다 만다는 거예요. 이 말처럼 저는 늘 끝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죽음이 예고 없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지 오래인데, 아직도 이렇게 걸어 다니며 오래 살고 있어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웃음) 마지막 순간, 신속하게 죽을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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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안서경
    사진/ 이규원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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